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카밀루스는 잘라 말했다.
“그 사람에겐 그럴 이유가 없어.”
이온의 말인즉, 굳이 버니언을 황제로 만든 뒤 자신에게도 일말의 ‘기회’를 열어 줬다는 것인데 말이 안 됐다.
솔직히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은 인간이다. 제게 끝끝내 미안하다는 한마디도 안 하고 가 버린 순간과 동시에 카밀루스는 그에 대한 모든 걸 놔 버렸다.
혹시나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자신을 사랑했을지 모른다는 희망.
저를 학대한 것을 반성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일말의 가망성까지도.
마지막으로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어째서 대공위를 줬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했다.
이온은 그 공란으로 남은 곳을 제 나름대로의 합리적 추론으로 채워 보려고 여러 방면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카밀루스도 실제로 그의 의견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판이 그런 식으로 굴러 가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고 해서 심정적으로 공감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여 부정하는 말을 흘리니 이온이 식탁 위에 올려진 손으로 손깍지를 끼는 게 보였다. 이온도 스스로의 의견을 썩 만족스러워하지 않는다는 징후로 보였지만, 말은 반대였다.
“그건 모르는 거야, 카밀루스. 8년이나 떨어져 있었잖아.”
“…….”
선황에 대해 잘 모르지 않느냐고 하는 이온의 반박에 카밀루스는 미간을 좁혔다. 머릿속에 황태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이는 아마 대공을 사랑했을 거예요, 그것도 아주 많이.〉
듣자마자 헛웃음을 자아냈던 그 한마디가.
단지 그것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심사가 확 꼬여 버린 카밀루스가 무의식중에 비꼬는 말투로 이온의 말을 받아쳤다.
“이온, 너도 설마 선황이 사실은 날 사랑했다고 생각해? 나를 위해서 이 판을 만들었다고? 아니면 나에게 적어도 기회를 주려고 했다고?”
문장 하나가 끝날 때마다 물음표를 달고 나온 그의 말에 곧바로 이상 징후를 느꼈는지, 아까부터 에렌스트 경과 마찬가지로 몇 걸음 뒤에서 상황을 방관하고 있던 페드로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그를 넌지시 불렀다.
“대공.”
이온도 제가 한 말을 다소 과도하게 해석한 그의 반응에 약간 당황해 버렸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어.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는 거고.”
“그래, 그 사람이 날 위해서 이런 짓을 했을 리는 없어. 그 교활한 인간이! 만약 그 인간이 이 상황을 원한 거라면 날 위한 덫도 준비해 놨겠지, 안 그래?”
말을 쏟아 낸 끝에 욕을 참지 못하고 내뱉으려고 하는데 뒤에서 카밀루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대공!”
딱 흥분하려는 타이밍에 페드로가 적절히 끼어든 것이었다. 카밀루스는 그를 돌아보며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가 스스로의 감정을 진정시킬 때까지 기다려 준 페드로가 잠시 뒤 이온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권유했다.
“소공작님, 그 이야기는 대공을 위해서라도 이쯤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카밀루스가 이런 식으로 제 감정을 고조시키는 모습을 처음 본 이온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을 받았다.
“……네, 페드로.”
평소에 선황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생각보다 냉정하게 대처하던 카밀루스였다. 하지만 티 내지 않는다고 해서 트라우마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역시 아니었다.
카밀루스의 입장에서는 선황이 ‘좋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용납이 안 되는 게 당연했다.
제 평생을 망친 사람이다.
그러니 차라리 쭉 악역으로 남아 주는 편이 나은 것이다.
카밀루스가 제 실수를 깨닫고 얼어붙어 있는 이온의 모습을 발견하고 떨리는 손으로 제 앞머리를 넘기며 탄식했다.
“미안, 이온.”
이온한테 욕을 하려고 했다니,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 버렸던 게 분명했다.
속으로 자책하고 있는데, 이온이 서둘러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말 하지 마.”
그러고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끼고 돈 그가 카밀루스의 앞으로 다가왔다. 페드로에게 잠시 물러나 줄 수 있겠느냐는 눈짓을 하자 페드로가 잡았던 카밀루스의 어깨를 놓고 순순히 걸음을 물렸다.
이온이 앉아 있는 카밀루스의 어깨를 제 두 팔로 안아 주었다.
“미안해, 내가 부주의했어. 가볍게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건데.”
“…….”
제게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었던 이온이 사과하는 것을 듣고 카밀루스가 파란 눈동자를 당혹감으로 물들였다. 그렇지만 저를 품에 들여 그의 가슴에 고개를 기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너무나 다정해 곧 안심했다.
