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하아.
크레이거 공작의 잇새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온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도와주실 거예요?”
“이게 공국으로 돌아가고 네가 결혼식을 올리는 대가라고?”
“네.”
이온이 별로 부끄러울 것 없다는 양 짧게 답했다. 공작은 아들에게 골치 아파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게 어떻게 등가냐고 묻는 의미가 포함된 행동이었다.
그러나 제가 쓴 각서를 내미는 이온의 표정은 썩 건조했다.
“안 하실 거예요, 거래?”
“…….”
“전 제 인생을 바꾸는 데 대한 대가라면 이 정도는 바라야 공평하다고 생각해요.”
공작은 이온의 정갈한 글씨가 적힌 종이를 잠시 노려보듯 날카로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온은 그를 지켜보다가 한마디 했다.
“혹여나 이걸로 우리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지는 않을 겁니다. 대공은 반드시 황위에 오를 것이고, 역사란 본래 승자의 기록이니까. 그러는 김에 제 저주도 겸사겸사 풀 수 있고요.”
“말은 잘하는구나.”
“원래부터 그랬잖아요.”
또다시 장탄식을 한 크레이거 공작은 이내 펜을 들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이온은 소파에 편안히 기대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한다고 말을 너무 많이 한 탓에 약간의 두통과 탈력감까지 찾아왔다.
그러는 사이 몇 번 봤더니 이제는 별다른 감흥도 없는 메시지가 지나갔다.
[플레이어가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의 회유에 성공하였습니다.]
솔직히 이번 회유는 제가 내놓은 것 떼문에 그렇게 유쾌하지도 않은 기분이라, 무표정하게 메시지를 보다가 시선을 떼려던 때였다. 그 순간 텍스트가 사라지고 빈 창만 덩그러니 남았다.
‘……?’
보통 창이 꺼지면 텍스트도 같이 사라지는 형태였던 터라, 이런 반응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온이 계속 맛 갔다 맛 갔다 하니 진짜로 맛 갔냐는 푸념을 삼키려는데.
[연……동……률…… 조……회…… 중…….]
창 위에 텍스트가 느릿하게 전개됐다.
‘……연동률?’
이온은 대체 뭐랑 뭐가 연동된다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어 아버지가 각서에 무슨 내용을 쓰는지도 지켜보지 않는 채로, 저도 모르게 그곳을 시선을 그곳에 고정했다.
[조회 완료가 완료되었습니다.]
잠시 뒤 생소한 이야기가 전개됐다.
[플레이어가 최종적으로 사망할 확률은 ◇◇의 목표 달성 확률에 연동됩니다.]
□□를 혹시 각도만 기울여 놓은 게 아닌가 싶은 다이아 모양은 분명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온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어 당혹스러웠다.
[플레이어의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의 회유 성공으로 ◇◇가 목표 달성을 할 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플레이어의 최종 생존 확률이 5% 상승하였습니다.]
[플레이어가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에게 새로운 제안을 한 데에 따라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의 배신]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가 버니언 퍼렌도 클로델을 배신하도록 유도하십시오.]
[본 퀘스트의 완료 여부는 플레이어의 생존 및 ◇◇의 목표 달성 확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꽤 많은 텍스트가 눈앞을 지나가자 정신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이온은 몇 가지 사실을 짚어 냈다.
먼저, 지금 이렇게 각서를 쓰더라도 크레이거 공작이 사실은 버니언을 배신하지 않을 확률도 있다는 것. 가문의 명예를 걸고 해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크레이거 공작의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각본이었다.
그리고…….
‘저 ◇◇는.’
설마 □□의 다른 표현인가. 제 사망 확률과 그의 목표 달성 확률이 같이 높아진다는 게 이해가 안 되기는 해도 그렇게 의심도 해 보았다.
그런데 시스템이 웬일로 꽤 친절하게 답을 내놓았다. 이 정도는 충분히 알려 줄 수 있다는 듯이.
[□□와 ◇◇는 다른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는…… 카밀루스일 확률이 매우 높다. 지금 크레이거 공작과 그에게 영광의 홀을 쥐여 줄 방법이 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중이었으니.
하지만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카밀루스의 ‘목표’란 건 대체 뭐지?
그리고 그게 왜 자신의 시스템에 나타나는 건지 이해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연동률이니 목표 달성 확률이니 하는 단어로 미루어 보아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수치화돼 있어.’
이온은 지금까지 □□와 관련한 것은 물론 여타의 인물이 언급될 때 사소하게라도 확률이니 뭐니 하는 단어가 언급되는 걸 본 적이 없다.
확률 계산에 포함되는 대상은 언제나 자신이었다. 그런데 현재 나온 메시지들은 그러한 기존의 현상과는 분명 궤를 달리했다.
순식간에 찾아온 혼란의 바다에서 그를 건져 낸 건 크레이거 공작의 목소리였다.
“보거라.”
