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장미와 장갑.
어떤 속셈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평범한 선물은 분명 아니었다.
안 그래도 카밀루스가 황태후의 허락으로 얼마 전부터 황실 도서관에 드나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둘이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헛소문이 퍼져 있어 불편하던 차였다.
버니언은 왠지 그 소문에 부채질을 할 거 같은 이 선물들을 보자니 카밀루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심히 의심이 되었다.
“따라와.”
날카로운 시선으로 카밀루스를 한 번 노려본 버니언이 먼저 휙 뒤돌아섰다.
카밀루스는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안 가겠다고 해서 그를 조금 당황시켜 볼까 싶었던 카밀루스는, 굳이 황태후궁 앞까지 제가 먼저 나타난 수고를 감안해 순순히 쫓아갔다.
버니언의 속을 긁는 건 어느 쪽이든 가능할 테니까.
* * *
황태후궁의 정문은 황궁의 후문과 일직선상에 있었다. 그 덕분에 얼마 걷지 않아 황궁 안에 들어서게 되었다.
또각, 또각.
깨끗한 바닥 위를 딛는 버니언의 구두 굽 소리를 따라 1층의 어느 곳에 있는 알현실로 찾아갔다.
문을 열자마자 붉은색 카펫이 일자로 길게 깔려 있는 방을 가로질러 버니언이 걸어가고, 근위 기사들에 의해 제지당한 카밀루스는 문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버니언이 맨 끝의 단에 살며시 올라선 순간, 카밀루스는 기분 나쁜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곳 황궁의 알현실은 카밀루스가 황성 탑에서 나오고 처음으로 눈을 떴던 곳이자, 자신의 북부행이 결정되었던 곳이었다.
선황과 얽혔던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 때문에 카밀루스의 얼굴이 가라앉아 있는데, 버니언이 멀리서 카밀루스를 마주 보고 섰다.
“이제 제대로 된 대화를 좀 할까, 비렌시움 대공?”
버니언의 주변에는 황궁의 시종들이 서 있었고, 카밀루스의 주변에는 방금 전 그의 걸음을 제지한 근위 기사들이 깔려 있었다.
저번에 괜히 독대했다가 당한 게 있어서 그런 모양이었지만, 대화를 하기에는 지나치게 엄숙한 분위기였다.
“이거 분위기가 꽤 살벌한데……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습니까, 폐하?”
카밀루스가 묻는 동안 눈웃음을 지으며 여유를 비치자 반대로 버니언이 표정이 뒤틀렸다.
“너, 태후 폐하 주변에 왜 자꾸 얼쩡거리는 거냐?”
뻔한 예상 질문이라 카밀루스는 준비해 둔 대답을 꺼냈다.
“일단은 클로델 황가의 일원으로서 황실의 큰 어른께 경외를 표해야 마땅할 테니 그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헛소리하지 마. 사생아 따위가 지금 이렇게 내황성에 들락거리는…….”
“권한을 선황께서 주셨지요.”
제 입으로 선황이 제게 남겨 두고 간 공덕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자 기분이 나빠진 카밀루스의 목소리는 조금 차가워졌다.
“안 그렇습니까?”
불쾌해하는 건 제 말이 끊긴 버니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카밀루스의 대답 자체에는 흠결이 전혀 없었기에 거칠어진 숨만 들이켤 뿐이었다.
“비렌시움 대공.”
버니언은 카밀루스를 번번이 이런 호칭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에 몹시 짜증이 난 듯했다.
그러한 감정이 모두 드러나는 한마디에 카밀루스는 대답하지 않고 눈짓으로만 계속 말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대체 왜 북부로 돌아가지 않는 거지? 그대가 작위를 받고 벌써 3개월 이상 흘렀다. 가신들과의 관계를 돌보고, 대공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할 시기이지 않나?”
요약하면 내 앞에서 빨리 좀 꺼지라는 소리였다.
만에 하나라도 북부에서 성공적인 정비를 하게 된다면, 오히려 카밀루스 쪽이 그 나름대로의 권력을 가지게 되는 셈인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제가 이곳에 남아 있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날 얼마나 우습게 보면.’
예상은 했지만 버니언이 저를 얼마나 하찮게 평가하는지 알게 된 카밀루스는 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으나 담담히 대꾸했다.
“저를 염려해 주시는 말씀이신 것 같으나, 아직 제겐 이곳에서의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폐하께서도 이미 아시는 부분일 텐데요.”
“크레이거가의 소공작과 관련한 것 말인가? 그런 거라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소공작의 병은 내가 고쳐 줄 거니까.”
“……근거는 있는 말입니까?”
이온의 저주가 뭔지, 어떻게 푸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할 텐데 저런 말을 지껄이는 걸 들으니 카밀루스는 속이 확 뒤틀려 그리 물었다.
