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을, 아니, 카밀루스를…… 돕고 싶어요.”
말을 내놓고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며 이온이 제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크레이거 공작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좋아하는지도 싫어하는지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온은 알았다. 이것이 적어도 그가 듣고 싶지 않아 했던 말이라는 걸.
눈치가 있으면 사실 그의 아버지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온은 이 문제로부터 눈을 감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마침내 공작이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온.”
이온은 대답하지 않고 그와 시선만 마주쳤다.
“넌 이 크레이거 가문의 후계자다. 네가 아니면 우리 가문을, 서부의 넓은 공국을 어느 누가 이끌겠니? 에밀리의 부군이 생긴다고 해도 그는 답이 되지 않아.”
당연히 예상했던 말이지만 이온은 선뜻 반박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크레이거 공작은 이온이 그러는 것을 제 의견에 위축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 모양인지,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여유롭게 차를 홀짝였다.
하지만 이온은 위축된 게 아니었다. 단지 다음 말을 들었을 때 아버지가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 상상하고 있었을 뿐.
“아버지, 제 저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세요?”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예요. 얼마나,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지 묻는 겁니다.”
공작은 순간 미간을 좁혔다. 이온이 사실은 당신이 전부 다 아는 게 아니라는 속뜻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공이 저번에 그러더구나. 몸의 마나를 한곳에 뭉치게 하는 저주라고…….”
“해주 방법은 시전자를 죽이는 것뿐이고요.”
이온은 이미 카밀루스가 어디까지 말해 놨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여 뒷말을 알아서 이었고, 크레이거 공작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문제가 있는 게냐?”
“문제가 있죠. 아버지가 알고 계신 건 이 저주의 핵심이 아니니까요.”
“대공이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뜻으로 들리는구나.”
“아니요, 대공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단지 제 몫을 남겨 놓았을 뿐이에요. 이건 제가 직접 전해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거든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전 지금까지 아버지께 알려 드리지 않았고요.”
제 저주의 실체를 지금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차피 이런 말을 할 기회는 흔하지 않다.
이온의 말에 공작은 시선을 제 아들에게로 고정했다. 제가 알지 못하는 그 진실이 무엇인지, 그로서는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뒷말을 채근하는 그 눈빛에 이온이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제 안에 미량의 마기가 있다고 해요.”
“마기라고?”
마법적 지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공작이지만, 사람의 몸에 마기가 스며들면 얼마나 위험한지 정도의 지식은 있었다.
그가 거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만큼 눈을 크게 홉떴다.
벌써부터 충격을 받은 표정인 그를 보고 있자니 이온은 뒷말을 꺼내기가 주저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과 별개로 말은 계속 이어졌다.
“다행히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지만 신체 변형이 일어났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냐, 대체 어디가?”
비실거리는 것만 빼면 겉은 멀쩡하니 전혀 상상도 못 한 이야기였을 것이 틀림없다.
이온은 제 손을 배에 가져다 댔다. 공작은 인상을 쓰기는 했지만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마나가 뭉쳐 있는 건 이 배 안쪽인데요.”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하거라.”
“임신을 할 수 있대요.”
“……뭐?”
답답한 듯 사나운 기세로 재촉하던 공작이 마지막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풀려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뭐라고?”
“임신, 이라고 말씀드렸어요.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요, 제가.”
“그게 대체…….”
공작은 충격에 한 문장도 채 끝맺지 못했다. 목이 타는지 그가 찻잔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러나 벌써부터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고, 들기 전에 찻잔이 달그락달그락 울었다.
이온은 사색이 된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렇지만 공작은 눈을 한 군데 두지 못하고 방황했다.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가는 아버지를 지켜보는데, 이온도 마음이 썩 편하지는 못했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기 때문에 더더욱.
공작은 거친 숨을 내뱉다가 겨우겨우 물을 목으로 넘겼다. 그러나 잘못 삼켰는지 찻잔을 내려놓고 사레가 들려 쿨럭쿨럭 기침을 쏟아 냈다.
그에 이온이 말없이 손수건만 내미니 그것을 받아 입을 가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기침은 멎었지만 채 진정하지 못한 크레이거 공작이 약간의 흥분이 밴 목소리로 물어 왔다.
“임신, 임신이라고? 네가 그런…… 그렇게 됐다고?”
“예.”
“그 사실을 당연히 대공도 알고 있는 것이겠지?”
“그가 알려 주었으니까요.”
