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은 왜 숨을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짐이 되어야 하는지.
그야말로 지긋지긋했다.
대체 언제쯤 자신은 그에게 민폐가 아닌 존재에서 탈피할 수 있을까. 가족들을 비롯한 이온의 주변 사람들은 저주가 끝나면 건강해질 거라고 말하고는 했다.
그러나 과연 저주가 끝나면 그렇게 되는 게 맞는 걸까.
‘아닐 것 같아…….’
부정적 생각이 자꾸만 치솟았다. 이온은 제 두 무릎을 모아 두 팔로 껴안았다. 그 위에 제 머리를 기대니 그곳이 금세 축축해졌다. 이번엔 아버지의 목소리가 뇌리에 맴돌았다.
<어차피 그놈이 정녕 황제가 되면 황후도 들여야 할 텐데, 그 꼴을 옆에서 지켜보려고 그러는 게냐. 설마 네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리란 헛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 테고.>
사실 이온은 황후가 되는 헛꿈이라도 꾸고 싶었다.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는데 나는 왜 안 되지? 그런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안 되는 게 맞는다. 카밀루스는 제 옆에만 있으면 너무 극단적인 사람이 됐다. 스스로의 몸을 해해서라도 남을 지키려고 하는 건 분명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 위해를 가하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좋아해도, 아니 카밀루스를 좋아하기 때문에 제가 그의 곁에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역시 잘한 짓이었다. 공작에게 공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 건.
하지만 공작의 말은 틀렸다.
<이 아비는 카밀루스, 그놈이 네 인생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걸림돌은 카밀루스가 아니었다. 이온 크레이거가 그의 걸림돌이었다.
매번 그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나약한 자신이.
이온의 입술 사이로 파고든 뜨거운 액체가 혀 위에 진한 짠맛을 남겼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이 기회에 그를 밀어내야 할까.
하지만 그러면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일이 다 틀어져 버린다. 저와의 관계가 그렇게 되면 카밀루스 역시 전부 놔 버릴 확률도 없지 않았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됐다.
이온은 눈을 꽉 감으며 결심했다.
‘나만 견디면 돼.’
나중에 헤어지고 마음이 아프더라도 그건 어차피 제 몫이었다. 그리고 마음의 고통이 죽음을 부르진 않는다…….
손으로 눈가의 눈물을 닦는데,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흡, 흑…….”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데도 결국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러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딸꾹질이 나왔다.
이온은 그에 비틀비틀 일어나 가슴을 두드리며 침대로 걸어갔다. 그 위에 누운 이온이 이불로 제 입을 막고 몸을 웅크렸다.
아침까지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 * *
이온이 손을 뿌리치고 나간 후 카밀루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안 하고 있었다. 페드로는 그런 그를 아무런 말 없이 지켜보았다. 위로의 말도, 꾸짖음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다만 제 품 안에서 잠든 욤뇽이의 등만 규칙적으로 토닥여 주는 중이었다.
긴 침묵이 지루하다 싶을 만큼, 혹은 그것 때문에 숨이 막힌다 싶을 만큼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카밀루스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당신도 그만 나가지 그래.”
그러자 페드로가 일침을 놓았다.
“꼴사납습니다, 대공.”
카밀루스가 눈을 들어 제 부관을 노려보았다. 지금껏 긴 시간 함께해 왔지만 페드로에게 화가 났던 적은 무척 드문데, 지금이 바로 그 드문 경우였다.
그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말이 터져나왔다.
“대체 왜 이래? 왜, 왜, 왜!”
“…….”
아니, 사실은 더 치밀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신경질일지도 몰랐다.
조금 히스테릭하기까지 한 반응에 페드로가 드물게 미간을 일그러뜨렸지만 카밀루스는 말을 멈추지 못했다.
“내가 안 이러면 미칠 것 같다잖아. 그럼 그냥 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거야? 아니, 그보다 꼭 그런 식으로 이온한테 알려야 했어?”
“대공.”
한숨 소리를 담아 그만하라는 의미로 페드로가 그를 불렀지만 그것만으로 카밀루스를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카밀루스는 한술 더 떠서 답답하다는 양 제 가슴을 두드렸다.
“내가 괜찮다잖아…….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못 견딜 것 같다고.”
“그거 병입니다.”
페드로가 단호하게 한마디로 정리하자 카밀루스의 파란 눈이 더욱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이번엔 페드로도 지지 않겠다는 양 카밀루스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기실 병이라는 페드로의 진단은 그렇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카밀루스도 제가 지나친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못 견디겠는 이유는, 매 순간 이온의 상태가 어떤지 너무 선명하게 알게 되어 버려서였다.
