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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76)화 (17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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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 가 크레이거 공작가에는 두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모두 황실발의 편지였는데 하나는 황태후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버니언이 보낸 것이었다.

각각 카밀루스와 이온의 손에 쥐어진 그 편지들에는 꽤나 흡족해할 만한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황태후는 아주 짧고도 비유적인 한 문장으로 카밀루스의 재방문을 유도했다.

“영원한 젊음은 영원한 아름다움과 동의어입니까?”

오늘도 이온이 늦잠을 잔 탓에 식당에서 함꼐 조금 늦은 아침 식사를 하다가 크레이거가의 하인에게서 편지를 전해 받은 카밀루스가 편지의 내용을 읊었다.

식사를 마치고 뜨거운 허브차로 입가심을 하며, 가벼운 티타임을 가지고 있던 와중이었다.

허브 배합이 별로였는지 떫은 맛이 난다며 우려 낸 찻물을 버리고 있던 이온은 그 말을 듣고 그만 웃고 말았다.

“누가 보면 비렌시움 대공이 사실은 약 파는 사람인 줄 알겠네.”

“네가 의도한 거 아니었나?”

이런 내용의 답변을 받을 줄 몰랐던 카밀루스 역시 작게 헛웃음을 치면서도 그렇게 반문했다. 이온은 슬쩍 미소하며 이번엔 제 편지를 살폈다.

버니언이 편지를 찾기 위해서 기사들까지 동원했다더라는 이야기를 이미 들은 이온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편지지를 펼쳤다.

내용을 살핀 이온이 뒷짐을 진 채로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에렌스트 경에게 편지를 넘기며 한마디 했다.

“곧 파티를 하시겠다는데 옷이라도 맞춰야 하는 거 아닐까.”

용건은 결국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는데, 쓸데없는 수식이 많은 버니언의 편지를 눈으로 훑어 내려간 에렌스트 경이 이내 허리를 숙였다.

“버틀러에게 외출 준비를 해 두라고 일러 두겠습니다.”

“응.”

그들의 짧은 대화를 들은 카밀루스가 반쯤 비워진 제 찻잔을 내려 두며 문득 물었다.

“그런데 이온, 괜찮은 거야?”

“뭐가.”

“시종장이 잠깐 휴가를 받긴 했지만 버니언이 어차피 무고할 게 틀림없다면서 따로 범인을 찾겠다고 또 난리를 피운다더란 소식을 네가 못 들었을 리는 없고.”

“물론 다 들었지. 심지어 에밀리도 그 얘기는 알고 있던데.”

얼마 전 다른 집안의 티타임에 참석하고 온 에밀리가 미주알고주알 해 준 이야기 중에 가장 비중을 높게 차지한 게 바로 그것이었다.

버니언이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모셨던 시종장을 반쯤 쫓아낸 것이나 마찬가지니 현재 사교계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 사실 이외에 함께 떠돌고 있는 이야기는 버니언이 일부러 흘린 것 같았다. 감히 크레이거가의 소공작이 보낸 편지에 장난질을 친 놈이 있으면 긴장하라는 의미로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 장난을 지시한 이온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어차피 버니언과 이온, 버니언과 시종장 그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 건 바로 그 자신이었으므로.

“버니언도 생각보다 감이 좋긴 해. 그 범인이 아마도 빌어먹을 길드장일 거다, 그 새끼랑 하는 짓이 똑같다고 말한 걸 보면.”

그런 말을 버니언이 어떤 표정을 지으며 했을지 상상이 된 이온이 즐거워하는 기색을 비쳤다.

이온이 다른 남자를 생각하며 그러는 모습이 왜인지 좀 못마땅해진 카밀루스가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그걸 감이 좋다고 해야 하는 건가?”

“물론 실체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니 소용없는 짓이긴 하네?”

버니언의 입장에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아마 황제라는 감투 덕분에 지금쯤 편지의 행방이 뒤들린 전모를 훤히 파악했을 터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의심증에 시달리고 있겠지.’

라치크의 길드장이 귀족 중 한 사람일 거라고, 그것도 황실의 사정을 잘 아는 어느 가문의 사람일 거라고 확신하게 됐을 테니까.

버니언이 이온에게 편지를 보내고, 이온이 버니언에게 답변을 하기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둘 사이에 편지가 오갔다는 사실 자체를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또한 적지도 않았다.

버니언과 이온이 주고받은 편지는 밀지 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통상적인 사교 목적의 편지이기 때문에 그랬다.

황실에는 하루에도 수십 통의 편지가 쏟아진다. 소소하게는 귀족가의 티타임 초청장부터 시작해서 버니언에게는 같잖게 보일 조언과 충고가 담긴 편지까지.

사정이 그렇다 보니 황실의 엄격한 보안을 이유로 외부에서 들어가는 편지가 내황성의 입구에서 황궁에 실제로 도달하기까지는 적어도 두세 명의 손을 타야 한다.

그러나 그걸 목격하고 그사이에 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두세 명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버니언이 가장 쉽게 의심할 수 있는 이들은 황궁 내의 시종이었다.

안 그래도 세상의 모두를 의심하고, 심지어 좋아한다고 아주 대놓고 티를 내는 이온마저도 사실은 은근히 경계하는 버니언이라면 불안해 미치려고 할 거였다.