제가 이토록 충격을 받았는데 건조하게 대답하는 아들이 원망스러운 듯 공작은 이젠 이온을 숫제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뒷말을 들었을 때 이온은 그가 또 다른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음을 인식했다.
“그런데…… 그런데도 네놈이 그 자식이랑 잤다는 거야!”
“…….”
아, 그렇지. 저번에 그런 말도 했었지.
공작의 말에 머릿속으로 이전의 상황을 떠올리던 이온은 심드렁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 분노에 떨고 있는 공작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한마디 했다.
“충동적인 하룻밤 같은 건 아니었어요.”
“뭐야……?”
아까부터 말끝에 계속해서 물음표를 다는 크레이거 공작이었다. 그는 도저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충격과 경악, 그리고 실망.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여전히 손은 격하게 떨리는 중이었다.
이온은 크레이거 공작이 그렇게 저를 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한마디 했다.
“때리고 싶으시면 그러셔도 돼요. 아버지 입장에선 청천벽력 같은 소리일 테니까.”
콰앙!
말이 끝나자마자 울리는 거센 소리에 이온이 몸을 움찔했다.
공작이 테이블을 내리치는 바람에 그 위의 물건들이 달각거렸다.
“지금 네가 그 자식 때문에 눈이 멀어서…… 이 아비도 저버리고, 가문도 뒤로하고 그러겠다는 말이야?”
“정 후계를 원하시면 이을 수는 있겠죠. 그렇지만 제가 해야 할 일은 다 끝내고요.”
“그러고 대공 놈의 아이를 낳아서 가문의 뒤를 잇고?”
“다른 사람이랑 자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온!”
공작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개졌다.
사실 이온은 방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계획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카밀루스를 도와달라고 할 셈이었는데, 도움은커녕 원망만 사게 생겼다.
이온은 중간에 눈물을 흘리면서 혼신의 연기를 했어야 했나 싶었지만, 제 성격상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는 이내 이런 흐름은 어쩔 수 없었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대체, 대체 뭐가 말이냐?”
“좋아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거요.”
크레이거 공작은 작게 실소했다. 그러고 두 손을 모아 얼굴을 가리고는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 저주가 나쁘지 않다고 하는 걸 이 아비가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전혀 모르겠구나.”
“몸이 안 좋은 것과 별개라고 생각하면, 이라는 뜻이었어요.”
“해서, 설마 그놈의 아이를 벌써 가진 건 아니겠지?”
“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이온은 그런 뒷말은 숨겼다. 크레이거 공작은 그에 날 선 눈을 떴다.
이온은 왠지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뭔지 알 것 같아 선수를 쳤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저는 대공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
“이온.”
“아버지의 후계 계획은 이미 틀어졌어요. 이런 저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레이디는 아무 데도 없을 테니까. 사실은 오래전에 포기하셨어야 하는 일이고요.”
“…….”
“이제 아버지와 저한텐 크레이거 가문의 사명만 남았을 뿐이에요.”
“사명이라니.”
“제국의 2인자로서 황가를 지킨다는 사명이요.”
이온과 크레이거 공작 사이에 짙은 정적이 찾아왔다. 이를 악문 공작의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이 보였다.
머릿속으로 말 그대로 카밀루스에게 눈이 멀어 버린 것처럼 보이는 아들을 어떻게 해야 계도할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당장의 말에는 그런 인력(引力)이 없었다.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구나.”
결국은 회피를 선택하는 그를, 이온이 말로 단단히 붙들었다.
“아니요, 아버지는 알고 계세요. 외면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고요.”
“허황한 이야기는 그쯤 하거라.”
허황한 이야기라…….
아버지의 말을 들은 이온은 표정을 진지하게 굳혔다.
자신에겐 이는 단지 허황한 이야기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게 주어진 힘은 아직 완벽하지 않았다.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크레이거 공작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따라서 이온은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까지 그를 잔뜩 열받게 했으니 이것의 효력이 얼마나 될지는 그도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제 간절함이 얼마나 되는지는 확실히 전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에 이온은 주저하지 않았다.
소파와 테이블 사이에서 밖으로 빠져나간 그가 제 아버지를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세를 내리는 이온을 확인한 크레이거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온의 무릎이 맨바닥에 닿은 것이었다. 제 두 무릎에 손을 올린 이온이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 카밀루스가 제자리를 찾도록 도와주세요.”
“…….”
“제가, 이렇게 빌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