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무릎을 꿇은 순간 이온의 눈앞에 글자들이 휙휙 지나갔다.
[플레이어가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의 회유를 시작합니다.]
[본 진행은 플레이어의 생존에 영향을 미칩니다.]
가끔 시스템은 토씨 하나 가지고 이온의 등골을 서늘하게 할 때도 있었는데, 지금이 그런 경우였다.
‘미칩니다.’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아주 가끔 나오는 저 표현이 이번에도 눈앞을 지나갔다.
결국은 크레이거 공작을 꼭 회유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으며, 곧 이온이 그를 설득하겠다고 한 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현재 세가 많이 줄었다고는 하나 크레이거 공작이 이끄는 서부의 귀족들과 군사들의 수는 결코 만만한 정도가 아니다.
공작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제국과의 관계에서 협상력을 가질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었다. 심지어 아직 대공으로서 몇 발짝 떼지도 않은 카밀루스보다 이쪽이 오히려 더 정치적으로 유력하다고 봐야 했다.
다만 지금껏 본인이 행사하지 않았을 뿐.
이온은 긴장으로 무릎을 붙잡은 손에 살며시 힘을 넣었다.
서늘한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크레이거 공작의 표정이 겉으로 보기에도 썩 좋지 못했다. 그러나 이온은 기어이 한마디 덧붙였다.
“아버지의 힘이 필요해요.”
그리고 숨을 죽였다.
조용한 집무실에 짙은 침묵이 깔렸다. 그러자 두 사람분의 숨소리가 교차하여 울리며 공간을 채웠다.
크레이거 공작이 팔걸이에 올려놓은 손으로 주먹을 쥐는 모습이 이온의 시야에 들어왔다. 찻잔을 들 때 바들거리던 그 손은 여전히 떨림을 품고 있었다.
무릎 꿇은, 심지어는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릎 꿇은 아들을 본 크레이거 공작은 마치 제가 모욕을 겪는 것처럼 굴었다.
거친 숨결과 떨리는 손, 굳은 얼굴, 그 주변의 공기마저도 얼어붙게 할 것처럼 서늘한 눈빛까지.
“이온 크레이거.”
매번 이름만 불러 오던 아버지가 성까지 붙여 아들을 호명했다. 이온은 말씀하시라는 의미로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 아비는 카밀루스, 그놈이 네 인생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
이보다 더 나쁠 수가 없는 냉혹한 평가였다. 그러나 크레이거 공작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공작이 가라뜬 눈으로 이온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제 분수를 알고 의젓하게 지내던 내 아들이 첫 일탈을 한 것도 그 녀석 때문이었지. 황실에서 가지 말라고 금지로 지정해 둔 곳을 계속해서 드나들고, 심지어는 그 탑 안에 갇혀 있던 그놈을 빼내 왔으니.”
그건 제가 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온이 이 몸에서 살아가려면 끌어안아야 하는 사실이었다.
이온은 뒤에 붙일 말이 많아 보이는 크레이거 공작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무슨 돼먹지도 않은 저주를 달고 와서 매일같이 쓰러지고 피를 토하고……. 이 아비의 가슴을 그렇게 찢어 놓더니, 빌어먹을 황태자 놈한테 당하고 오질 않더냐.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것도 그 녀석이 없으면 안 일어날 일이었지?”
“그건…….”
아무리 그래도 버니언이 한 짓을 카밀루스의 탓으로 돌리는 건 좀 억지라고,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크레이거 공작은 이온의 말을 묵살해 버렸다.
“그런데 그놈이 없는 동안 얌전히 있던 내 아들이 그놈이 돌아온 뒤에는 또 정신을 못 차리고 좋아한다고 하질 않나, 잠을 잤다고 하질 않나. 그런데 사실은 내 아들이 그놈 애도 배는 몸이 됐고, 심지어 그놈을 돕겠다고 아비 앞에서 무릎을 꿇어?”
모아 놓고 보니 크레이거 공작이 짜증을 내는 이유를 이해할 만했다. 그렇지만 그 문제의 원인은 카밀루스가 아니었다.
이온은 이 말을 들으면 그가 싫어할 걸 알면서도 눈을 질끈 감고 한마디 했다.
“그만큼 대공을…… 사랑하고 있어요. 못 보면 죽는 건 저예요, 아버지.”
“소공작.”
“카밀루스는 죄가 없어요. 그 애는 지금껏 다 빼앗기고 살았잖아요.”
“그래서, 결국 지금 그 녀석이 부족한 게 뭐냐?”
역시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그의 말대로 지금의 카밀루스를 보면 황위 빼고 다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렇지만 이온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표면적인 걸 말하자는 게 아니에요. 대공은 아직도 탑에 갇힌 시절을 두려워해요. 그리고 제 저주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가지고 있고요.”
