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92)화 (192/317)

* * * 

기, 기익…….

자정에 가까운 새벽녘, 곁문이 열리는 소리가 작고 느리게 일었다.

몸이 잠깐 회복되자 에렌스트 경과 함께 밤이슬을 맞고 돌아온 이온이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고 정원에서 2층으로 곧장 이어지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데 앞서 걷던 에렌스트 경이 이온의 방 문 앞에 서 있는 사람 실루엣을 보고 기다리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발을 멈춰 세운 이온이 그를 올려다보며 입으로만 물었다.

‘누구?’

에렌스트 경이 몸을 낮추어 귀에 속삭였다.

“대공의 부관입니다. 페드로 경.”

페드로가 갑자기 새벽에 제 방 앞에 대기하고 있다니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이온은 호기심을 억누르고 계단을 도로 내려가자고 눈짓했다.

저택 별관으로 가 본래는 목욕탕에 오갈 때 쓰는 그곳의 작은 드레스룸에서 잠옷으로 갈아입고서 다시 제 방으로 향했다.

벽에 기대어 무표정하게 눈만 깜빡이고 있는 페드로를 발견한 이온은 멈칫하고 에렌스트 경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도 저 상태였냐고 눈으로 묻는 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엔 다정한 아저씨의 표본처럼 기본적으로 웃음을 달고 다니는 페드로가 저렇게 멀리서 보기에도 안 좋은 기운을 풍긴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약간 긴장해 버린 이온이 흠, 흠, 하고 일부러 목을 가다듬어 기척을 낸 뒤 목소리를 냈다.

“페드로? 이 시간에 제 방은 무슨 일이에요?”

그러면서 여유를 가장해 문 앞으로 걸어가는데 페드로가 얼른 그의 쪽을 돌아보며 허리를 숙였다.

“소공작, 안에 계시는 게 아니었군요.”

작고 기운 없는 목소리. 그런 페드로의 모습이 꽤 낯설었다. 새벽녘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와는 분명 달랐다.

혹시 카밀루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서둘러 채근하고 싶은 제 마음을 억누르며 이온이 거짓 변명을 입에 올렸다.

“도서관에서 책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페드로가 기다리는 걸 알았으면 일찍 돌아왔을 텐데.”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만.”

부탁이라니, 이 새벽에?

그런 생각이 든 건 비단 이온만이 아니었을 터였다. 순간 에렌스트 경과 눈이 마주쳤다.

이온은 제 방의 문을 스스로 열며 페드로에게 안쪽을 손짓해 보였다.

“일단 들어오세요.”

그렇지만 페드로가 짧게 사양했다.

“아닙니다. 그리 길게 이야기할 일은 아닌 터라.”

거절에 민망해진 이온이 “아, 네…….” 하며 페드로의 뒷말을 기다렸다. 빤한 시선을 받은 페드로가 머뭇거리며 예의 부탁이라는 것을 순순히 털어놨다.

“이 새벽에 실례인 것은 압니다만, 혹시 대공 전하께서 머무는 방의 열쇠가 따로 있을까요?”

긴장하면서 첫마디를 기다리던 이온은 그 말을 듣고는 약간 안심했다.

“아, 사람이 없는데 문이 안에서 잠기기라도 했나요? 열쇠는 당직인 하인들이 있을 테니까 그들에게 물으면 될 텐데…….”

열쇠가 없어서 카밀루스가 그의 방에서 자고 있기라도 한 걸까. 물론 그 경우라면 페드로가 이 새벽에 제 방 앞에서 죽치고 있는 이유로는 좀 빈약해 보이긴 했지만, 가장 현실성 있는 얘기다.

이온은 괜히 제가 먼저 당직 하인을 찾기 위해서 복도를 두리번거리다가 발을 옮겼다. 페드로는 그의 뒤를 바짝 따라오며 한마디 덧붙였다.

“아니요, 대공께서 안에 계시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대답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 이온은 걸음을 멈칫했다. 머리로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가슴이 먼저 서늘하게 식어 버렸다.

본능적인 불안감이 몰려온 것이었다.

“무슨 뜻이에요, 그게?”

“제가 대공꼐서 맡기신 일을 보느라 자정이 넘어서 저택에 돌아왔는데, 보고하러 갔다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죄송합니다, 소공작. 이 엄격한 저택에서 그런 짓을 하다니 역시 무례한 일이었습니다만, 발코니를 통해서 대공께서 머무는 방의 창문도 두드려 봤는데 전부 다 잠겨 있는 데다가 안쪽도 들여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

그래서 페드로가 하고 싶은 말이 결국 뭔가.

이온이 의문 어린 눈으로 보고 있자 페드로가 입술을 지분거리다가 제 결론을 말했다.

“안에서 정신을 잃으신 게 아닐까 추측합니다.”

“……미리 모든 문을 엄폐해 놓고요?”

“…….”

이온의 의문 제기에 페드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온이 다시금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걸음에 다급함이 배었다. 복도 귀퉁이를 돌고 나서야 겨우 하인 하나를 발견한 이온이 멀리서 상대를 불렀다.

