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각형으로 깎인 투명한 병 안에서 연한 분홍빛의 액체가 찰랑였다.
이 약물은 크레이거 공작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듣고 카밀루스가 대략 비슷해 보이도록 만든 것이었다.
재니스가 자신의 마나를 녹여 만들었다는 건넸다고 했으니 비슷해 보이게 카밀루스 역시 이 약에 자신의 마나를 녹여 넣었다.
그런 뒤 대략 이런 작용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하여 약물을 완성했다.
카밀루스는 황태후에게 가져갈 것 외에 이온의 몫으로도 더 만들어서 건넸다.
〈정 버티기 힘들 때는 마셔. 남용하지는 말고.〉
그런 말과 함께.
약은 마시면 유사 마나석과 같은 효과가 있을 거라고 했다.
마나석은 가지고만 있어도 체내 마나의 순환이 개선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상시적이면서도 자체적으로 마나의 기운을 내뿜는 역할이라고 했다.
약물은 일시적으로 그 효과를 누릴 수 있도록 해 준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 효과는 마나석에 훨씬 못 미칠 거라는 말이 덧붙여져 왔다.
받자마자 욤뇽이에게 이미 안정성을 검증받은 이온은 의아해져 물었다.
〈남용하면 부작용이라도 생겨?〉
〈그건 아니고, 아무래도 직접 마시는 거니까 내 마나가 네 몸에 축적이 될 텐데…… 그게 어떤 작용을 할지 모르겠어서 그래.〉
이온이 내 몸엔 마나도 축적되면 안 되는 거냐고, 의문 어린 눈으로 보자 카밀루스 본인도 확신은 못 하겠는지 자신없어하는 투로 이야기했다.
〈네 몸 일부에만 마나가 모여 두게 한 데에는 목적성이 있어 보이니까.〉
그렇지 않느냐는 카밀루스의 말에 이온의 시선이 저절로 떨어져 스스로의 배로 향했다.
남성에게도 여성과 같은 생식 능력을 부여하는 이상한 저주……. 게다가 신체 다른 부분에는 마나가 전혀 순환하지 못하도록 막아 버리고 온몸에 있던 마나를 한곳에 뭉쳤다.
이온은 카밀루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대략 알 것 같기는 했지만 일단 물었다.
〈아이가 혹시 너만큼 강해질 수도 있어?〉
〈……가능성이 있지.〉
추측이 맞는다면 저주를 건 사람은 이온이 아이를 낳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 될 터였다. 인내심이 아주 강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수년을 기다린 것을 보니.
다만.
〈아이를 낳는 것 자체가 목적인지 그다음에 뭐가 더 있는지는 모르는 거네?〉
이온은 왜인지 남일처럼 이야기하게 되었다. 아직 아이를 낳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게 실감이 안 나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지금은 그냥 제가 카밀루스의 아이를 낳을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만 할 뿐이었으니까. 감정적인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당장 후계 문제가 해결되지 않나.
예의 약병을 가지고서 도로 침대로 돌아온 이온은 손에 쥔 것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실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것이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기는 했지만 일단 움직일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지극한 두통 때문에 힘겨운 것은 사실이었다.
‘아주 조금만…… 마시는 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이온이 조심스럽게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 소심하게 두 방울 정도만 혀 위에 떨어뜨렸다. 뚜껑을 도로 닫을 때 시스템창이 올라왔다.
[상태 이상: 충만한 마나(강화)]
[강화율이 일시적으로 올라갑니다. 유지 시간 5분.]
[상태 이상 ‘마나 소실’로 인하여 약물의 기능 일부가 발현되지 않습니다.]
두 방울이라 그런지 유지 시간이 꼴랑 5분이란다.
게다가 효과도 떨어지는 모양이긴 한지 큰 변화가 일지는 않았다.
발현이 안 되는 기능이란 뭘 말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작용을 안 한다니 일단 관심을 둘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조금 천천히 뜬 다음 메시지를 보고서 이온은 약간 처져 있던 몸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상태 이상: 기억 상실. 이전의 기억이 없음. ※본 페널티는 특정한 조건을 달성할 시 해제됩니다.]
[현재 플레이어가 충족한 조건 (2/3)]
[조건 1: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과 혈육을 제외한 제삼자로부터의 정보 습득 (완료)]
[조건 2: 주마등(사망 확률 90% 이상일 때 발동)의 재생 (완료)]
[충족하기 전의 조건은 잠금 처리되어 있어 플레이어의 확인이 불가합니다.]
‘갑자기 왜 뜨는 거야?’
……설마 이 약물이 제 기억과 관련이 있다는 건가?
그러나 이건 재니스가 만든 약물이 아니라 카밀루스가 대강의 기능을 추측해서 만든 것이었다.
‘그럼 거의 정답에 가깝게 만들었다는 의미려나.’
가능성이 아예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재니스가 선황을 통해 로제니아에게 건넨 그 약물의 기능이 의외로 굉장히 단순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이온은 제 손에 쥔 약병을 내려다보았다.