그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쉬워진 이온이었다.

그러한 이온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던 카밀루스가 어느새 비어 버린 이온의 잔을 직접 다시 채워 주며 충고했다.

“그런데 이온, 너무 무모한 짓은 하지 마. 그 자식은 눈이 돌면 정말 뵈는 게 없어지니까.”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어.”

이온이 가볍게 대답하자 카밀루스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네 계획은 위험성이 꽤 높아. 왠지 알아?”

“내가 너무 버니언을 핀치에 몰아서?”

“아니, 버니언이 진심으로 널 좋아해서.”

“…….”

찻잔을 들어 올려 입에 가져가려던 이온이 손을 멈칫했다.

카밀루스가 이런 말을, 그러니까 버니언을 은근히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의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버니언은 애정과 인정에 목마른 녀석이야. 그리고 그 녀석은 지금 너한테 그런 걸 가장 크게 바라고 있을 거고. 그 절박함을 우습게 보지 마.”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댄 이온의 입가가 희미하게 위로 올라갔다.

뜬금없지만 이온은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카밀루스가 정말로 좋았다. 제 감정에 아주 열정적이고 솔직하지만 또 그것에 휘둘려 중심을 잃거나 하지 않는 그가 말이다.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니 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따스한 물을 한 모금 넘긴 이온이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 두었다. 그러고 카밀루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카밀루스.”

부름에 그 역시 경청하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넌 선황이 왜 버니언을 황위에 올렸다고 생각해?”

카밀루스는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양 의문 어린 목소리를 냈다.

“어차피 대안이 없지 않았나? 선황이 인정하는 적통의 후계자는 버니언뿐인데.”

“네가 있잖아. 네가 사실은 사생아가 아니라는 걸 밝히기만 하면 끝나는 문제인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에 대해서 묻는 거야, 나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카밀루스로서는 다소 뜬금없는 의문 제기였다. 그야, 선황이라는 사람은 단 한 번도 제게 황위를 물려줄 생각 따위 하지 않았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막판에 왜 찾아왔는지, 그리고 대공위를 내린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짐작도 안 되지만 어쨌든 제 아비는 카밀루스가 평생 제 눈앞에 띄지 않기를 바란 사람이었다.

기실 본인만 원한다면 카밀루스를 이용해 먹을 수 있는데도 그마저도 하지 않았을 만큼 아들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제삼자인 이온은 다른 관점의 해석을 내놓았다.

“버니언을 황위에 왜 올렸을까 하는 질문을 반대로도 하면 이런 말이 되겠지. 선황이 왜 너한테 대공위를 내려야만 했을까.”

이온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질문을 한참이나 곱씹던 카밀루스가 반문했다.

“넌 그게 선황의 정치적 결단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이온은 그렇다는 의미로 눈썹만 한 번 까딱했다.

“불쾌해하지 말고 들어, 카밀루스.”

“……일단 말해.”

좀 불편한 이야기가 시작되리라는 것을 알고 카밀루스도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자 이온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앞에 놓인 찻잎을 넣어 둔 통 두 개를 제 앞으로 끌어왔다.

하나는 제가 못 마시는 홍차 잎이 든 통이었고, 다른 하나는 방금 전 마시다가 조금 떫은 맛이 나서 물을 버렸던 허브차였다.

그가 두 개를 톡톡 치며 설명을 시작했다.

“한 사람은 적당할지는 아직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이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인정하고 싶지만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 하지만 선황 앞에 던져진 선택지는 이 둘 외에 없었지.”

한마디로 홍차는 카밀루스고, 떫은 맛 나는 허브차는 버니언이라는 뜻이다.

비유가 꽤 신선해서 카밀루스는 생각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어느 하나를 선택해도 딱히 만족감은 없어. 그럼 어떻게 해야 그중 하나를 그나마 ‘만족스러운 상태’로 만들 수 있을까.”

“만족스러운 상태라니…….”

“비유하자면 그런 거야. 난 홍차를 안 마시니 이 맛을 몰라. 그런 나조차 인정하게 하려면 이 녀석의 맛이 아주 뛰어나서 만인이 사랑하는 차로 거듭나야겠지. 하지만 허브차는…… 배합을 조금 다르게 하는 정도로도 날 만족시킬 수 있을 거야.”

비유가 워낙 쉬워서 그런가, 카밀루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바로 알아들었다. 하여 동의를 구하듯 자신을 쳐다보는 이온에게 고개를 끄덕여 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사람은 배우고, 변하는 존재이지. 그리고 옆에 자극해 주는 경쟁자가 있으면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고. 한마디로 둘이 붙으면 어쩌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할 만큼 눈부시게 성장하거나, 자신이 마음에 두던 후계가 한심한 모습을 탈피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한마디로 선황이 일부러 나와 버니언의 반목을 의도했다는 의미인가?”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도 그런 식으로 정치적인 계산을 했을 거라고?

그런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선황의 성격을 떠올려 보면 이온의 추론이 굉장히 일리 있어 보였기에 카밀루스는 차마 적극적인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래, 선황은 두 사람 모두에게 아주 어려운 문제를 내민 거야. 이제 그만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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