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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루스의 짧은 쪽지를 보고서 격분한 버니언이었지만, 정작 카밀루스 본인은 불러들이지 않고 오히려 빨리 이온의 편지를 찾아내라며 시종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동쪽에서 뺨 맞고 서쪽에서 화풀이하는 격이었다.
황궁, 아니 온 성을 뒤져서라도 반드시 이온의 편지를 찾아내라는 버니언의 명에 따라 황궁의 시종들과 하인들은 물론이고, 황실 기사단인 그레나 기사단의 기사들까지 동원되었다.
그러고도 하루 종일 불안 증세를 보이던 버니언은 결국 일찌감치 제 침실로 돌아왔다.
딱, 딱…….
하지만 제 침실로 돌아갔다고 해서 그의 불안증이 사라진 건 결코 아니었다. 버니언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하고, 침대 위에 걸터앉은 채로 제 앞니에 손톱을 갈고 있었다.
그러다 방 안의 고요함에 짓눌려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평소라면 그가 이미 잠들었을 때쯤, 복도가 다소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에 버니언이 방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밖에서 극도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혹시나 버니언이 잠들지 않았을까 우려하여 그리 작게 부르는 것 같았다.
듣자 하니 시종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시종이 여럿이긴 하지만 버니언이 거의 매일 듣는 목소리를 구분하기 못할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밖에 누구냐?”
묻는 소리에 얼른 대답이 돌아왔다.
“예, 폐하. 그레나 기사단 소속의 월턴이라고 합니다. 폐하께서 명하신 일이 해결되어 늦었지만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상대의 목소리에 다행스러워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안 그래도 이온의 편지 때문에 잠 못 들고 있던 버니언은 밖에서 들려온 말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을 열자 과연 그레나 기사단의 복장을 한 기사 하나가 버니언의 앞에 얼른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버니언은 왜인지 경직된 분위기의 복도를 둘러보다가 한 가지 의문을 입에 올렸다.
“그런데 보고를 왜 그대가 하는 거냐. 내 시종장은 어딜 가고?”
물으면서 버니언은 원래라면 복도에 있었어야 할 시종장의 흔적을 찾았다. 그렇지만 복도 어디에도 그 익숙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제 눈길이 닿는 곳에 있는 시종들이 한결같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이,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버니언의 지랄맞음 때문에 시종들이 평소 몸을 많이 사리기는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서 드러나는 긴장감은 평소의 것과는 또 다른 유였다.
그게 기묘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앞의 기사가 그 답을 내 주었다.
“그것이, 크레이거 소공작의 편지가 황궁 시종장의 책상 서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뭐?”
버니언은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짧게 물었다가, 이내 표정을 싹 굳혔다.
“지금 뭐라고 했지?”
재차 묻는 소리에 기사가 방금 전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크레이거가의 소공작이 폐하께 보낸 편지가 황궁 시종장의 책상 서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
누워서 잠을 자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야심한 시각이라 문을 열 떄까지만 해도 그의 눈에는 충분히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두 번의 대답을 듣는 동안 버니언의 눈에서 그러한 잠기운은 싹 달아나 버였다.
현재 황궁 시종장은 버니언이 어렸을 때부터, 그리고 그 자신이 백작가의 영식이었을 때부터 줄곧 버니언을 섬겨 왔던 시종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구석도 종종 있었지만, 긴 기간 함께해 왔기 때문에 버니언도 결국 그가 강하게 말하면 좀 따르는 편이었다. 그만큼 그를 신뢰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버니언으로서는 그물게 말이다.
간단히 정리하며 그는 제 사람이었고, 같은 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온의 편지가 어디서 나와?
버니언은 제 뒤통수가 얼얼해짐을 느꼈다. 그에 잠시 멍하니 서 있자, 시종장의 배반을 알린 기사가 물어 왔다.
“하여 일단 시종장을 방에 구금해 두었는데, 직접 가서 살피시겠습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버니언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가지.”
시종장의 방이야 어딘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버니언은 거의 가 본 적 없는 위층으로 향하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그동안 지난 며칠 동안 제 시종장에게서 들었던 말을 곱씹었다. 몇 번이나 이온에게서 편지가 왔느냐고 물었을 때, 시종장의 대답은 조금씩 달랐지만 의미는 늘 같았다.
〈소공작의 답변은 아직입니다, 폐하.〉
〈오늘도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전해받은 바는 없습니다.〉
그러고 어제는 마침내.
〈최근에 소공작의 몸이 좋지 않아 내내 움직이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크레이거 가문에 사람을 보낼까요?〉
답변이 오지 않았으니 사람을 먼저 보내자고 했다.
그런데 이온의 편지를 뒤에 숨겨 놓고서 그런 말을 한 거였다고?
버니언의 생각으로도 그건 뭔가 이상했다.
이온에게 사람을 보내면 편지를 안 보낸 걸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 편지의 행방을 찾게 될 터였다.
이후의 진행이 뻔한데 그걸 버리는 것도 아니고 고작 책상 서랍게 숨겨 놓고 있었다니.
‘물론, 시종장이 이온을 그렇게 마음에는 안 들어 했던 것 같지만.’
시종장은 줄곧 이온을 경계해야 할 사람이라고 말해 왔었다. 크레이거 공작가는 황실의 든든한 우군을 자처해 왔지만, 크레이거 공작의 친우였던 선황이 돌아갔으니 황위에 오른 이가 바뀐 지금은 어떤 의중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며.
그중에서도 특히나 이온 크레이거는 비렌시움 대공과 각별히 가까운 사이이니, 더 주의해야 한다고 했었다.
그러한 경계는 카밀루스가 크레이거 공작가에 의탁을 시작한 때부터 더 강해졌다.
