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01)화 (201/317)

* * * 

없었다.

두어 시간 동안 서재를 뒤져 성전과 관련된 책이 몇몇 개 발견하긴 했지만, 대부분 민간에서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내용만 담고 있을 뿐 유의미한 자료가 딱히 보이지 않았다.

거의 버려진 황도의 저택이라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사실 애초부터 그렇게 걸출한 자료가 나올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기는 했었다. 다만 미아블레 가문의 영지까지 찾아가기는 어려운 상황이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곳에 온 것일 뿐이다.

페드로와 에렌스트 경이 빼냈던 책들을 순서대로 다시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헛다리를 짚었다는 생각에 이온이 허무해진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었을 무렵이었다. 카밀루스가 이온을 도닥도닥 달랬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드래곤 녀석이 준 구슬도 있으니까.”

“뀨?”

서재의 책상 위에서 졸고 있던 욤뇽이가 제 주인의 지적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에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었던 이온이 그런 녀석을 데려와 제 무릎 위에 올리고, 말랑한 살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일단 마음껏 확인은 했으니 됐어.”

그러자 에렌스트 경이 다가와 이야기했다.

“정리 다 됐습니다.”

이온이 욤뇽이를 품에 챙기고 먼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왠지 마음이 좀 찝찝해 서재를 다시 한번 빙 둘러본 이온이었다.

말로는 됐다고 하면서도 미련이 남아 있는 듯 보이는 이온의 모습에, 옆에서 지켜보던 카밀밀루스가 에렌스트 경에게 저택의 지도를 건네받아 잠시 들여다보았다.

후작의 방, 후작 부인의 방, 서재.

뒤진 곳은 총 세 곳이다. 핵심적인 곳을 살핀 것이긴 하지만 저택이 그리 좁은 편은 아닌 터라 아주 일부만 살폈다고 볼 수도 있다.

저택이 주인이 평소 드나들 만한 곳은 이외에도 꽤 많았다. 드레스룸, 응접실, 식당 등…….

“전 후작이 과시욕이 좀 있는 사람이었으면 응접실에 뭔가 뒀을지도 모르긴 하겠지.”

카밀루스의 중얼거림에 이온이 옆에서 같이 저택 지도를 슬쩍 보았다.

“그렇게 따지면 드레스룸 서랍도 뒤지긴 해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야. 날이 밝기까지 시간도 있으니 잠깐 들렀다 가는 게 어때?”

이온은 약간 지치는 기분이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카밀루스의 말대로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먼저 좀 더 가능성 높아 보이는 응접실 쪽으로 향했다. 서재 북쪽, 응접실 남쪽. 저택 구조상으로 둘은 거의 정반대에 위치해 있었다.

복도에 수면 마법을 뿌려 놨다고 하지만 방 안의 사람들까지 잠들게 한 건 아닌 터라 네 사람은 발소리를 내지 않고 조심조심 한 줄로 이동했다.

그러고 응접실 문을 열고 카밀루스가 그곳에 빛을 비추는 순간, 이온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낼 뻔했다.

최근 몇 년간 황도의 저택에는 거의 오지 않은 것치고 응접실의 상태가 꽤 멀쩡했다. 아니, 사실 멀쩡한 게 문제는 아니다. 어차피 다 고용인들이 관리하는 것일 테니.

그보다 열자마자 보이는 초상화와 눈이 마주쳐 깜짝 놀란 이온이 한 걸음 물러나자 카밀루스가 넘어질세라 뒤에서 그를 잡아 주었다.

이온은 어깨에 카밀루스의 손이 올라오자마자 탄식했다.

“응접실에 저런 걸 걸어 놓다니 미의식이 의심되는데……?”

그에 카밀루스가 작게 웃었다.

“낮에 보면 또 괜찮을지도.”

과연 그럴까, 의심하면서 이온이 먼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응접실의 풍경이야 다른 저택과 크게 다른 바가 없었다.

손님들이 드나드는 공간이라 과시용으로 가져다둔 듯한 색이 독특하고 화려한 가구들, 아마 제 손으로 펼친 적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지식욕이 있다고 자랑하는 듯 꽂아 둔 책들, 그리고 창 밑의 넓은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진귀한 장식품까지.

이온은 먼지 한 톨 앉지 않게 잘 관리된 장식품들을 보면서 눈썹을 슥 올렸다. 장인이 불어서 만든 것 같은 유리 꽃병도, 손으로 무늬를 일일이 그려 넣은 듯 화려한 찻잔 세트도 가치 있는 것들로 보였지만 그보다 투명한 유리 상자에 넣어 둔, 너비가 손바닥만 한 정도의 작은 왕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왕관…….”

