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88)화 (188/317)

금세 축 처져 버린 이온이 가슴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카밀루스는 그의 무방비한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침을 한 번 삼켜 거친 숨을 갈무리해 냈다. 

자연스럽게 제 품 안에서 손수건 한 장을 꺼낸 카밀루스가 이온의 몸을 꼼꼼히 닦아 준 뒤 저 역시 누웠다.

이온 쪽으로 방향을 향한 그는 곧 제 두 팔 안에 이온을 가두듯이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탓에 카밀루스의 심장이 쿵쿵거리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심지어 이온을 감싼 팔의 혈관마저도 뛰는 중이었다.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방증하는 징후들이 제게 와닿으니 이온이 왠지 민망해져 눈을 꽉 감았다. 그때, 머리 위에서 조금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널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어, 이온.”

속삭이는 목소리에 이온이 시선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려고 했지만, 카밀루스가 싫다는 듯이 이온의 얼굴을 제 품에 묻어 버렸다.

“네가 떠나간 뒤 매일매일 네가 다시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진짜 네가 찾아왔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그건 말로 설명 다 못 해. ……분명한 건, 무서웠지만 행복했다는 거야.”

“카밀루스…….”

무서운 건 탑을 드나드는 어른들에게 들킬까 봐. 행복한 건 그 위태로운 순간에도 너무나 즐거워서.

이온은 그런 말뜻을 알아듣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파졌다.

이온이 주마등을 통해 들여다봤던 둘의 첫 만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무척 짧기도 했고, 별다른 말을 나눈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온에게도, 카밀루스에게도 인생을 지배할 만한 기억이었다.

“매순간 널 위해서만 살 거라고 맹세해. 그러니 제발 날 의심하지 마. 네가 그러면 난 정말…….”

뒷말을 뭐라 잇기가 힘든지 카밀루스가 잠시 숨을 들이켰다. 어쩌면 그가 약간은 울고 싶은 기분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카밀루스에게서 떨림을 품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지금까지 왜 살아왔는지조차 회의하게 될 것 같아, 이온.”

“…….”

“내가 왜 이렇게 필사적인지 넌 이해가 안 되겠지. 알아, 그래도 상관없어. 내가 어떤 마음인지, 내가 널 위해서 뭘 하는지 알아주지 않아도 돼. 하지만 적어도 날 의심하지는 마.”

이온은 그의 간절한 말에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카밀루스의 말에는 아무런 근거도, 설득의 장치도 없었다. 그렇지만 진심만은 확실히 와닿아서 잠시라도 그가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이 저절로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에 속으로 안도한 이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밀루스의 팔이 느슨해졌다.

그에 이온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 카밀루스를 올려다보았다.

“의심은, 안 해. 그렇지만…….”

이온이 주저하며 말끝을 흐리자 카밀루스가 말하라는 듯 이온과 지그시 눈을 마주쳤다.

투정을 부리는 말처럼 들릴까 봐 부끄럽지만 이온은 뒷말을 입에 올렸다.

“넌 나랑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어? 너랑 난…… 일반적이지 않은…… 사이잖아.”

자신들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정의하는 게 이온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게 그들의 가장 큰 벽이었다.

한데 카밀루스는 이온이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오히려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반문했다.

“혹시 내가 널 버릴까 봐 불안하기라도 한 거야? 진짜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어?”

“그런 건 아니고…….”

오히려 널 버리게 되는 건 나일 수도 있어.

이런 분위기에 당장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연히 그의 옆에 쭉 있을 수 있다면 기쁜 일이겠지만, 크레이거 공작의 지적은 일리가 있었다. 제 손으로 카밀루스를 높은 곳에 올리고 나면 이온의 역할은 거기서 끝이었다.

남자인 자신이 황후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냥 공국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사는 게 이온에게는 최선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카밀루스라 해도 당연히 공국까지 따라오지는 않을 테고.

그런데 카밀루스가 이온을 내려다보며 약간 난처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레 한마디 건넸다.

“좀 불순한 거 같은데 듣고 네가 도망가면 어쩌지?”

“뭔데? 일단 말해 봐.”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내 반려로 맞이할 거야. 그리고 기왕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됐으니, 애 한 여덟은 낳고 살아야지.”

“……여덟은 아무리 봐도 너무 많은데?”

듣고 나니 현실성이 없는 얘기라 이온은 오히려 가볍게 맞받아쳤다. 하지만 카밀루스가 이렇게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기뻐 저도 모르게 입가가 풀렸다.

