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후궁에 들어갈 무렵 자신을 기다리는 듯이 복도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황태후는 이전과 태도가 썩 달랐다. 카밀루스를 마치 편안한 친구를 대하듯이 했다.
그녀는 이전에 카밀루스를 구원해 주고 싶어 했던 것처럼 카밀루스가 그녀를 구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이는 나라는 사람이 있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대신 황제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걸 도와줄 조력자 내지는 대외용 인형을 필요로 할 뿐이었지요.〉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한 스스로의 행동을 제삼자에게 이해받기를 바랐다.
덕분에 카밀루스는 버니언의 마음을 아주 조금이지만 헤아리게 되었다. 그의 행동을 공감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그렇게 엇나갔는지 어렴풋이 알겠다는 의미였다.
〈레이어먼과 나 사이에 아들인 버니언이 나왔지만, 그 아이를 낳을 사람은 사실 내가 아니라도 되었답니다.〉
〈…….〉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쌓아 온 나의 고독은 대체 누가 풀어 주었을까요, 대공?〉
황태후의 입에선 자신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간간이 나왔지만, 그 어떤 인간적인 감상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한 태도를 보며 카밀루스는 깨달았다. 버니언에겐 어머니가 있었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태후의 입장에서 버니언은 돌봐야 할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므로.
그냥 커서 황위에 오르면 그만인 존재였다. 어차피 경쟁자도 없으니 잘나든 못나든 상관없는 일이었고.
심지어 그녀는 정치적 야망조차 가지지 않았으니, 그것이 버니언에겐 오히려 상당한 불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가까이서 보니 대공한테서 익숙한 얼굴이 보이기는 하네요.〉
부채로 카밀루스의 턱을 들어 올린 황태후가 그리 속삭였었다. 그녀는 한때 그리도 가지고 싶어 했던 황제를 이제는 배신하길 원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미 배신했다.
카밀루스는 화려한 수 겹의 레이스에 가려진 그녀의 몸을 힐끗했다.
이전에 만났을 때는 원래부터 티가 나지 않았던 것인지 몰라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이 그곳에 숨어 있었다.
카밀루스가 살짝 미소 짓자 황태후 역시 그에 화답하듯이 입꼬리를 희미하게나마 올렸다.
〈대공은 날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니요, 지금 보니 상부상조인 거 같습니다.〉
황제가 평생 사랑했던 연인이 누군지 미칠 듯 궁금해하면서도, 다른 사내를 품에 들이도록 그녀를 조종한 외로움의 속성을 카밀루스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빠져든 그 관계가 그리 순수하지 않으리라는 사실 역시 눈치챘다.
황태후궁에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의 고위 귀족 남성. 결혼하지 않았을 리 없다.
갑자기 아이가 태어난다면 바로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할 거다. 불륜을 한 상대 남성도, 황태후도 자리를 지키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불륜이란 죄악이니까.
카밀루스는 헛웃음이 나왔다.
영원한 젊음은 영원한 아름다움과 동의어인가요?
황태후에게서 그 짧막한 편지가 왔을 때, 카밀루스는 그것이 단지 황태후가 선황의 연인에 대한 비밀을 궁금해했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사실 자신을 황태후궁에 불러들일 이유로 충분하다고 여겼기에 그와 다른 무언가가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를 사로잡은 건 ‘영원한 젊음’, 황태후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원한 아름다움이라는 키워드였다.
황태후는 카밀루스가 이미 자신의 불륜 사실을 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밀루스가 스스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저의 치부를 숨겨 주는 데 협조할 것이라고도.
물론 협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카밀루스는 기꺼이 응했다. 응접실을 나올 때 황태후의 치마는 흐트러져 있었다는 의미다.
중년의 나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탄탄한 허벅지를 가린 레이스를 거두어 올리며, 카밀루스가 속삭였었다.
〈동업자에게도 비밀은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예를 들어, 배 속의 아이가 어떤 성씨인지?〉
〈대공이 어머니가 누군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카밀루스가 제 아들인 버니언을 어떻게 하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선황에게 사랑을 갈구하던 여자는, 제 텅 빈 마음 때문인지 아들에게 그 어떤 사랑도 주지 못했다. 그리고 선황이라는 고삐가 풀리자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스스로를 타락시켰다.
황태후는 카밀루스에게 건네지 않고 제 방에 남겨 두었던 선황의 약물을 삼킨 뒤 웃었다.