이온의 따뜻한 온도가 좋아 카밀루스도 몸을 살짝 돌려 그의 허리를 안았다. 이온은 제게 매달리는 카밀루스를 가만가만 다독였다.
“맞아,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했느냐는 아니니까.”
기실 선황이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의도였는지, 무슨 생각으로 이 판을 설계했는지는 그들이 알 필요가 없는 문제다.
시신 위에는 침묵의 묘비만 세워질 뿐, 세상을 떠난 이상 그는 더 이상 무대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두 사람은 그냥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뿐이었다.
이온은 카밀루스의 어깨를 꽉 쥐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단정적인 어조로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마. 이 판의 주도권은 이미 우리 손에 있어.”
“응…….”
카밀루스가 그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으며 하는 대답에 이온이 그에게 신뢰의 화답을 요구했다.
“나 믿어?”
“무조건.”
그래, 버니언은 이미 제가 짜 놓은 거미줄 안에 발을 들였다. 그 녀석을 어떻게 잡아먹느냐의 문제만 남았다.
‘선황의 의도가 무엇이든.’
설령 버니언이 정적으로 부상한 카밀루스를 밟고서 스스로 성장하길 바랐다고 하더라도, 그러지 못하게 제가 막을 것이다.
마지막에 영광의 관을 쓸 주인공은 제가 선택한 사람, 카밀루스 클로델이 될 터였다.
* * *
페드로와 더 할 말이 있다며 카밀루스는 식당에 남았다. 그런 그를 두고 이온이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를 걸을 때였다. 에렌스트 경이 지나가던 하인에게 쪽지를 건네받았다.
그 모습을 발견한 이온이 힐끗 곁눈질로 눈치를 주니 에렌스트 경이 옆으로 바짝 붙었다.
“마탑주가 노아 기사단의 칼 단장을 만나러 황성에 들른답니다.”
칼 나르바에스와 재니스? 이온은 미간을 구겼다.
“그건 무슨 조합이야. 누가 먼저 만나자고 했는지는 알아?”
“단장이 먼저 청했다고 합니다.”
“…….”
칼 나르바에스는 선황이 영면에 들기 전 유언을 들은 다섯 명의 증인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선황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
칼 단장이 선황의 손발을 자처하며 그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고, 선황 또한 그런 칼을 무한 신뢰 했었다.
“칼 단장, 요즘 카밀루스의 어머니를 찾고 있다고 했지?”
“아마도 그런 것 같더군요.”
칼은 이미 카밀루스의 어미가 로제니아 황후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적당한 쇼맨십으로 버니언을 속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재니스를 만난다는 건 좀 이상하긴 했다.
제 방 앞에 다 도착한 이온은 에렌스트 경이 열어 주는 문 사이로 제 몸을 밀어 넣으며 명령했다.
“동선을 좀 알아 놔. 그를 만나야겠어.”
“예, 도련님.”
대답을 들은 이온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그러자 따라 들어오려던 에렌스트 경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고, 이온은 은근히 완고한 태도로 한마디 했다.
“나 쉴래. 혼자 있게 해 줘.”
“……아, 예. 알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는 것 같았지만 에렌스트 경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문을 닫고 나갔다.
“읏…….”
혼자가 되자마자 이온이 작게 신음을 뱉으며 제 이마를 짚었다. 아까부터 두통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참고 있었던 터였다.
침대로 비척비척 걸어간 그가 쓰러지듯이 누워 제 목에 걸린 마나석을 꺼내 쥐었다. 그러고 허공을 바라보는데, 시스템창이 펼쳐졌다.
[현재 플레이어의 사망 확률은 25%입니다.]
요즘 사망 확률 평균점이 다시 높아졌다.
실제로 몸살 때문에 며칠 앓아서 밖으로 못 나간 것도 그렇고, 몸이 더 안 좋아진 건 확실했다.
카밀루스가 옆에 있을 때는 일시적으로 나아지기도 했지만 왜 이러는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내 나름대로 잘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긴, 애초에 제 병은 저주로 인한 것인데 언제 어느 때 어떻게 작용할지는 모르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이러다가 중요할 때 정신이라도 잃으면 정말 곤란해진다.
잠시 누워 쉬고 있던 이온은 두통이 가라앉는 시점을 기다렸다가 집무실로 건너가 책상 앞에 앉았다.
열쇠를 돌려 약물들을 모아 둔 서랍을 연 이온은 그곳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