이온이 자꾸만 카밀루스를 두둔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크레이거 공작이 순간 눈살을 확 찌푸렸다.
“그놈이 그렇다고? 진짜로 그런 거면 차라리 네 곁을 얼쩡거리지 말았어야지! 그 저주를 핑계로 내 집안에 기어들어 와서, 내 아들을 이따위로 흔들어 놓고 있지 않느냐!”
“흔드는 건, 그리고 흔들리는 건 카밀루스가 아니라 저예요. 문제는 저라고요, 아버지.”
“너…….”
“카밀루스가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선황의 장례식을 치르든 말든 돌아오지 않았을 거예요. 제 저주도 못 본 척했겠죠. 하지만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지금 대공이 이곳 황도에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거.”
이온의 현실적인 지적에 크레이거 공작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랫동안 황도 정치에 발을 담가 놓고 살던 공작이 현재 카밀루스가 황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견뎌야 하는 정치적 부담감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기에.
“절 위해서 전부 다 포기할 각오까지 하고 온 거예요. 하지만 지금도 제가 그만하자고 하면…… 카밀루스는 그만할 거예요. 오히려 못 놓는 건 저예요.”
마지막 문장이 끝나자 크레이거 공작은 다시금 이온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여전히 온기가 없었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이온은 제 손등의 뼈가 새하얗게 드러날 만큼 무릎을 더 꽉 쥐었다.
이곳 집무실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크레이거 공작을 어떻게 해야 움직일 수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했었다.
첫 번째 안은 지금처럼 무릎을 꿇고 말로 설득하는 거였다. 크레이거 공작이 아들인 저를 얼마나 아끼는지 아니까, 약간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역시나 너무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크레이거 공작은 카밀루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말마따나 카밀루스가 의도한 게 아니라 해도 이온이 그 때문에 곤경에 처하거나 엇나간다는 생각이 들 만한 요소가 있었다.
기실 두 사람이 남녀 관계도 아니니 감정을 나누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감정에 호소하면 공작은 무엇 하나 내주지 않을 터였다. 특히나 카밀루스를 위해서라면 그 어느 것도.
하지만 버니언을 완전히 실각하게 하려면 크레이거 공작의 전향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제가 현재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버니언을 흔드는 일일 뿐이었으므로.
이온은 초조감에 제 입술을 잘게 지분거리다가, 결국 아버지가 원하는 답을 입에 올렸다.
“……아버지가 원하시면, 공국으로 돌아갈게요. 대신 일을 다 끝내고요.”
한데 크레이거 공작에게 이 답은 충분치 않은 모양이었다.
“돌아가는 게 전부는 아니지 않으냐.”
크레이거 공작이 원하는 건 결국 가문의 후계를 잇는 것이란 소리였다. 직접 그 단어를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결국은 혼인을 하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
하,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쉰 크레이거 공작이 제 앞의 찻잔에 찻물을 따르고 한 모금 넘겼다.
“못 놓는 건 대공이 아니라 너라고 하지 않않았니. 다음의 대화를 하려면 일단 그것부터 확증을 해야지.”
“…….”
공작이 이온 앞에서는 무르게 보이는 일이 많았지만, 그도 결코 오랜 세월 공작가를 허투루 이끌어 온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놈이 정녕 황제가 되면 황후도 들여야 할 텐데, 그 꼴을 옆에서 지켜보려고 그러는 게냐. 설마 네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리란 헛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 테고.”
헛꿈이라는 말에 이온의 안색이 하얘졌다.
공작의 말이 맞았다.
카밀루스가 공작이 된다면 후계 압박을 받지 않을 리 없다. 황후의 자리를 채우는 일은 제가 애를 낳을 수 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사내가 아이를 낳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인데, 저주로 그렇게 됐다고 하면 당연히 다들 꺼릴 터였다.
‘그리고 카밀루스에겐 지금도 구혼하려는 가문이 꽤 될 텐데…….’
이전에 그의 방에 수북이 쌓여 있던 초대장들을 이미 본 이온이었다.
황제가 노골적으로 경계하고 있는 지금도 그런데, 하물며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다들 그를 가만 놔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온은 카밀루스가 그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물은 적이 없었고, 그도 말해 주지 않았다.
조금 의아하긴 했다. 카밀루스의 섬세한 성정을 떠올려 보면 이런 부분을 고민해 보지 않았을 리 없는데…….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 간 이온의 어깨가 떨렸다.
하지만 황후 자리가 어찌 되느냐 하는 문제 때문에 카밀루스의 앞길을 터 주지 않을 것인가.
그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이온은 숨을 꾹 참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잠시 뒤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원하는 대로 해 드린다고 하면, 아버지도 무슨 일이 있든 대공을 도와줄 거라고 약속해 주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