“가치가 있을지 없을지는 이곳을 찾아봐야 알아.”
말하면서 카밀루스는 도면 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이온은 그의 손끝이 닿은 곳을 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해당 도면은 측면도였다. 총 두 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었는데, 하나는 탑이고 다른 하나는 낮고 네모난 건물이었다.
카밀루스가 방금 페드로에게 성전과 탑에 대한 자료를 가져오라 명했으니, 두 개의 건물이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지금은 북쪽에 터만 남은 블랑셰의 성전과 이름 없는 탑의 측면도인 것이다.
특이점은 두 건물이 지하도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점이었는데, 카밀루스가 가리킨 곳은 그중 탑으로 향하는 성전 쪽의 지하도로 향하는 입구였다.
탑은 물론이고 성전의 측면도는 생전 처음 보는 터라 이온은 집중해서 보다가 문득 드는 의문을 입에 올렸다.
“이곳은…… 지금은 그냥 평지일걸?”
이온의 말에 카밀루스는 곧장 동조했다.
“그래, 사실 그곳에 통로가 있을지 없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어. 있다고 해도 만약 이중 결계의 시전자가 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그곳으로의 진입 역시 막아 놨을 가능성도 있지.”
그렇지만 이 통로가 실제로 존재하고, 이중 결계의 시전자 또한 이 통로의 존재를 모른다면 그곳을 통해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카밀루스는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온은 그의 의도를 바로 알아채기는 했으나 당장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만만해 보여도 황성은 황성이었다.
이온이 저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황성 북부가 아무리 외진 곳이라고 해도…… 이 입구를 찾으려고 하면 시간이 걸릴 거야. 그리고 내황성은 기사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면서 정찰을 하고.”
“결계를 치려면 공간을 뒤틀어야 하니 금방 들키겠지. 그리고 현재 내황성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버니언과 나뿐이니…….”
“범인 특정은 바로 될 거고.”
이온과 카밀루스의 현실에 대한 평가는 거의 같다고 봐도 무방했다. 말을 주고받으며 그 사실을 확인한 카밀루스가 깔끔하게 인정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게 바로 그 부분이야, 이온.”
“…….”
이온은 잠시 침묵에 빠졌고, 카밀루스는 그가 내릴 결론을 기다렸다.
황도의 사정에 대해서는 이온이 더 빠삭하다는 사실이야 말할 것 없는 데다, 애초에 이런 방면으로는 이온이 좀 더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온이 입꼬리를 미세하게 휘어 올렸다.
“타이밍만 잘 맞춘다면 입구를 찾을 시간을 확보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도면이 있으니 위치야 어딘지 대략 예측할 수 있는 거고……. 요는, 내황성 전체의 이목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것이니까.”
“좋은 생각이 있나?”
이온은 그러나 아직 제 계획에 확신까지는 안 서는 듯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톱니가 잘 맞아야 하겠지만 말이야. 아버지의 도움이 있다면 좀 더 확실한 성공을 담보할 수 있겠지.”
“공작의?”
탑으로 향하는 입구를 찾겠다는 데 크레이거 공작이 과연 순순히 협조를 해 줄까.
카밀루스와 마찬가지로 이온 역시 그 부분이 의문스러워하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고민할 문제라는 듯, 이온이 제 검지로 카밀루스를 가리켰다.
“카밀루스, 너도 조연으로 필요하고 말이야. 사실 버니언이 제일 관심을 두는 사람은 너잖아?”
이온이 은근한 장난기를 비치자 카밀루스가 미간을 구겼다.
“……요즘엔 열등감도 관심이라고 표현하나? 끔찍한 얘기인데.”
“어쨌든.”
가볍게 카밀루스를 놀린 이온의 시선이 이번엔 어느새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페드로에게로 향했다.
“결론적으로 입구 위치를 확인하는 역할은 페드로가 맡아야 한다는 뜻이죠.”
그에 페드로가 내린 결론은 더없이 깔끔했다.
“저는 대공의 명이라면 뭐든 합니다.”
“좋아요.”
이온이 눈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재미있는 일이 하나 더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만족감에서 비롯된 웃음이었다.
* * *
“이온이 나한테 답장을 보냈다고?”
황궁의 집무실.
이놈의 나라 일은 돌볼 게 얼마나 많은지, 도무지가 쉬는 시간도 제대로 나질 않았다.
매일매일 그런 짓을 하다 보면 낮쯤에는 거의 짜증 지수가 절정에 달하는데, 그런 버니언의 앞에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소식이 도착했다.
