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86)화 (186/317)

자신의 억측일까. 자신이 단지 표상에 눈이 멀어 견강부회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시스템이 네게 내려 준 예의 목적이라는 건 대체 무얼까. 정황상 유력한 건 하나였다.

황위 찬탈.

그 단어를 떠올린 순간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

“이온……?”

생각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던가. 다시금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온이 정신을 현실로 되돌렸다.

손수건을 숨겨야 마땅했지만 지금 제 얼굴이 얼마나 엉망이 됐을지 모르는 노릇이니 그러기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이온은 순순히 그를 안으로 들였다.

“들어와도 돼.”

나무 문이 기우는 소리와 함께 카밀루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온과 마찬가지로 조금 피곤한지 작게 한숨을 쉬며 문을 연 그가 안에 들어선 순간,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이온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문을 닫고 달려왔다.

“이온! 너 이게 무슨…….”

반사적으로 이온의 앞에 몸을 낮춘 그가 당혹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을 지었다. 카밀루스의 파란 눈이 떨림을 품는 걸 보며 이온은 고개를 저었다.

“큰일 안 났어.”

하지만 이런 부분에 한해서는 이온을 전혀 믿지 않는 카밀루스는 손수건을 쥐고 있는 이온의 손을 떼어 내 얼굴을 확인했다.

손수건을 흥건히 적신 붉은 피와 핏기가 다 빠진 이온의 하얀 얼굴을 번갈아 보던 카밀루스가 표정을 굳히더니 단호히 말했다.

“아니, 너 요즘 이상해. 내가 이 집에 들어왔을 때보다 더 아픈 것 같아.”

“…….”

카밀루스의 말이 사실이라 이온은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반응이 카밀루스에게 확신을 준 모양이었다. 그가 이온을 채근했다.

“언제부터 이랬어? 빨리 말해.”

“며칠 안 됐어.”

“며칠 안 됐어? 설마 저번에 정신 잃었을 때부터인가?”

촉이라도 달린 건가. 이번에도 바로 알아차린 터라 이온이 입술만 우물거리고 있자 카밀루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대체 왜 숨겨!”

정말로 화가 난 듯 카밀루스의 기세가 꽤 사나웠다. 이온이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숨긴 거는 아니…….”

변명을 주워섬기려는데 카밀루스가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네 곁엔 나도 있고, 에렌스트 경도 있어. 그리고 네 전담 버틀러나 널 모실 하인들도 이 집안에 널렸어. 그런데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이러고 있으면서 숨기는 게 아니라고? 그 말을 내가 믿어 줘야 하나?”

“과민 반응 하지 마.”

“과민 반응 아니야. 너 이러면 내가 마음 편히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아?”

“호들갑이라고, 그렇게 아프지 않아.”

“이온!”

실제로 이보다 더 아팠던 적도 많았던 터라 지금 정도의 컨디션 저조는 이온한텐 감기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카밀루스에게는 이만큼도 용납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제가 필요 이상으로 흥분했다는 건 아는 터라 그는 고개를 숙인 뒤 거친 숨을 가라앉혔다.

이온이 아픈데 며칠 동안이나 알지 못했다니…….

생각해 보면 징후가 곳곳에 있었는데 스스로의 둔감함에 짜증이 일었다.

순간적으로 열이 오른 머리를 겨우 식힌 카밀루스는 이내 이온을 침대 헤드 쪽에 기대게 했다.

“앞으로 조금이라도 아프면 나한테 말해, 알았어?”

행동은 친절한데 딱딱한 어투로 어르는 그의 말을 듣고 이온은 왠지 기가 눌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대답을 듣고도 카밀루스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더한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대신 손을 잡고는 제 마나를 이온에게 흘려보낸 뒤 이온의 셔츠 위쪽 단추를 살짝 풀어 목에 걸린 마나석 목걸이를 살폈다.

어째서인지 마나석 목걸이를 못마땅해하는 표정으로 살피는 그를 이온이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카밀루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것도 이젠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모양이군.”

그 말을 듣고 이온은 소심하게 반박했다.

“진짜로 그랬으면 난 지금쯤 진짜 죽었을걸…….”

물론 그러다 카밀루스의 눈총을 받고 본전도 못 찾았지만.

제가 아픈 것에 잔뜩 예민해진 카밀루스 앞에서는 까불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이온은 얼른 화제를 돌리려 했다.

“그보다 황태후궁에 다녀온 일은 어떻게 됐어? 얘기 들려줘.”

“이온, 그런 건 지금 안 중요해.”

“중요해. 앞으로를 전부 망칠 셈이야?”

카밀루스가 반박하고 싶은 듯 입을 벌린 찰나였다.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와 이온과 카밀루스의 시선이 전부 문 쪽으로 향했다.

이온이 대답하기 전에 카밀루스가 날 선 목소리로 대신 질문을 던졌다.

“누구냐.”