그러자 일부러 눈치 없는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눈치가 없는 건지 그는 카밀루스가 생각한 최악의 답변을 내놓았다.
“내 쪽에 재니스가 있지 않나. 그가 너보다 먼저 소공작의 저주에 대해 알아냈다는 것도 알 텐데.”
“…….”
재니스가 카밀루스보다 먼저 이온의 저주에 파악한 것에 대해서는 그도 물론 깔끔하게 인정하는 바였다.
‘당연히, 그 새끼가 걸었을 수도 있는 거니까.’
그가 아니면 현재로서는 그 옆에 따라다니는 마리엘이 가장 유력하다.
현재 카밀루스가 고민하는 건 둘 중 누가 본체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아직 그들의 정확한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도 안 되는 상황이라 둘 중 누가 범인이든 죽이는 게 물론 쉬울 리는 없다.
선선대에 이미 황가에 충성을 맹세한 마탑주다. 한데 황가의 사람인 자신이 그들을 건드릴 경우 마탑의 큰 반발을 살 테고, 정치적 부담이 커질 터였다. 게다가 그게 크레이거 가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라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 중 하나를 건드려야 한다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확보한 다음이어야 했다.
그 부분만 아니었다면 둘 중 누구인지 거르는 과정 없이 그냥 둘 다 죽여 버렸을 터였다.
설령 제 목숨과 맞바꾸게 된다고 하더라도.
카밀루스는 이미 최악의 최악을 가정해, 그러니까 혹시나 저주의 시전자가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해서 제 손으로 죽이지 못할 경우까지 감안해 어떻게 할지를 모두 정해 둔 상태였다.
이온의 저주를 풀어 주는 건 제 숙원이었으므로.
그것 하나를 위해서 지금의 제가 여기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어떤 희생도 각오하지 않았을 버니언이 지껄이는 말들이 가소로웠다.
“폐하.”
카밀루스가 잇새로 실소를 흘리며 버니언을 비꼬았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믿다가 얼마 전의 난리가 맞으신 것 아닙니까?”
“난리라니?”
“소공작의 편지가 사라진 것 말입니다. 현재로서는 황궁 시종들 중 누군가의 소행인 것으로 의심된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습니다만.”
“…….”
“찾으셨습니까, 범인?”
카밀루스는 버니언의 주변에 서 있는 시종들을 손짓했다. 네 주변에 있는 이들이 유력한 범인이지 않으냐는 뜻이었다.
묻는 말에 버니언은 이를 악물었다.
안 그래도 하루에도 열 번씩 황궁의 시종들은 전부 내쫓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고 있는데, 그에 불을 지르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하인들의 문제라면 모를까 고작 편지 한 통 때문에, 그것도 표면적으로는 시종장이 뒤집어쓴 형태가 되어 버린 지금은 어느 시종이든 확실한 증거 없이 내쳐 버릴 수가 없었다.
황궁의 시종들은 전부 백작가 이상의 자제들로 구성돼 있으니, 꼬투리를 잡아서 쫓아냈다가 가문과 척을 지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황태자 시절에는 무슨 짓을 하든 선황이 알아서 뒤를 닦아 주었지만, 이젠 전부 제가 해결을 해야 하는 터라 오히려 더 주변 눈치를 보는 처지가 되어 버린 터다.
그에 불쑥 짜증이 난 버니언이 하, 하고 깊게 숨을 쉬더니 손으로 카밀루스의 주변에 있는 기사들을 옆으로 물러나게 했다. 그러고 손가락을 까딱여 카밀루스를 가까이에 오도록 했다.
카밀루스는 피곤했지만 일단 그가 원하는 대로 알현실의 가운데로 나아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버니언도 단에서 내려왔다.
주변 이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두 사람이 지근거리에서 마주했다.
버니언이 그 파란 눈에서 카밀루스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못한 채로 물었다.
“혹시 네놈이 수작 부렸냐?”
카밀루스는 고개를 기울이며 괜스레 의뭉을 떨었다.
“글쎄, 어떨 것 같아?”
편지를 바꿔치기한 건 사실 이온의 자작극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연막을 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한 대꾸였다.
그러자 버니언이 어처구니없어 한숨을 내쉬었고, 카밀루스는 허리를 살짝 기울여 그에게 바짝 붙어 도발을 걸었다.
“내가 전에 말했지. 사생아 새끼가 어떤 짓을 할지 몰라서 밤잠도 못 자게 될 거라고.”
“이 씹새끼가…….”
카밀루스가 도로 허리를 펴며 슬쩍 비웃음을 비쳤다.
“황제 폐하가 되어서도 여전히 말이 거치네, 버니언.”
버니언은 마치 카밀루스를 죽이고 싶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네놈 새끼한텐 어차피 이 황궁에 첩자를 심을 능력도 없을 텐데…… 설마 그 길드장 놈을 찾아 놓고 손이라도 잡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