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밀루스, 혹시 넌 내 기억 상실의 원인이 뭔지 알아?”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하라는 말에 응한 것인데, 카밀루스는 자신이 왜 이런 질문을 받는 것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대화 흐름을 못 따라가는 건가. 애정도 테스트 하다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네가,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
이온이 ‘아니야?’ 하고 묻는 듯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자 카밀루스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이었다. 또 다른 거짓말을 준비하는 걸까, 아니면…….
“글쎄, 저주의 효과일 수도 있는 일이지. 근데 근거도 없이 왜 그런 생각을 해?”
결국은 모른다는 대답이었지만, 이온은 그의 대답에서 유보적이면서도 회피하는 뉘앙스를 분명하게 느꼈다.
왠지 모를 실망감에 이온이 먼저 카밀루스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내 기억이 없어도 상관없다며, 넌.”
“겨우 그거 하나로? 게다가 그 말 한 지가 언제인데.”
“널 보다 보면 가끔 전부 꿰뚫어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
돌이켜 보면 뭔가 준비해 놓은 것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가장 뚜렷하게 느낀 건 솔친 후작 저택에서였다. 제가 있는 곳에 태연하게 찾아와 금세 대화의 흐름을 잡고 스스로 북부에서 어떤 실력 행사를 할 수 있는지 알렸다.
그곳에서 보인 통찰력은 8년간 황도 정치를 도외시한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
심지어 카밀루스는 선황으로부터 그 어떤 교육도 받지 못했다. 제아무리 옆에 참모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 역시 일개 기사일 뿐, 그나마 작위를 받은 이는 페드로를 포함해 두어 명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 작위라는 것도 기껏해야 자작위나 남작위 정도다.
현실이 그러하니 스스로의 판단으로 대부분의 것을 결정했어야 할 터인데, 카밀루스는 너무 능숙하게 주변을 주무르고 있었다.
이런 위화감을 어째서 이제야 느낀 것인지 의아할 정도였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눈썹을 슥 올리며 모르는 척을 했다.
“내가?”
“아니야?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잖아.”
“그건 당연한 거야. 항상 널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언제부터?”
다시 고개를 들어 잇달아 묻자 카밀루스가 입가에 웃음을 비쳤다. 저를 귀엽다는 듯 내려다보는 것을 보니 단지 연인의 투정이라고만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하는 대신 제게 입술을 맞부딪쳐 오는 것을 이온은 거부할 수 없었다.
카밀루스가 몸을 한껏 기울인 채로 제 손으로 이온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눈을 감으며 천천히 이온의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는 행위에서 이제는 조금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부드럽게 제 안으로 스며들어 오는 그를 느끼며 이온은 속으로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도 되는 건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렇지만 추궁을 하다가, 결국 그를 의심하게 되면?
혹시나 위험한 사람이 아닌 건지, 자신을 배신을 한 건 아닌지, 혹은 목적을 위해 자신을 맘대로 휘두르려 애정을 가장하는 게 아닌지…….
그를 향한 신뢰를 잃으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미 전부 줘 버렸는데.’
몸도, 마음도.
카밀루스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한데 그래서 더 말도 안 되는 시스템의 농락에 걸려든 느낌이었다.
하지만 의문이 들어도 차마 깊은 곳까지는 파고들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이온은 제 허리를 꽉 끌어안는 그의 팔을 느끼며 더욱 입을 벌려 그를 받아들였다. 혀와 혀가 얽히고,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기 위해 카밀루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읏…….”
도톰한 혀가 뭉근하게 안쪽을 휘젓자 두 사람의 타액이 진득하게 섞였다. 마음의 불안감은 이온으로 하여금 오히려 그것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게 했다.
숨소리가 깊어질수록, 질척거림이 커질수록 심장은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아, 하, 열기에 못 이겨 헐떡이다 눈을 살며시 떴을 때였다. 파란 눈이 나른하게 뜨인 것을 발견하자마자 두 사람의 입맞춤이 끝나 버렸다.
그러나 아쉬워할 새는 없었다. 카밀루스가 이온의 상의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나직이 질문을 흘렸다.
“시간 좀 있나?”
“응……?”
“의원이 올 때까지.”
짧은 말과 함게 그가 이온이 걸치고 있던 망토의 앞 리본을 풀었다.
“망토 걸친 것도 귀엽긴 한데 볼이 빨개진 게 너무 예뻐서.”
못 참겠다, 이온.
성애의 의미인 게 명백한 그 속삭임에 이온의 뺨에 올라왔던 홍조가 귀로 확 퍼졌다. 그런 이온을 내려다보며 카밀루스가 작게 웃더니 연신 입을 맞추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거야, 응? 나한텐 너밖에 없는데.”