상념을 일깨우는 그 소리에 이온은 탁자 위로 시선을 돌렸다. 종이를 끌어다 와 위에 적힌 글씨들을 확인한 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됐어요. ……약속, 꼭 지키시는 거예요.”
공작은 알겠다는 말 대신 옆에 세워져 있던 도장을 가져와 각서 위에 찍었다. 이온은 그 모습을 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해서 그만 가야 할 것 같아요.”
분명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하고 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어쩐지 힘이 나지 않았다. 아니, 되레 기분이 상당히 저조해진 것 같기도 했다.
크레이거 공작은 이온의 안색이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보다 더 좋지 못한 것을 보고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을 했다.
“괜찮은 게야? 에렌스트 경을 부를 테니 함께 가거라.”
이온은 고개를 저어 거절한 뒤 방을 나와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크레이거 공작은 불안한 듯 따라오다가 이온을 부축해 주려고 했지만, 혼자 갈 수 있다며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홀 쪽으로 나갔다.
점심 시간도 지난, 햇살이 가장 가득한 시각이다. 사용인들도 잠시 쉬는 때라 그런지 저택의 홀이 조용했다.
이온은 둔한 움직임으로 그 가운데를 지나며 아까 제가 봤던 메시지들을 떠올렸다.
[플레이어의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의 회유 성공으로 ◇◇가 목표 달성을 할 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설마 ◇◇가 에렌스트 경일 확률도 있을까.
그렇지만 그와는 8년을 함께했다. 그 기간동안 실로 많은 일이 벌어졌지만, 도중에 이런 메시지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카밀루스라면 굳이 왜 ◇◇와 같이 이름을 가리는 걸까.
시스템상 밝혀지면 곤란하기 때문에?
‘그러고 보니.’
‘시스템의 비밀 파헤치기’라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를 퀘스트 또한 카밀루스와 있을 때 나타났었다.
그때 카밀루스가 어떤 말을 했었지?
이온은 2층의 계단을 밟으면서 당시를 상기했다.
〈그러니까, 제발 내 말 좀 따라 줘.〉
그런 말을 했던 직후에 시스템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기억에서 흐릿해진 그때를 자세히 떠올리려니 조금 시간이 걸렸다. 사실 뜬금없이 올라왔던 퀘스트 창이 그의 주의를 꽤 많이 빼앗았기 때문에 더 기억해 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차분한 환경에서 되짚어야겠다는 생각에 이온은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해 제 방에 서둘러 도착했다.
창문을 커튼으로 가리고 안을 조금 어둑하게 한 뒤, 그때와 똑같은 자세로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상황을 하나하나 순서대로 더듬어 나갔다.
자신은 코피를 흘리고 있었고, 에렌스트 경이 나가려던 찰나에 카밀루스가 들어와 제 얼굴을 살폈었다.
그리고…….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 줘?〉
조금 화난 어투로, 그렇게 말했던 카밀루스는 이어서 애절하게 속삭였었다.
〈죄책감에 착각하는 거라고? 내가 널 되찾으려고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그런 소리 절대 못 해.〉
거기까지 기억해 낸 이온의 미간이 구겨졌다. 지나가듯이 듣고 넘겼던 말이었다. 8년간 아이오딘에 갇혔다 온 그이니, 그 희생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르다.
아이오딘에서의 시간은 그에게는 인내하고 견디는 시간일 것이다. ‘무슨 짓을 했다.’라는 적극적인 표현을 쓰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게다가 ‘되찾으려고’ 했다니. ‘되돌아오는’ 거라면 몰라도.
여기까지의 추론을 이어 간 순간, 시스템이 창을 띄웠다.
[시스템의 비밀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유추한 것이 맞는다고 이야기해 주는 듯한 절묘한 타이밍의 메시지였다.
이온은 그것을 보면서 왜인지 아무런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머리가 무거워졌다. 목뒤가 땅겼고, 머리로 향하는 혈관이 두근두근 뛰는 느낌이었다.
이온은 두통이 확 몰려오는 것에 손으로 제 관자놀이를 짚었다.
“……으…….”
작게 신음이 흘렀다. 그러고 느낌이 이상해 손으로 코를 막으니 아니나 다를까 금세 손바닥 안이 젖었다.
급하게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콧구멍 아래에 대자 금세 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피가 어느 정도 잦아들어 에렌스트 경을 불러와야겠다는 결심했을 때였다. 누군가 이온의 방 문을 두드렸다.
“……누구?”
묻고 나서 이온은 카밀루스가 돌아올 시간이 됐나, 하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나야.”
카밀루스의 목소리였다. 이온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황태후궁에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주려고 온 것일 텐데, 그걸 알면서도 선뜻 들어오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이온은 스스로한테 질문하다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틀림없이 그를 추궁하게 될 것만 같았다.
네가 가진 비밀이 뭐냐고.
설마…….
설마 너 또한 이 정체 모를 시스템의 지배를 받고 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