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밖으로 나간 그가 처음 만난 건 이온이 아니었다. 그의 방 안으로 쳐들어가기 전에 에렌스트 경이 카밀루스의 앞을 막은 것이었다.
카밀루스는 방벽처럼 제 앞에 선 그에게 재빨리 한마디 건넸다.
“이온은 방에 있나?”
“그렇긴 합니다만…… 지금은 도련님을 방해하지 않으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방해.
그 단어를 듣자마자 카밀루스는 한순간에 기분이 더러워지고 말았다. 제가 이온에게 방해가 된다니. 제 자존심까지 상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기도 해서 차마 발끈하거나 하는 꼴불견인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문제는 이온이 지금 다시 아프다는 거였다. 연약한 제 연인은 스트레스를 조금만 받아도 심하게 괴로워했다.
카밀루스도 그 원흉이 저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그래도 그런 이온을 방치할 수가 없었다.
이전에도 비슷하게 수치가 치솟은 적이 있었다. 잠결에 깨서 옆자리가 빈 것을 보고 멍하니 있다가, 순식간에 숫자가 올라가는 걸 보고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어디 갔느냐고 이리저리 물어서 찾아갔던 터였다. 그랬더니 목욕탕에서 다 젖어 가지고는 코피를 흘리면서 몸을 덜덜 떨고 있지 않았던가.
가슴 철렁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카밀루스는 에렌스트 경에게 말했다.
“소공작과 할 말이 있다.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으니 그냥 비켜 줬으면 하는데.”
“아침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때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새벽에 제 주인을 괴롭히지 말라고 항변하는 에렌스트 경이었다. 카밀루스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채고는, 무례하지만 그대로 옆을 지나쳐 이온의 방문을 직접 두드렸다.
“이온, 이온?”
그러자 이번엔 금세 카밀루스를 따라 나와 옆으로 온 페드로가 만류의 의미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방에서는 엄격하게 타이르던 것과 달리 에렌스트 경의 앞이라서 그런지 페드로는 제법 간절한 어조로 카밀루스에게 속삭였다.
“대공, 자중하시지요. 그만 돌아가서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어차피 나오지도 않을 건데 뭐 하러 계속 이러느냐는 의미도 포함된 말이었다, 그건.
카밀루스도 이 문이 결코 순순히 열리지 않으리라는 건 알았다. 알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래야만 했다.
“이온…… 문 좀 열어 줘. 지금 너 아프잖아, 응? 아직 자고 있는 거 아니지?”
얼굴을 마주하면 또 뺨을 맞을지도 모른다. 혹은 가슴을 할퀴는 독한 말을 들을 것도 같았다.
어쩌면, 그만하자고 할지도……. 이제 이 저택에서 나가 버리라면서 욕을 갈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온은 그만큼 저 때문에, 특히 제 지병 때문에 카밀루스가 손해를 감수하는 걸 못 견뎌 했다. 아프다는 이유로 약자가 되는 자신의 모습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제가 그걸 자극한 거다. 이럴 줄 알고 비밀로 하려 했던 건데, 완전히 망해 버렸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을 감수하더라도 지금 상황을 넘길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딸랑, 하고 안쪽에서 선명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
듣고서 얼른 에렌스트 경을 돌아보니, 그가 조금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온이 종을 친 이유를 잘 알 텐데 선뜻 움직이지 못하는 그에게 카밀루스가 채근하는 말을 건넸다.
“문 안 여나?”
그에 에렌스트 경에 한숨을 내쉬더니 복도 한편에 대기하고 있는 하인에게서 열쇠를 얻어 왔다.
짧은 기다림인데도 초조했던 카밀루스는 문이 열리자마자 안쪽으로 들어갔고, 따라오고 싶어 하는 에렌스트 경의 기색을 모르는 척 문을 먼저 닫아 버렸다.
그리고 곧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는 건 아닌가 싶게 침대 한쪽에 치우쳐서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는 이온에게로 서둘러 다가갔다.
급하게 침대 옆에 한쪽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춘 카밀루스가 이온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이온, 괜찮아?”
“…….”
머리카락이 식은땀에 잔뜩 젖어 있었다. 카밀루스는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넘겨 주며 이온의 동그란 이마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아직 종을 잡고 있는 이온의 작은 손에서 그것을 빼내고, 대신 제 손을 겹쳐 깍지를 꼈다.
그렇지만 지금은 저도 이것 외에는 많은 걸 해 줄 수가 없었다. 몸에서 피와 함께 마나를 거의 한계치까지 뽑아낸 게 방금 전이었다. 몸을 움직이고는 있지만 속이 엉망이라 마나 운용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마법을 잘못 쓰면 리바운드를 겪을 수 있다.
한데 이온도 손을 잡아 놓고는 딱히 후속 조치가 없는 것에서 이상함을 느꼈는지 나직하게 물어 왔다.
“지금은 마법 못 써?”
“……미안.”
하, 하고 기운 없는 탄식 소리가 이온의 입에서 빠져나왔다.
“언제 다 회복되는데?”
“잘 먹고 잘 쉬면 하루 정도.”
사실 이틀하고 반나절 정도이지만 줄여 말했다. 카밀루스도 기왕이면 덜 혼나고 싶었다.