생각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황태후가 오늘 카밀루스에게 보낸 걸 감안하면 그녀가 선황의 유품으로 두 개의 약물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건 거의 확실시되었다.
그리고 카밀루스는 애초에 그녀가 처음 건네었던 보라색 약물을 이온이 먹고서 저주에 걸린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몸으로 직접 실험할 순 없는 일이라 추측만 하는 중이었는데, 그와 쌍으로 있었던 약물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이 약을 먹고 반응이 있다는 건.
‘이온 크레이거가 둘 다 마셨을 가능성.’
그걸 시사하는 거다.
이온은 시스템에게 내 생각이 정답이 아니냐고 묻는 듯이 떠오른 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사이 소멸되었던 창이 강조하듯 한 번 더 떠올랐다.
[충족하기 전의 조건은 잠금 처리되어 있어 플레이어의 확인이 불가합니다.]
어쨌든 반응이 있다는 건 근접하게 왔다는 의미다.
시스템이 최근에 헛소리를 한 적이 많기는 하지만, 이런 창은 어쨌든 정답과 상황 사이에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을 때 뜨곤 했으니까 그 정도는 신뢰해도 되겠지.
이온은 약간 아쉬워하는 눈으로 약병을 내려다보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약을 목구멍에 다 부어 버릴까 싶었지만, 한두 방울이라도 마신 셈인데 기억을 되찾는 조건 열리지 않는 걸 보면 그게 정답은 아닐 듯했다.
‘황태후에게서 뭔가 얻어 낼 수 있으려나.’
그녀가 뭔가 알기는 할까?
달콤한 희망 고문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황태후가 제 기억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기는 어렵다는 현실적인 생각 뒤에는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희망이 따라붙었다.
그만큼이나 되찾고 싶었다.
‘내 기억.’
이 몸에 들어온 지도 아주 오래되었다. 그러니 이제 ‘내 것’이라고 칭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생각하기엔 아직 양심이 콕콕 찔렸다.
이온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눈을 꽉 감았다.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는 듯이.
* * *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낮의 햇살이 꽤 쨍쨍한 한낮이었다. 카밀루스는 내황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절차를 밟기 위해서 잠시 대기 중이었다.
황태후궁에 방문하겠다는 목적을 밝히니 그것을 듣자마자 내황성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사 하나가 안쪽으로 향했다.
아마도 버니언에게 알릴 것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통과하라는 말에 따라 문을 통과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황태후궁 앞에 도달했을 때 그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버니언을 위시한 황제궁의 사람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약간 피곤해진 카밀루스가 마음의 각오를 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의 손에는 황태후에게 줄 작은 상자가 든 채였다.
그러고 버니언과 마주 섰으나 둘은 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인내심이 좀 더 깊은 건 카밀루스 쪽이었다. 버니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인사 안 하나?”
서열상 엄연히 자기가 윗사람인데 제가 말꼬를 튼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버니언이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그에 카밀루스는 허리를 숙이고, 뒤늦은 인사를 입술 사이로 흘려보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버니언 스스로도 이게 무슨 묘한 심리인지 모르겠으나, 카밀루스에게서 그러한 소리가 흘러나오자 다른 누구의 인사를 받을 때와 달리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만 카밀루스의 면상을 보는 불쾌함에 충분히 상쇄되고도 남을 정도의 좋음이다. 게다가 오늘 카밀루스가 들어왔다는 소리에 쫓아서 이곳에 온 버니언에게는 목적이 따로 있었다.
곧 버니언이 본론을 입에 올렸다.
“비렌시움 대공, 아니…… 지금은 형님이라고 할까?”
만날 사생아, 사생아 해 대더니 그도 남들의 눈을 의식하기는 하는지 밖에서는 제대로 된 호칭을 붙여 주는 것에 카밀루스가 눈썹을 한 번 까딱했다.
“말씀하십시오.”
“내 어머니인 황태후께 왜 자꾸 방문을 청하는 거지? 그 상자에 든 건 또 뭐고?”
이번이 황태후궁에 세 번째 방문하는 것인데, 사실 따지고 보면 두 번은 황태후가 먼저 오라고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방문은 공식적으론 카밀루스가 먼저 청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황태후가 제게 찾아오라는 말 대신 엉뚱한 질문 하나를 써 놓았기에.
그도 그럴 것이 황제의 어미인 그녀가 어쩌면 그 황제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대공인 카밀루스를 가까이한다는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덕분에 이용하기 더 쉬워진 셈이지만.
카밀루스는 버니언이 물은 상자를 한 번 힐끗하고는 대답했다.
“정 궁금하시다면 보여 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여기서 보여도 되겠냐는 뒷말이 남아 있었지만 성질 급한 버니언이 재빨리 말허리를 끊고 들어왔다.
“열어.”
그에 카밀루스는 사양 않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고, 그 안에는 새하얀 장미와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여성용 흰색 장갑이 자리해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버니언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