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91)화 (191/317)

* * *

“단장님.”

노아 기사단 건물의 2층 단장 집무실에 작게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라는 소리에 안으로 들어선 부단장인 아스타틴 딜런이 고개를 숙이자, 의자에 방만하게 앉은 채 손보다 작은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칼 나르바에스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이제야 왔나? 폐하께 꽤 오래 붙들려 있었나 보군.”

오늘 오전에 방문하기로 했던 마탑주 재니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스타틴은 약간 불편해하는 기색을 담아 대꾸했다.

“아무래도 마탑주께 이것저것 캐묻지 않았겠습니까. 저희를 의심하고 있는 폐하이시니…….”

마침내 책을 덮어 책상에 대충 던져 놓은 칼이 푹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언제 올지 기약도 없는 손님을 기다리느라 몸에 좀이 쑤신 탓에 기지개를 켜 몸을 풀었다. 그러면서 아스타틴을 향해 적당한 일침을 놓았다.

“그렇지. 그리고 그게 실제로 틀리지도 않지, 안 그래?”

“…….”

정곡을 찌른 탓일까. 아스타틴의 고개가 살짝 숙어졌다. 칼은 그런 그를 유심히 바라보며 책상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루 종일 이런 곳 저런 곳에 돌아다니느라 흐트러진 옷깃을 발견한 칼이 아스타틴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려 몸을 바짝 붙였다.

여느 귀부인 못지않게 거스러미 하나 없이 단정하게 다듬어진 손끝이 목 부근에 닿자 아스타틴이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칼은 별다른 징후 없이 목소리를 낮추어 꾸짖는 소리를 낼 따름이었다.

“그래도 크레이거가의 공자를 찾아가다니, 내가 목 졸린 게 그렇게 충격적이었어?”

“저 때문이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던 것뿐입니다.”

“덕분에 그 한심한 황제 앞에서 변명거리 생각하느라 머리에 쥐가 나는 줄 알았다.”

말이 나온 김에 얼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투정을 부리자 아스타틴이 반성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곤란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 솔직한 반응에 칼은 눈웃음을 지었다. 눈꼬리가 긴 눈매가 휘자 아스타틴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움찔하다가, 무언가를 참는 듯이 몰래 주먹을 쥐었다.

칼은 시야 끝으로 그 모습을 보았지만 모르는 척 제가 다듬어 준 목깃을 툭툭 두드리며 태연히 이야기했다.

“역시 날 생각해 주는 건 너뿐인 모양이다. 사실이 그렇지, 아스타틴 네 스스로 복종할 대상은 선황 폐하 아니면 나일 테니까. 이전에도, 지금에도. 안 그래?”

끝에 물음표가 달렸지만 과묵한 성격답게 아스타틴은 별말 않고 고개만 숙일 따름이었다.

기사단 입단 시절부터 모든 궤적을 함께 밟아 온 그들이었지만 성격이 꽤 달랐다. 일단 아스타틴은 정말로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한때에는 의기나 고집도 간간이 보였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깎여 나간 탓에 고지식함 덩어리 그 자체였다. 물론 기사의 덕목으로는 나쁘지 않았고, 그래서 칼은 그에게 제 뒤를 맡길 수 있었다.

아마 아스타틴에게 물어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각자의 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물으면 둘은 서로를 가리킬 것이었다.

칼은 고분고분한 자세로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아스타틴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주변은 다 물렸나?”

“예, 사전에 분부하신 대로.”

“좋아. 가서 마탑주를 모셔 오도록.”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아스타틴은 짧게 허리를 숙였다 펴고 뒤돌아 나갔다.

문이 닫힌 순간 칼은 괜스레 제 손을 들여다보며 몸 안의 마나를 끌어 올리는 것을 시도해 보았다.

손안에 물살을 만드는 간단한 마법을 발동하려 해 보았지만 몸 안에 억제기라도 있는 것처럼 아무런 마법 반응이 일지 않았다.

즉위식 이전에는 그래도 집중하면 어느 정도 간단한 마법은 쓸 수 있었는데, 확실히 즉위식 이후 새로 형성된 황성 결계의 경우 더 강력하게 마나의 흐름을 통제하고 있었다.

하여 일반인들보단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칼도 내황성에서는 무기력했다.

‘당연한 일인가.’

카밀루스는 선황조차도 괴물이라 했을 만큼 미친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렇다고 해도 8년 전엔 애송이였는데, 이제는 그를 통제할 수 있는 자가 전혀 없어 보였다.

재니스와 마리엘이 합쳐지면 어떻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말이다.

칼은 쓸모없는 짓은 그만두고 책상 앞으로 다가가 그 위에 널브러진 흰 장갑을 꼈다. 손바닥 쪽에 마법진이 미리 그려져 있는 장갑이었다.

그러고 가만히 허리춤에 걸린 검을 살짝 빼 본 순간, 밖에서 다시금 아스타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장님, 마탑주를 모셔 왔습니다.”

탁.

검신을 도로 밀어 넣은 칼이 표정을 굳혔다.

“들어와.”

문이 열리자 세 사람이 보였다. 재니스와 마리엘은 역시나 오늘도 세트처럼 붙어서 왔다. 재니스를 부르면 당연히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던 터라 칼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이 방 안에 발을 들이기 전에 칼은 문 앞으로 걸어가 인사했다.