“접니다. 안이 소란스럽다고 해서 왔습니다.”

에렌스트 경의 목소리였다. 누군가가 둘이 싸우는 것 같다고 그에게 알려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카밀루스의 표정에는 다시금 한기가 돌았다. 이온은 그가 에렌스트 경을 혼낼 속셈인 걸 눈치채고 얼른 밖을 향해 말했다.

“알렉, 딱히 신경 쓸 필요 없…….”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성큼성큼 문 앞으로 걸어간 카밀루스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카밀루스가 보이자마자 에렌스트 경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비렌시움 대공을 뵙습니다.”

“알렉사이 에렌스트 경.”

제 이름을 읊는 소리에 에렌스트 경이 뭔가 싶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카밀루스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슥 좁혔다.

“내가 없을 때 알아서 잘 처신하는 거 아니었나?”

아직 영문을 모르는 에렌스트 경이 카밀루스의 어깨 너머로 방 안쪽을 한 번 살핀 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는지요.”

“문제가 생겼느냐고? 이 집안사람들한테 이온이 아픈 건 그냥 일상인가 보지? 그래서 별로 신경 안 써도 되는?”

“도련님께서 어디 편찮으신 겁니까?”

에렌스트 경의 반문을 듣자마자 카밀루스는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그는 긴말하지 않고 짧게 명했다.

“빨리 의원 불러와.”

그러고 대답을 듣기도 싫다는 듯이 문을 닫아 버렸다.

“정말 별거 아니라니까 왜 알렉을 혼내고 그래?”

카밀루스가 되돌아오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이온이 핀잔을 두었다. 그러자 이온이 아픈 것에 한해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카밀루스가 오히려 더 화를 냈다.

“자꾸 나 속 터지게 할래?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짧은 말로 모든 반박을 일축해 버린 카밀루스가 침대 위로 올라와 이온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에렌스트 경이 의원을 불러올 때까지 껴안고 있을 모양인지, 이온을 제 품에 들이고 손을 잡았다.

제게 아무리 마나를 쏟아부어도 결국은 일시적인 효과밖에 없다는 걸 알 텐데도 카밀루스는 닿은 손을 통해 따뜻한 기운을 계속해서 흘려보냈다.

그런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이온은 제가 보았던 시스템 메시지를 떠올렸다.

네 최종 목표는 뭐고, 시스템의 비밀이 왜 너와 연관이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시험 삼아 그 말을 입에 담으려 하자 역시나 가로막혔다.

[상태 이상: 금어]

[플레이어가 말할 수 없는 문장입니다.]

어차피 말소리가 나갈 거라는 기대도 안 했다. 하여 이온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일부러 머리를 카밀루스에게 기댄 뒤 물었다.

“카밀루스, 너 나 얼마나 좋아해?”

좀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던가. 손을 잡은 카밀루스의 아귀힘이 조금 세졌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유치하게 애정 테스트라도 하고 싶은 거야?”

“그냥, 궁금해서…….”

이온의 대답을 듣고 흔한 연인의 투정이라고 생각했는지 카밀루스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가볍게 대꾸했다.

“너 없으면 못 살아. 죽어.”

“거짓말하네. 전엔 일이 끝나면 나한테서 떠나겠다 했잖아.”

“그땐 네가 날 안 원하는 거 같았으니까.”

이온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가 크레이거 공작과 이온 사이에서 오간 이야기를 듣거나 각서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역시 화를 내려나.’

아니면 공작의 도움이 그의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된다고 했으니 눈을 감아 버리려나.

이제 와 카밀루스의 애정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가 비밀로 하는 목표란 것이 어느 정도의 경중이 있는 일인지는 궁금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온 크레이거라는 인물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도.

“그럼 내가 원하면 날 떠날 수 있다는 소리야? 그게 아니라도 떠날 이유가 생긴다면.”

“…….”

제가 한 발언이 상당히 저급하다는 건 말하는 이온 역시 알았다. 질문을 받은 카밀루스도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입매가 일자로 굳었다.

곧 그의 입술 사이로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히 나도 모르는 시험했다가 이상한 대답 듣고서 실망하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해, 이온. 나 너한테 숨기는 거 없다고 했잖아.”

이야기하는 동안 카밀루스의 파란 눈동자에 흔들림은 없었지만 이온은 이제 확실히 알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에게 숨기는 게 없다는 말만큼은, 완벽한 거짓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어쩌면 한두 가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온 자신과 관련한 것에 국한되지 않았을 확률도 높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그의 행적들 중에는 의심스러웠던 부분이 산재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보이는 것이 뭔가.

그리고 실마리를 풀어 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것은.

이온은 속으로 말을 고르다가 마침내 한마디 꺼냈다. 어쩌면 또 ‘금어’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질문이 나왔다.

“카밀루스, 혹시 넌 내 기억 상실의 원인이 뭔지 알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