“카밀루스…….”
말하는 동안 카밀루스가 이온을 제 허벅지 위에 앉히더니 이온의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어 내곤 금세 헐렁해진 옷을 위로 벗겨 버렸다.
새하얀 몸의 매끄러운 선을 쓸어내리던 그는 이내 허리를 타고 내려가 긴 손가락을 바지 사이로 밀어 넣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네가 안심할 수 있을까? 알려 줘.”
톡, 톡, 하고 허리띠와 바지의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가볍게 들려왔다. 이온은 순식간에 야릇하게 바뀌어 버린 분위기에 템포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둔부에까지 금세 조금 차가운 공기가 닿자 이상하게 가슴이 술렁거렸다. 결국 급격하게 흥분해 버린 듯한 카밀루스를 앞에 두고 이온은 약간 더듬거리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 이럴 시간까진 없지 않을까.”
“끝까지는 안 할 테니까.”
그리고 근처에 갈 생각도 딱히 없다는 말이 덧붙여졌다.
“매번 그러고 있는데 힘들지도 않아?”
질문하는 것에 카밀루스는 웃음을 흘렸다.
“진짜 무자각 밀당 천재네. 해 달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그의 지적에 이온은 괜스레 민망해졌다. 카밀루스가 갑자기 어디에서 발동이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빼고 싶지는 않았다.
“빠, 빨리, 할까?”
단지 카밀루스의 손이 닿은 것만으로도 이런 생각을 하다니, 제 머리가 돌아 버린 게 틀림없었다.
대답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카밀루스는 자세를 바꿔 이온을 침대에 눕혔다. 그러고 이온의 얼굴 양옆에 손을 대고 내려다보는 것에 이온 역시 두 눈을 크게 뜨고 긴장한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긴장하지 마……. 근처에도 갈 생각 없으니까.”
짧게 달래는 소리를 한 카밀루스가 오른손을 내려 제 바지의 단추를 스스로 풀었다. 그러자 드러난 광경에 이온이 흠칫해 시선을 돌리려 하자 카밀루스가 속삭였다.
“계속 봐 줄래?”
“뭐……?”
“그래야 빨리 끝낼 수 있을 거 같아.”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물을 틈은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곧장 알아 버렸으니까.
카밀루스는 이온의 몸에 손을 대는 대신 스스로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온은 마치 속박이라도 된 듯이 꼼짝도 할 수가 없게 돼 버렸다.
흥분감에 조금씩 붉어지는 얼굴과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 그리고 조금씩 거칠어져 가는 숨소리.
그 와중에 제게 시선을 똑바로 향한 카밀루스의 흐릿한 파란 눈까지.
서로의 몸이 겹쳐지거나 어디 한 군데 닿아 있는 것도 아닌데, 이온은 숨도 쉬기 어려웠다.
하아, 하…….
방금 전까지 키스를 한 탓에 살며시 젖어 있는 카밀루스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와 이온의 얼굴로 쏟아졌다.
이온이 떨리는 그의 몸을 보다가 마른침을 삼켰을 무렵이었다. 돌연 제 손목이 낚아채지는 것에 이온이 놀라 탄성을 질렀다.
“아……!”
손끝에 습하면서도 뜨거운 기운이 닿았기 때문이었다.
이온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으나 카밀루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몸에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러자 손끝만이 아니라 손바닥에 깊이 그의 체온이 파고들었다.
카밀루스는 이온의 시선이 제게 고정된 것을 알아차리곤 살며시 웃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느껴져?”
이온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움찔거렸다. 그에 카밀루스는 손을 얽어 머뭇거리는 이온의 손을 제가 움직였다. 더 적극적으로 해 달라고 부추기는 것처럼.
“너라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는데.”
저를 쓰다듬어 달라고 이야기하는데도 이온이 부끄러움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자, 결국 카밀루스가 결단을 내렸다.
“카밀루스, 읏!”
이온은 제 하반신에 닿는 이상한 느낌에 더는 시선을 아래에 두지 못하고 고개를 젖혔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긴장감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이온의 손을 감싼 카밀루스의 커다란 손이 힘을 주자 손아귀에 쥐어진 것이 미끄러졌다. 그러면서도 강하게 들어오는 압박에 이온은 저도 모르게 목을 젖히며 목울대를 떨었다.
“큽…….”
카밀루스는 그런 그의 목선에 키스를 쏟아 내면서도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작은 신음 소리가 둘 사이에서 교차했다.
이대로 있다가 누가 들어오면 어떡하지.
걱정이 들었으나 그러한 생각도 금세 날아가 버렸다.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끈적함이 손안에 고인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