죽어 가면 죽어 가는 대로, 생기가 돌면 생기가 도는 대로. 그 모든 걸 수치로 보고 있으니, 솔직히 말하면 카밀루스도 미쳐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잘못에 따른 벌이기도 했다. 이온을 지키는 건 지금 제 존재 의의였고.
그러나 그 모든 걸 알거나 이해하지 못할 페드로는 카밀루스의 행동을 폄훼했다.
“사랑을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요.”
아마도 사랑이 아니라 다른 감정에서 말미암은 것일 터라고.
페드로의 눈에도 설마 제가 이온한테 사랑이 아닌 죄책감 때문에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카밀루스는 눈앞이 좀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그가 웃음소리도 한숨 소리도 아닌 그 중간의 어떤 감탄사를 내었다.
“하,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이온이 죽을 때까지 손 놓고 가만히 있을까?”
“이미 충분히!”
페드로가 벼락같이 소리치다가, 품의 아기 드래곤이 퍼뜩 깨어나자 옆의 협탁 위에다 내려놓았다.
두어 번 쓰다듬어 도로 드래곤을 재운 페드로는 카밀루스가 앉아 있는 침대 바로 앞까지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카밀루스를 질책했다.
“이미 충분히 다 하고 있잖아. 근데 대체 왜, 어째서 이렇게 위험한 방법까지 써야 하는데. 어? 저 도련님이 그렇게 해 달라고 했어? 그것도 아니잖아.”
“…….”
페드로의 지적에 카밀루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나한테 안 들켰으면 평생 반성 안 했을 거지, 너.〉
실제로 그 말 뒤에 제 뺨에 날아온 이온의 손이 제법 매서웠었다.
어금니를 꽉 맞물리자 아직도 그 열기가 살짝 남아 있는 볼에 힘이 들어가면서 약간의 화끈거림이 느껴졌다.
아마 페드로는 이온의 그 태도를 보면서 꽤나 큰 통쾌함을 얻었을 터였다. 제 대신 뺨을 갈겨 준 것에 속으로 잘한다고 응원을 했을지도.
그리고 그쯤 됐으면 카밀루스가 그만 정신을 차렸기를 바랐을 터였다. 하지만 아직 변화가 없는 것에 그는 답답해 하는 중이었다.
“너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온 나는, 널 따르는 사람들은 생각 안 해? 이온 크레이거가 진짜로 네 세상의 전부야?”
“……어차피 난 이딴 걸로 안 죽어.”
그리고 여전히 반성을 모르는 카밀루스가 동문서답을 하며 딴소리를 입에 얹자 페드로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말이 안 통하는 것에 질렸다는 눈빛을 보내자, 카밀루스는 이 사태의 원흉인 마나석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처음 만드는 건데 다행히 잘 정제가 됐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전보다 더 강한 마나석이 만들어진 터였다. 잠시 손이 닿을 때마다 깊은 마나를 뿜어낸다는 증거로 파란 연기마저 흘려보내고 있었다.
“꾸우…….”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마나의 기운이라도 느낀 것일까. 금세 잠든 새끼 드래곤 녀석이 옹알이를 했다.
결국 피를 너무 과다하게 흘려 정신을 잃을 뻔한 카밀루스에게 제 마나를 뭉친 구슬을 먹인 욤뇽이는 도로 좀 작아졌다.
그게 트라우마가 되어 꿈속에서까지 마나를 뺏기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녀석이 입술을 우물거리다 인상 쓰는 것이 보였다.
카밀루스는 그것을 보다가 문득 제 눈앞에 흐르는 텍스트에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현재 ‘이온 크레이거’가 사망할 확률은 22…….]
낮에 제 힘을 쏟아부어서 겨우 19퍼센트 선까지 낮춰 두었던 이온의 사망 확률 수치가 다시 치솟는 중이었다.
[23……]
[25]
[……32]
그 숫자까지 본 카밀루스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몸을 일으키는 것에 페드로가 물었다.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런 대답이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하면서.
“대공, 또 뭐 하시려고요?”
물론 그의 추측 혹은 바람은 곧바로 엇나가 버렸다.
“……이온, 이온을 보러 가야겠어.”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지금?”
가 봤자 반길 것 같냐는 의문도 함께 들어 있는 질문이었으나 카밀루스는 별다른 대꾸도 없이 그를 스쳐 갔다.
“대공!”
페드로가 손을 뻗어서 만류하려 했으나, 그 손 자체를 피해 버린 카밀루스였다. 대신 서둘러 방문을 열고 뛰어 나갔다.
[현재 ‘이온 크레이거’가 사망할 확률은 34%입니다.]
완성된 메시지를 보고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