“거기.”

“예, 도련님.”

이온의 부름에 하인이 앞으로 달려왔다. 이온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불길한 그림을 애써 지워 내면서 물었다.

“열쇠 꾸러미 가지고 있나? 아니, 아니, 대공께서 머무는 방의 열쇠를 가지고 있어?”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 내뱉었다 보니 말이 꼬였다. 한데 물음을 들은 하인은 난처해하며 답했다.

“열쇠는 각 방 청소 담당 하녀들이 가지고 있을 텐데요, 도련님…….”

“그럼 그 하녀를 찾아서 열쇠를 받아 와. 빨리, 급해.”

예의 하녀가 누군지는 몰라도 청소 담당이 이 새벽까지 깨어 있을 리는 없었으므로 분명 깊은 잠을 깨우게 될 터였다.

제 명령의 부당함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이온의 다급함을 눈치챘는지 다행히 하인은 별다른 말 없이 재빨리 하인들이 숙식하는 위층으로 향했다.

이온은 기다리는 동안 페드로를 마주했다.

페드로가 카밀루스의 일이라면 얼마나 헌신적으로 챙기는지, 그리고 카밀루스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그가 새벽에 따로 난리를 피우지 않고 이온의 방 앞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엄청난 인내심의 결과일 터였다.

낯빛이 썩 좋지 못한 페드로의 얼굴을 보고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으니, 그가 문득 물어 왔다.

“소공작께서는 짐작되시는 일 없으십니까?”

“네?”

그리고 이온은 그 질문 자체가 당혹스러워 멍하니 반문했다. 제가 뭔가 알고 있으면 지금 이러고 있을까? 그런 의문을 떠올리고 있는데 페드로는 오해하지 말라는 양 고개를 가로저으며 설명을 더했다.

“저는 짐작되는 일이 전혀 없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대공께서 절 따돌리려고 일을 시키신 거 같습니다.”

“아…… 저도 딱히 생각나는 건.”

없다.

무심코 그렇게 받아넘기려던 이온은 문득 그 전에 방에서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가 문장을 채 다 잇지 못하고 묘한 표정을 짓고 있자, 페드로가 얼른 캐물었다.

“소공작, 짚이는 바가 있으신 겁니까?”

그에 이온이 흠칫하며 오른손으로 제 목 부근을 꾹 누르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에렌스트 경이 팔을 둘 사이에 껴 넣으며 페드로와 이온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

“경, 죄송합니다만 거리를 유지해 주시는 게 좋겠군요.”

“아니야. 괜찮아, 알렉…….”

이온이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에렌스트 경을 만류했다. 에렌스트 경은 이온의 상태가 별로 안 좋은 것에 불만이 있는 듯했으나 그게 페드로 때문은 분명 아니었다.

목 주위를 누른 손바닥 아래에서 유난히 선명하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돌의 감촉. 마나석의 존재를 인식하며 이온이 불안감에 휩싸였다.

‘설마, 아니지?’

속으로 그런 질문을 했지만 자꾸만 머릿속에 카밀루스가 스치듯이 했던 말이 맴돌았다.

〈이것도 이젠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모양이군.〉

불만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던 목소리.

그렇지만 마나석을 다시 만들려고 한다니, 너무 말이 안 되는 일이라 그런 일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페드로도 따돌려 놓고서 문을 다 닫아 놓고는 대답도 하지 않는다니……. 페드로의 말처럼 정신을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정신을 왜 잃었는지 생각해 보다 보면 혹시 그런 짓을 한 게 아닐까 하는 불길한 방향으로 생각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이온은 애써 가능성을 부정하며 도리질을 했다.

“아니. 잘 모르겠어요, 페드로.”

“그렇습니까…….”

페드로의 실망한 목소리를 들었으나 이온은 더 이상의 말을 이어 가지 않았다. 대신 초조하게 하인을 기다렸다.

다행히 얼마 안 가 하인이 열쇠를 가져왔다.

카밀루스의 방 앞에 선 이온은 잠깐 머뭇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방인데 열어도 되는 걸까. 이랬다가 사실은 별일이 아니면 어쩌지. 그런 생각 때문에 주저하는 걸 알아챈 페드로가 옆에서 그를 재촉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열어 주십시오, 소공작.”

“아, 네…….”

사실 열고 싶은 마음, 안 열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차라리 그가 아침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밖에 나오면 그만인 문제 아닌가.

하지만 이 안에서 제가 원치 않는 광경을 보게 된다면…….

그러나 페드로의 말대로 창문까지 잠겼다면 확실히 심상치 않은 징후이긴 한 탓에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이온의 목울대가 크게 한번 울렁였다.

달칵, 잠금장치가 밀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페드로가 실례하겠다는 말과 함께 제 손으로 문을 벌컥 열었다.

그에 이온이 한 걸음 물러나는데,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간 페드로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

순간 이온의 가슴이 철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