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그 길드장 놈을 찾아 놓고 손이라도 잡았냐?”
질문을 들은 순간 카밀루스는 진심으로 놀랐다. 이걸 통찰력이라고 해야 할지, 동물적 감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의 발언이 정답에 상당히 근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덕분에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황태후가 저와 그녀 자신 사이에서 오간 말에 대해 버니언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모자 사이가 그렇게 애틋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결론을 내린 카밀루스는 일단 시치미를 뗐다.
“아스타틴도 몇 달째 못 찾는 걸 황도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가 어떻게 찾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버니언은 그 말이 영 의심이 되는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한동안 카밀루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어깨를 쳐 밀어 내었다.
“역겨운 새끼.”
카밀루스는 버니언이 툭 뱉어 낸 그 말에 안심했다. 본래 한쪽만 싫어하면 문제인 법이다. 서로가 서로를 역겹다고 느끼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도로 거리를 떨어뜨린 버니언이 카밀루스에게 경계의 말을 흘렸다..
“어쨌든 너, 내 어머니 주변에 얼쩡거리지 마라.”
“유감스럽지만, 황태후 폐하께서도 저를 원하시던데요.”
“뭐?”
버니언의 미간이 구겨지는 게 확연히 보였지만 카밀루스는 여유롭게 대꾸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태후 폐하께서 저를 거부하셨다면 제가 그곳에 발을 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
사실 카밀루스 자신조차도 처음 방문을 청했을 때도 황태후가 흔쾌히 오라고 할 줄 몰랐다.
더욱이 저와 묘한 연대감을 형성하고 있을 줄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태후 폐하께서 많이 외로운 분이시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제 입장에선 그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공감 가는 부분도 있는 터라 풀어 드리고 싶은 마음에 자주 방문을 하기로 한 것이고요.”
오해할 만한 단어와 화법으로 이야기를 전하자 버니언이 미간을 좁혔다. 노려보는 눈빛이 적당히 하라는 뜻을 전하고 있었으나 카밀루스는 굳이 멈추지 않았다.
멈출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황궁까지 따라온 것이었으니까.
“때로는 혈육보다 제삼자가 더 큰 위로를 해 드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그의 노골적인 말을 참지 못한 버니언이 이를 갈았다.
“대공,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지?”
보는 눈이 워낙 여러 개라 욕설을 씹어뱉지 못했을 따름이지, 그는 표정으로 이미 수십 마디의 악담을 쏟아 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카밀루스는 능글맞다고 생각되리만치 느긋하게 제 의견을 전했다.
“말이야 한 번 쏟아지면 주울 수 없는 것이고, 그에 대한 해석은 듣는 이의 자유인 것 아니겠습니까?”
과연 황궁은 황궁인지 카밀루스의 발언에 주변의 시종들이나 기사들 중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없었으나, 그들도 전부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터였다.
얼마 전부터 돌기 시작한, 카밀루스와 황태후 사이가 묘하다던 그 말도 안 되는 소문에 대해.
카밀루스가 어떻게 할 거냐는 듯이 버니언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버니언이 이를 악물고 옷소매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카밀루스가 먼저 황태후와의 관계가 어떻느니 하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했으면 모를까, 단지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두고서 차마 제가 제 어미와 카밀루스 사이의 불륜이니 뭐니 하는 말을 직접 내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버니언은 그저 제 불쾌함을 드러내는 정도로 상황을 갈무리했다.
“네가 그런 짓을 해서 뭘 기대하는지는 알 만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태후 폐하와 난 피로 이어져 있어. 네놈이 어설픈 균열을 일으킨다고 해도 거기에 넘어갈 정도가 아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요. 제가 태후 폐하와 마음껏 가까워져도 폐하께선 전혀 신경 안 쓰실 거라는 말씀이니 말입니다.”
“…….”
한마디도 지지 않는 카밀루스의 말에 버니언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어째 카밀루스와 대화하면 할수록 제 자신이 수렁에 빠지는 기분만 맛볼 뿐이었다. 둘만 있는 자리였다면 그들 사이에 주먹다짐이 오갈 만한 대화였으나 카밀루스는 버니언의 열만 바짝 오르게 하고 저는 쑥 빠지려고 했다.
“그럼 그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태후 폐하와의 약속 시간이 이미 지나 이 이상 시간을 끄는 건 그분께 결례가 될 것 같군요.”
“꺼져라.”
더는 이 대화답지 않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던 버니언이 짧은 한마디로 그를 물리쳤다.