한데 이온이 카밀루스의 손을 마주 잡아 오더니 한마디 했다.
“앞으로 절대 그러지 마.”
“용서해 주는 거야?”
“용서? 넌 어차피 반성도 안 하잖아.”
“반성은 해, 후회를 안 하는 거지.”
“하…….”
입만 살아서 잘도 떠든다는 의미가 담긴 한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에 카밀루스가 그에게로 더욱 몸을 기울였다.
그렇게 얼굴이 가까워지자 이온이 먼저 카밀루스에게로 입술을 닿아 왔다.
부드러운 감촉이 제 아랫입술을 감싸고, 이내 빨아들이자 카밀루스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이온이 먼저 입을 벌려 저를 맞이하려는 것에, 카밀루스는 단숨에 이끌려 그와 입술을 맞물렸다.
하아, 하…….
병색이 가득한 이온의 갈급한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그에 카밀루스는 차마 심하게 밀어붙이지는 못하고 다정히 그의 혀를 감싸 달랬다.
마른 입 안을 제 침으로 적시고, 천천히 안쪽을 애무해 주자 이온이 제 혀도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호응해 왔다.
그에 카밀루스는 문득 의문을 느꼈다.
‘왜 이렇게 쉽게 풀리지?’
더 많이 화낼 줄 알았다. 사실 방에 계속 안 들여보내 주면 아침까지 밖에서 무릎 꿇고라도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순순히 들여보내 주었을 뿐 아니라 먼저 키스까지 해 오다니.
이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런 최상의 시나리오는 머릿속에서 그려 보지 않았기에, 조금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분위기에 맞지 않는 그 생각은, 곧 이온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끌어당기기까지 하자 날아가 버렸다. 그대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더 깊은 입맞춤을 나누던 카밀루스는 입술을 떼고 나른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이온을 내려다보았다.
“이온……?”
“너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려.”
행동은 아니더라도 입에서 나오는 말만큼은 카밀루스의 예상 범위였던 터라, 이상하게도 좀 안심이 되었다.
“넌 대체 언제까지 나한테 퍼 주기만 할 거야?”
“기한 없어.”
“카밀루스, 넌 진짜…….”
이온이 짜증 어린 음성으로 그리 투덜거렸지만 카밀루스는 대답을 회피했다. 이온이 입고 있는 잠옷 목깃을 살짝 벌려서 제가 이전에 주었던 마나석 목걸이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온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역시나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의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는 게 무언의 허락임을 안 카밀루스는 이온이 목걸이를 풀었다. 그리고 줄에 새로운 마나석을 껴 넣고 다시 걸어 주었다.
[‘이온 크레이거’의 사망 확률을 조정 중…….]
예상치는 기존의 수치의 15퍼센트가 하락하는 것이었다. 다시 30퍼센트 이하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을 터였다.
일단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카밀루스는 이온의 손을 다시 붙잡고 그곳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네가 아픈 걸 그냥 두고볼 수가 없어. 차라리 나한테 죽으라고 해. 그게 덜 괴로울 테니까.”
특히나 저를 둘러싼 시스템이 시시각각으로 실시간으로 이온의 사망 확률을 알려 주는 미친 짓을 끝내지 않는 한 더 그러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확률이라니. 그걸 보고서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 반응은 카밀루스가 특별한 게 아니었다. 그저 제게 내린 이 형벌이 너무나 지독한 것일 뿐…….
이온이 그런 카밀루스를 올려다보며 재차 물었다.
“그럼 진짜로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야? 후회는 안 해도 반성은 한다면서?”
“……자제하도록 노력할게.”
어차피 앞으로 마나석을 만드는 상황보다 더한 짓을 할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저주 건 놈을 찾아 죽이는 과정에서 큰일이 나는 것 외에는.
그렇게 생각하며 카밀루스가 작게 미소하자 이온은 못마땅해하는 듯 미간을 슬쩍 좁혔다가 이내 손을 놓고 돌아누웠다. 그만 나가라는 의미 같았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우물쭈물하다가 이온의 유해진 분위기에 용기를 얻어, 그가 돌아누운 방향으로 하여 침대에 기어 올라갔다. 그러고 모로 누워 이온을 마주하자 이온의 눈이 새침하게 치켜졌다.
“뭐야? 안 나가?”
“안 나가.”
곧장 대꾸한 카밀루스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제가 생각해도 좀 빈약한 변명을 주워섬겼다.
“나 하루 동안 잘 먹고 잘 쉬어야 한다니까.”
“그래서?”
그게 내 침대에 기어 올라온 거랑 무슨 상관이냐는 이온의 반문에 카밀루스가 아직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루 동안만 네 방에서 먹고 잘래.”
“……장난해? 그리고 그 어린애 같은 말투는 뭐야?”
귀여워 보여야 쫓겨날 확률이 덜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런 콘셉트를 잡은 건데 핀트가 엇나간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카밀루스는 콘셉트 유지를 위해 이온의 늘어진 팔을 제 어깨 위에 올리고 그의 품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자는 동안만이라도 나 애착 인형 취급해 줘, 이온.”
물론 그랬다가 분노한 이온이 휘두른 베개에 퍽, 하고 머리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