사실 그래서 이전에 그들 부자를 황궁으로 바로 불러들인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만약 진짜로 시종장이 이온의 편지를 숨긴 거라면.
‘이간질?’
그런 의도 외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잡념을 이어 가다 보니 시종장의 방 앞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문이 열리자 과연 제게 보고를 올린 기사의 말대로 그의 시종장이 몇몇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그 방 안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버니언이 안에 들자 기사들이 예를 올렸고, 시종장은 사색이 된 채로 버니언을 맞이했다.
“……제,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시종장은 지금껏 버니언이 봐 왔던 모습 중에서 가장 질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버니언은 그런 그를 말없이 보다가 저를 여기까지 안내한 기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편지가 정확하게 어디에서 나온 거냐? 그리고 편지는 어디 있지?”
“예, 폐하. 발견된 자리에 그대로 두었으니 확인하시지요.”
버니언은 억울해 해명을 하고 싶다는 표정의 시종을 일단 무시하고 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수색하느라 뒤집어 놨기 때문인지 약간 어수선한 방의 한구석에 책상이 놓여 있었다.
시종장의 방에 처음 와 본 버니언은 기사를 쫓아 책상 안쪽으로 갔고, 이내 편지를 어떻게 발견하게 됐는지 경위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말인즉 서랍은 열쇠를 이용해 열 수 있었으며 편지는 그 서랍 중에서도 가장 안쪽, 특히나 수납을 위해 넣어 둔 상자 밑에 깔려 있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예의 열쇠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서랍의 열쇠를 백작이 매일 가지고 다녔다?”
“그렇습니다, 폐하.”
말을 듣고 버니언이 시종장을 돌아보자 그가 얼른 외쳤다.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폐하! 이건, 이건 누군가의 모함이 틀림없습니다!”
“…….”
제 오랜 시종의 말을 듣는 버니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는 기사들 사이에서 앉아 있는 시종장의 앞으로 걸어가, 그 앞에 우뚝 섰다.
그러고 제 시종장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백작, 그럼 열쇠를 좀 보여 주겠나?”
그의 요청에 시종장이 떨리는 손으로 제 품에서 작은 열쇠 꾸러미를 꺼내 버니언의 앞에 내놓았다. 버니언은 일곱 개의 열쇠가 걸려 있는 고리를 보다가 픽 웃었다.
“설마 품 안에 그리 깊이 넣어 둔 것을 누가 빼 갈 때까지 몰랐을 리는 없고.”
“폐, 폐하…… 설마 저를 아니 믿어 주시는 겁니까?”
“아니, 믿는다. 어차피 저런 조잡한 열쇠야 철사 같은 걸 쑤시면 적당히 열릴 때도 있잖나.”
버니언의 말에 순간 시종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역시 폐하께서 믿어 주실 줄…….”
“하지만.”
“……?”
“생각해 봐. 고작 소공작과 나 사이의 저런 편지 하나를 빼돌려서 이득을 보는 사람이 대체 누구지?”
카밀루스?
그렇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런 쇼를 해서 자신이 시종장을 내치면 카밀루스가 누릴 수 있는 반사이익이 뭔지 명확하지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시종장은 뭔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폐하, 그걸 모르시겠습니까? 폐하와 저를 이간질하려는…….”
뻔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려는 것에 버니언이 말허리를 중간에 잘랐다.
“그러니까, 백작과 나를 이간질해 봤자 뭘 어쩌겠느냐는 말이다. 어차피 시종이야 바꾸면 그만인데. 아, 그럼 설마 황궁의 시종장이 되고 싶은 누군가의 소행인가?”
“…….”
한두 해 함께한 것도 아닌 자신을 가볍게 다른 사람과 바꾼다고 하는 버니언의 발언에 충격을 받은 시종장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하지만 버니언은 그런 그의 심경 따위 알아주지 않고, 제 머릿속의 막연한 생각들을 계속해서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그대는 이온을 경계해야 한다고 내게 누누이 말해 왔지. 그리고 오랫동안 내 곁에 있었던 백작은 내가 편지를 보냈는데 소공작이 답변을 안 한다면 내가 그를 못마땅하게 여길 거란 사실을 알았을 거야.”
기실 버니언이 꺼낸 말들은 그야말로 억지로 연결한 것들이라 개연성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에 시종장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냐는 표정으로,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폐하, 만약 제가 그런 목적을 가졌다면 이런 허술한 짓을 했겠습니까?”
버니언도 그 점에 대해서는 곧바로 인정했다.
“물론 안 했겠지.”
“그럼…….”
“그러나 증명은 백작의 몫이 아니겠나?”
“폐하!”
결국 믿지 못하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라 시종장이 경악해 소리쳤으나 버니언은 코웃음을 쳤을 뿐이었다.
“괜찮아. 시종장 자격을 박탈하겠다는 소리는 아니니. 다만 좀 쉬고 오는 게 좋겠다, 백작.”
“…….”
“그대가 정말 결백하다면 누가 했는지 모르는 이 짓에 괜히 휘둘리고 싶지 않을 거 아닌가.”
버니언은 내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가 제시한 것들은 사실상 그에 상응하는 조치였다.
겨우 의심으로 말도 안 되는 처우를 하는 것에 시종장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못내 억울해하던 그는 마치 입 안에 쓴 물이 고인 듯한 기분을 느끼며, 이내 대답을 내놓았다.
“……알겠습니다.”
사실 쉬고 오라는 말보다, 저를 아무나와 바꿀 수 있다는 말에 더 마음이 상했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버니언은 눈썹만 한 번 까딱한 뒤 뒤돌아섰다.
방 밖으로 나가는 그의 손엔 며칠간 오매불망 초조해하며 기다리던 이온의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