카밀루스는 그런 그의 뺨을 살짝 꼬집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설마 넌 나랑 의견이 달라? 나만 이런 꿈 꾸는 건가?”

아주 잠깐 휴지를 둔 이온이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걸.”

그 나름대로 현실적인 지적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카밀루스는 이번에도 가볍게 대꾸했다.

“뭐 어때, 그런 눈치 안 보려고 권력 잡는 거 아닌가? 난 그게 아니면 싫어. 내 맘대로 못 할 거 같으면 그냥 너 데리고 여행이나 다니지, 내가 왜 피곤하게 위정자 노릇까지 하면서 살겠어. 일만 많고 행복감도 떨어지고, 그럼 결국 수명도 단축될 텐데 그보다 불행한 삶이 없잖아.”

“아주 불순하고 불량하기까지 하네.”

카밀루스가 피식 웃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 입에 주문처럼, 입에 달고 다니는 한마디가 이어졌다.

“나한텐 네가 더 중요하니까…….”

그러나 문장이 채 완성되기 전에 그들의 귓가에 노크 소리가 흘러들었다.

순간적으로 에렌스트 경에게 의원을 불러오라 했던 것을 잊어버렸던 터라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둘 다 흠칫했다.

급하게 떨어진 두 사람이 서둘러 주변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한데 안쪽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에렌스트 경의 의문 어린 목소리가 질러왔다.

“도련님, 안에 안 계십니까? 의원을 데리고 왔습니다.”

“아, 어! 자, 잠시만, 조금만 기다려.”

이온은 안쪽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라고 광고하듯이 말해 버렸다는 걸 스스로도 알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이온처럼 전부 다 벗지는 않았던 카밀루스가 먼저 옷매무새를 갈무리하고 방을 가로질렀다.

다행히 문이 열리기 전에 이온은 원래대로 망토까지 걸치고 옷깃을 가다듬었다. 그러고 들어온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에렌스트 경이 과연 나이 지긋한 의원을 대동한 채였다. 아마 밖에서 급하게 데리고 왔는지 의원의 머리칼이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온은 아쉬운 소리를 속으로 삼켰다.

‘좀만 늦게 오지…….’

아직 대화 거리가 남아 있었던 터라 조금 아쉬웠다. 게다가 카밀루스가 먼저 조치 취해 줘서 그런지 두통도 좀 나아진 상태였던 터라 이 정도로 호들갑을 떨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침대 쪽으로 의자와 작은 탁자를 끌어다 온 의원이 진료를 시작하는 걸 보는 카밀루스는 어느새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방금 전의 열기조차 모두 잊은 사람처럼.

* * *

다행히 큰일은 없이 의원이 다녀가고 카밀루스는 홀로 어둑어둑해진 제 방으로 돌아왔다.

살며시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가의 책상 앞 의자에 기대어 앉아 그가 답답한 듯 크라바트를 끌러 버렸다. 그러고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카밀루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지 짧은 노크를 한 뒤 페드로가 따라 들어왔다.

오늘 있었던 이런저런 일 때문에 지쳐 버려 고개를 젖히고 있던 카밀루스가 그 상태 그대로 눈만 굴려 그를 확인하자, 페드로가 상태를 알 만하다는 듯 저는 응접 소파 쪽에 앉았다.

“소공작께서 편찮으시단 이야기 들었습니다. 괜찮으신 겁니까?”

거리가 좀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의 소통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카밀루스 또한 차라리 이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덕분에 몸의 힘을 빼고 의자에 축 늘어진 그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딱히 저주의 기운이 강해진다든가 하는 변동은 없었던 것 같은데 의원이 돌팔이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내가 그 저주에 대해서 아직도 잘 모르는 걸 수도 있고.”

어딘지 딱딱한 말투에 페드로는 그가 상당히 기분 좋지 않은 상태라는 걸 눈치챘다. 사실 오전에 태양궁에 들렀을 때도, 황태후궁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도 카밀루스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내내 표정이 안 좋으신데, 황태후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뭐, 그쪽이야 적당히 불쾌했지. 애초에 좋은 관계가 아니잖아.”

“황태후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던 거 아니었습니까? 저번에 그렇게 말씀하셨던 게 기억나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그 여자와 대화하고 있으면 자꾸 선황이 끼어드니까.”

죽은 사람이, 이제는 육신조차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은 망령이 자꾸만 제 주변을 떠도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카밀루스는 피곤함 어린 눈으로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황태후와 나눴던 대화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난 레이어먼의 고독을 해소해 주고 싶었어요, 대공.〉

그건 ‘엇나감’에 대한 아주 긴 변명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