〈사실 레이어먼이 언젠가 나한테 말해 줬었어요. 두 개의 약물이 어떤 효능이 있는지. 하지만 둘 중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 알 수 없는데…….〉
〈저라면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거군요.〉
황태후는 살며시 눈꼬리를 휘는 것으로 긍정의 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카밀루스가 추궁해도 결국 각각의 약물이 어떤 기능을 하는 건지는 정확하게 알려 주지 않았다.
사람을 이용하는 데 선수인 것은 카밀루스가 아닌 황태후였다.
그러한 낮의 일을 떠올리는 카밀루스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원치 않게 황태후의 허벅지를 쓸어올렸던 감각을 떨쳐 내기 위해 제 손을 쥐락 펴락 하던 그는 주먹을 꽉 쥔 뒤 냉하게 말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그분껜 차라리 독약을 보내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상상도 못 한 일이긴 하군요. 황태후 폐하께서 그러다니…….”
카밀루스의 중얼거림을 다 들은 페드로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주변에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미쳐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안타까운 일이지.”
“소공작께도 전부 말씀하실 겁니까?”
“이온에게라…….”
하지만 자신이 남의 치마를 들추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지는 않다는 게 솔직한 심경이었다. 그게 아무리 필요한 연기라고 했을지라도.
그러나 그들 사이에 비밀은 있어선 안 됐다.
“황태후에게서 아이가 태어나면 전부 알게 될 테니 미리 말은 해 둬야겠야지. 사실 그녀의 불륜 사실이야 우리에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야.”
한데 카밀루스의 말을 전부 들은 페드로가 뚱한 표정을 짓더니 의뭉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그 말 진심이십니까?”
카밀루스는 그에 페드로가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나 싶어 눈을 굴려 그를 곁눈질했다. 저 아저씨는 상상 이상으로 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저런 뜬금없는 말을 할 때면 좀 긴장하게 됐다.
그렇지만 제 말을 몇 번 더듬어 보아도 오류를 찾지 못한 카밀루스가 무슨 소릴 하냐는 투로 대꾸했다.
“당연하지. 내 말 어디에도 거짓이 숨어 있을 틈이 없는데?”
“대공…… 그게 아니라, 지금 애써 모르는 척하고 계신 게 있지 않으십니까? 중간에 현 황제가 왜 삐뚤어졌는지 이해하시게 됐다면서요.”
“딱히 그 자식을 동정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그 발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말씀하신 대로면 황태후의 아이가 태어날 테고, 그럼 또 황실발로 불행이 재생산되는 셈인데 외면하실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
“왜 대답이 없으실까요.”
페드로가 웃으며 입을 꽉 닫아 버린 카밀루스의 대답을 유도했다. 눈썹 사이로 죽죽 거친 선을 그은 카밀루스가 한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제 마음 일부를 드러냈다.
“그렇다고 황태후가 애를 버릴 거 같으니 이온한테 주워서 키우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심지어 나와도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이인데.”
어떤 이야기가 들려오길 바랐던 것인지 몰라도 카밀루스의 답을 듣자마자 페드로가 실소했다. 카밀루스가 뭐냐는 의미로 눈썹을 살며시 들썩인 순간 웃음기 섞인 물음이 돌아왔다.
“아이를 혼자서 키우는 선택지는 없으시고요?”
카밀루스의 미래에 너무 자연스럽게 이온의 존재가 포함되어 있는 것에 페드로가 어이없어했던 것이었다.
카밀루스는 퉁명스러운 투로 대꾸했다.
“난 이온이랑 같이 살 건데.”
“예…… 뭐, 마땅히 그러셔야죠.”
페드로는 이건 이온 본인의 의지가 어떠한지도 불러서 물어봐야 하지 않는지 생각했지만 지금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들긴 했어도 카밀루스는 일단 적당히 넘겼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춰 페드로에게 오랜만에 제대로 된 명을 내렸다.
“그보다 페드로, 북부에 사람을 보내라.”
긴장감 없이 몸을 퍼뜨리고 있던 페드로가 순간 허리를 바짝 세웠다.
“대공, 북부라면…….”
“이엘라엠과 비아트리스에 보내. 내 가신들에게.”
“……!”
카밀루스의 말이 입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페드로의 눈이 번쩍 뜨였다. 놀란 페드로의 반응을 확인하곤 카밀루스가 덧붙였다.
“이제 나도 발톱을 드러낼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