제 편지에 대한 이온의 답변을 재촉할 겸, 이온에게 선물을 가져다주러 크레이거 공작가에 다녀온 시종이 알려 준 것이다.
‘소공작의 편지가 분실됐다.’라고.
반문하는 버니언의 표정이 딱 굳었다. 그가 똑바로 얘기하라는 의미로 책상 앞에 선 이를 노려보자, 공작가에 다녀온 예의 시종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예, 그런데 소공작이 확인해 준 바로는…… 내황성 입구를 통과해 황궁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분실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너무 느릿한 그 말이 답답해진 버니언은 그의 말허리를 확 끊었다.
“그래서? 그래서 결론이 뭐란 거야? 이온의 새 편지라도 가져왔나?”
“소공작이 전해 달라고 부탁한 말은 있습니다만…….”
제 앞의 이가 내뿜는 거센 압박감 때문에 시종은 한겨울인데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온의 전언이 있다는 말에 다행히 버니언의 목소리가 약간 누그러졌다.
“말해라.”
이온의 소식이라면 뭐든 궁금하긴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음 말을 들었을 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시종은 어깨를 잔뜩 긴장시켰다.
“본인의 몸은 괜찮으니 보냈던 편지에 적힌 대로 다음에 만날 기회가 분명 있을 것이라며, 그때 뵙고 인사드리겠다고 전해 달라 했습니다.”
역시나 말을 듣는 중간쯤부터 버니언의 눈빛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화를 참듯 깊은숨을 들이켜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편지의 행방을 찾았나?”
“…….”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가 곧장 가지고 있던 펜을 집어 던져 버렸다.
“이 무능한 게!”
탁, 타악!
바닥에 부딪힌 펜이 다행히 시종의 옆에 튕겼다. 시종은 날카로운 펜촉이 제게 꽂히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사색이 된 채 바닥에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버니언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책상 밖으로 나와 시종 앞에 섰다.
“편지를 보라고 했는데 편지가 없으면 똑같은 내용으로 새로 받아 오든가, 아니면 편지를 찾든가 둘 중 하나는 해야 했을 것 아니야! 어?”
윽박지르는 버니언의 앞에서 시종은 제 잘못은 아니지만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몰라 어깨를 파들파들 떨었다.
“소, 송구합니다. 당장 편지의 경로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거지.”
천만다행으로 시종의 대답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버니언이 또 급격히 흥분을 식히며 그렇게 말하자 시종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다음 것을 전달하면, 분명히 버니언이 또 화가 머리끝까지 날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다고 분노가 쏟아질 것이 무섭다고 제 본분을 다하지 않는 것은 시종으로서의 좋은 태도가 아니었다.
결국 시종은 주저하며 다시금 말을 꺼냈다.
“저, 그리고 폐하…….”
용건이 다 끝난 줄 알았는지 벌써 뒤돌아서던 버니언이 걸음을 멈칫했다. 몸을 살짝 튼 그의 앞에서, 시종이 양손으로 공손히 무언가를 내밀었다.
반으로 접힌 종이였다. 안쪽에 글씨가 적힌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게 뭐냐?”
“대공께서,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예상대로 버니언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실로 봉하기는커녕 봉투조차도 없는, 한 조각 성의도 보이지 않은 종이 쪽지를 내려다보는 버니언은 당장 박박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카밀루스의 편지라고 하니 안 보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 열지 않으면 마치 제가 회피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결국 탁, 하고 시종의 손에서 종이를 가로챈 버니언이 접힌 종이를 슥 펼쳤다.
예상은 했지만 글씨마저 대충 썼다. 그 와중에 가독성은 좋은 필체 때문에 더 짜증이 났지만, 그렇게 휘갈긴 글씨보다 버니언을 더 열받게 하는 건 당연히 그 내용이었다.
지난번의 내 경고를 잊지 마.
네가 부리는 개수작들, 어차피 다 내 손바닥 안이야.
“이 씹새끼가……!”
보자마자 종이를 와락 구기며 욕설을 갈긴 버니언이 제 분을 참지 못하고 책상을 발로 차 버렸다.
챙그랑!
그 때문에 위의 잉크병이 굴러떨어지면서 바닥에 검은 잉크가 확 흩어졌다.
그 광경에 집무실을 깨끗이 치워야 하는 황궁의 하인들은 남몰래 벌써부터 피곤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