“마탑주께서 여기까지 걸음해 주시다니, 감사드립니다.”

그러고 숙였던 허리를 펴며 케이프 후드 아래로 살며시 보이는 마리엘의 검은 목을 스치듯 확인했다.

마기에 잠식되어 온통 검어졌다는 그녀의 몸. 몇 번이나 봤음에도 멀쩡하게 사람 형상을 유지한 채 걸어 다니는 것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지만, 칼은 그런 속내를 숨기고 단정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재니스가 케이프 후드를 벗으며 얼굴을 드러내었다.

“별말씀을요. 공사 다망하신 노아 기사단의 단장께서 저희 마탑으로 찾아올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리 말하는 것치고 재니스 역시 편지를 받고서 한참 시간을 끌었다. 늘 그렇듯이 연구를 한다는 핑계로 방문을 하루이틀씩 미뤄 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칼 또한 수많은 결계에 휩싸여서 눈앞에 두고도 문 앞까지 걸어가기도 힘들다는 마탑에 굳이 찾아갈 생각은 없었기에 얌전히 기다렸다.

두 사람이 모두 안으로 들어오자 그들을 데리고 온 아스타틴은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걸었다. 순간 마리엘이 후드 아래로 그곳을 살폈다가 재니스를 따라 응접 소파에 앉았다.

음침한 색깔의 케이프를 벗어 옆에 곱게 접어 둔 재니스는 칼이 맞은편에 앉으러 걸어가는 도중 주변을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문은 잠그고 차도 안 내어 주시나요?”

질문에 칼은 걸음을 멈추고 생긋 미소 지어 보였다.

“오는 길에 태양궁에 먼저 들르셨으니 배가 부르도록 드셨을 것 같기에.”

“오라 가라 해 놓고서 이리하시는 걸 보니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시려나 봅니다?”

“아마 당신의 조수도 깜짝 놀랄 만큼요.”

소파에 앉아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은 칼이 대답하자 재니스가 벌써부터 흥미가 떨어진 얼굴로 눈썹을 까딱했다.

칼은 그런 그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마리엘을 돌아보았다.

“그대는 이름이 마리엘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후드를 뒤집어쓴 마리엘의 고개가 푹 숙어졌다. 대공을 운운하며 그 핑계로 재니스를 부른 것이었는데, 어째 아까부터 마리엘에게 관심이 더 많아 보이는 칼을 보며 재니스가 경계의 말을 흘렸다.

“아까부터 눈빛이 너무 진한 것 아닌가요, 단장님?”

설마 반하기라도 했냐고 묻는 듯한 그 말에 칼이 마리엘에게서 시선을 그만 거두었다.

“그냥 흥미로워서 들여다본 것뿐입니다. 마기에 저리 잠식됐는데 멀쩡한 인간이 흔치는 않으니.”

“마리엘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실 텐데?”

“물론 그렇지만 나도 꽤 호기심이 많은 인간이라 궁금하군요.”

“무엇이?”

질문이 되돌아온 순간 칼의 눈빛이 서늘한 색을 띠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든 힘이 본신으로 돌아갔을 때 과연 비렌시움 대공을 뛰어넘을 정도인지.”

“……!”

눈동자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게 재니스의 눈꺼풀이 확 벌어졌다. 그러더니 양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거…… 어디서 들으셨나?”

느릿한 말로 묻는 소리에 칼은 등 뒤로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아스타틴 또한 위협을 감지했는지 제 허리춤의 검을 뽑아 앉아 있는 마리엘의 목 앞에 검날을 드리웠으나 이미 방 안을 가득 채운 긴장감은 가시지 않았다. 어차피 저런 날붙이 따위는 저들에게 별 소용은 없을 테니까.

칼은 깊게 숨을 들이켠 뒤 답했다.

“내가 아는 그분께선 모르는 게 없었으니.”

“어째 말년에 노망이 났다 싶었는데…… 별말을 다 하고 갔나 보네?”

“상관 있나? 어차피 당신들의 계획은 틀어지지 않을 텐데.”

칼이 가볍게 대꾸한 뒤에 잠시 정적이 일었다. 재니스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 물었다.

“듣자 하니 좀 헷갈리는데…… 누구 편이신지?”

“비렌시움 대공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내 편지는 입으로 씹어 드셨나.”

설마 눈으로 안 봐서 내용을 모르는 거냐고 묻는 말에 재니스가 눈을 댕그랗게 뜨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따위가 대공의 뭔가를 알고 있을 리는 없을 텐데?”

“적어도 그의 존재 의의가 뭐였는지는 알고 있지.”

“그래서 그게 무슨 가치가 있는 정보인지 묻습니다?”

재니스가 그냥 죽여 버릴까 고민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그리 묻자 칼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긴장감에 흐트러지려는 숨을 시선을 마리엘에게로 향했다.

“황태후를 이용하면 당신의 목적을 좀 더 쉽게 달성할 수 있지 싶어서, 협조를 할까 싶은데.”

그러자 마리엘의 검은 손이 움칠거렸다. 곧 후드 아래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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