카밀루스는 그가 그럴수록 더욱 철저하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한 뒤 걸음을 물렸다.
둘 사이가 일단락될 분위기에 알현실에 돌던 은근한 긴장감이 일시에 풀렸고, 그의 걸음이 채 닿기도 전에 닫혔던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그렇게 겨우 해방되어 밖의 회랑으로 나가니 대기하고 있던 페드로가 보였다. 바로 말을 걸려던 카밀루스는 그러나 그 옆에 있는 자들을 보고 걸음마저 멈췄다.
“오랜만이십니다, 대공 전하.”
인사를 건넨 건 다름 아닌 재니스였다.
케이프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낸 그를 발견한 순간 카밀루스의 표정이 굳었다.
인상이 희미한 그 얼굴 위에는 늘 그렇듯이 기분 나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카밀루스는 알현실에서 따라 나온 몇몇 기사들과 시종들의 눈치를 한 번 살핀 뒤 마리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왜 인사하지 않느냐는 의미였다. 그제야 마리엘도 케이프 후드 아래에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비렌시움 대공을 뵙습니다.”
카밀루스는 그녀가 인사하는 동안 그녀의 몸을 훑다가 이전과 달리 약간 하얘진 손끝을 발견했다.
‘마기가 거두어지면 하얘지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손끝만 하얘지는 건 좀 기묘하다고 생각하던 카밀루스는 일단 재니스를 바라보며 인사 대신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칼 단장을 만나러 온 건가?”
“역시…… 잘 알고 계시네요?”
제게 되돌아온 반문에 카밀루스는 어느새 제 오른편으로 걸음을 옮겨 온 페드로와 잠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런 뒤 어깨를 으쓱하며 재니스에게 되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거에 문제라도 있는지?”
그에 재니스가 무릎을 살짝 굽히며 능청스럽게 대꾸해 왔다.
“물론 저에겐 전혀 없습니다만, 제 조수는 상당히 민감한 사람이라서요.”
재니스가 손으로 제 조수를 가리켰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마리엘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카밀루스는 그런 그녀를 힐끗하다가 재니스에게로 걸음을 옮겨 몸을 가까이했다.
“그런가? 유의하지. 난 단지 조금 궁금했을 뿐이라서…….”
어깨가 스치기 직전 멈추어 선 카밀루스가 재니스의 어깨 위에 제 손을 얹고 귓가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둘 중 어느 쥐새끼가 마기를 그리 능숙하게 다루는지.”
속삭이며 어깨를 붙잡은 손에 카밀루스가 힘을 확 주자 재니스가 약간 아픈 듯이 몸을 굳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리엘의 손끝도 미세하게 움찔했다.
그 반응들을 확인한 카밀루스는 태연히 손을 뗀 뒤, 황궁에 온 자답지 않게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재니스의 머리를 직접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재니스의 몸에 접촉한 카밀루스가 그의 귀 뒤를 손가락으로 쓸며 적당한 조언을 흘렸다.
“아무리 제멋대로라고 하지만 황궁에 드나드는 것인데 머리 정도는 정리하고 와야지.”
재니스가 눈알을 슥 굴려 카밀루스를 쳐다보았다. 흰자가 평소보다 더 드러난 걸 보니 긴장이란 걸 한 모양이었다.
“충고 감사히 받들지요.”
“그럼 볼일 잘 보고 돌아가도록.”
말을 마친 카밀루스가 그만 불결한 몸에서 손을 뗐다. 그러고 지나치려고 하는데 재니스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대공께서도 쥐새끼 단속 잘하시길.”
카밀루스는 별다른 대꾸 없이 시종들의 안내를 따라 황궁을 그만 빠져나갔다. 들어왔을 때처럼 후문으로 나와 황태후궁으로 향하는 동안 페드로가 작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완전히 손바닥 위였군요.”
카밀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부터 마탑에 대해서 캐내는데 재니스한테 들키지 않고 움직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사과는 됐으니 당신 몸이나 조심해. 뭔가 확실한 걸 알아내진 않아서 아직은 괜찮을 것 같지만.”
“……알겠습니다.”
이야기하다가 카밀루스는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전 재니스의 어깨를 붙잡고 귀를 쓸던 그 손이었다.
카밀루스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면서 페드로가 얼른 말을 붙여 왔다.
“무슨 이상이라도 있으십니까?”
“……재니스가.”
아직은 확신할 수 없는 탓에 카밀루스의 목소리에 자신감은 없었다.
“마리엘이랑 힘을 공유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