황제보다는 황후에게 더 어울릴 만한 왕관이었다. 꽃의 중앙 장식에 풀잎을 형상화한 듯한 모양으로 주변의 패턴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 위에 동그랗게 박힌 건 하늘색 보석. 밤에 더 빛이 난다는 아쿠아마린이었다.

그 명성에 걸맞게 카밀루스가 마법으로 밝힌 작은 빛을 반사해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자 이온의 품에 숨어 있던 욤뇽이가 어느새 쏙 나와 같이 구경했다. 욤뇽이의 커다란 물빛 보석안에 왕관이 비쳤다.

“꾸우…….”

이 녀석도 왕관의 화려함에 매료된 걸까.

이온은 이러다 제 품에서 빠져나갈 것 같은 욤뇽이를 추슬러 안으며 카밀루스를 돌아보았다.

“이거 묘하게 미아블레 가문의 레갈리아랑 한쌍처럼 보이지 않아?”

일단 똑같이 파란색 보석이 박혔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황제의 레갈리아와 똑같이 생겼지만 황제의 레갈리아는 박힌 보석이 여러 개라고 해도 빨간색이 주조다. 가까이서 보면 알록달록했지만 멀리서 보면 전체적으로 빨간색으로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대조되는 그 레갈리아는 여성의 것으로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카밀루스는 이온의 추측에 바로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기엔 레갈리아가 너무 작은데? 네 말에 의하면 그림에 그려진 게 실제 크기였다며.”

“……그건 그렇네.”

그림 속 레갈리아의 길이는 역시나 이온의 손바닥 지름만 했다. 일반적인 레갈리아의 길이를 생각하면 서너 배 정도 길어져야 한다. 반면 왕관은 1.5배에서 두 배 사이로만 커져도 충분할 것 같았다.

한마디로 비례가 안 맞는다.

그렇지만 냉정한 지적으로 이온을 실망시켰던 카밀루스가 그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안쪽을 유심히 살폈다.

“그렇지만 모양만 보면 한쌍이 맞는 거 같기는 하군.”

“역시 그렇지?”

카밀루스는 왕관을 들여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미아블레 가문은 제국 초기엔 성전의 지기이기도 했지만 유명한 물 속성의 마법사 가문이었다고 하더군.”

그 말에 이온은 머릿속으로 그가 이전에 썼던 마법들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버니언은 화염 계열의 마법을 썼던 것 같은데, 카밀루스는 물 속성인 것 같았다.

그런 것도 집안의 영향이 있는 건가? 마법에 대해 깊이 있는 지식이 있는 건 아니다 보니 그의 발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좀 모호했다.

다행히 카밀루스가 곧 한마디를 덧붙였다.

“두 가지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왜 하필 미아블레 가문이 블랑셰를 섬겼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면 말이야.”

솔직히 블랑셰는 제국의 건국 신화에서나 등장하는 전설의 동물인 터라 무슨 이야기를 해도 딱히 와닿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미아블레 가문은 오브라이언 제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가문은 아니었어. 제국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서쪽의 작은 왕국에서 명맥을 이어 왔던 이들이라고 하더군..”

“미아블레 가문에 대해서 많이 알아봤나 보네?”

“……어쩌다 보니.”

카밀루스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어쩌다 보니일 리 없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말미암아 미아블레 가문에 대해 유심히 알아봤을 것이 명백했다.

다만 그 사실이 지금 이 자리에서 유효한 무언가일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이온은 이내 카밀루스에게 결론을 재촉했다.

“근데 그럼 거기서 더 이어 갈 수 있는 진실이 뭐란 거야?”

“블랑셰는 본래는 제국과 상관없는 외부의 존재라는 것. 어쩌면 미아블레 가문의 성수(聖獸)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럼 미아블레가가 겨우 후의 작위밖에 못 받은 게 이해가 안 되는 일인데.”

블랑셰는 제국의 건국을 도왔다는 전설의 동물이다. 카밀루스의 말대로라면 황위 계승권을 가져도 모자람이 없는 공이 아닌가.

하지만 카밀루스의 의견은 달랐다.

“전설은 전설에 불과한 것이니까. 현실의 색을 입히면 더는 아무도 섬기지 않게 될 테지.”

“…….”

“잠시 실례, 이온.”

카밀루스가 불쑥 덧붙여 오는 말에 이온이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이온이 서 있던 자리에 선 카밀루스가 작은 왕관이 든 유리 상자를 열었다.

곧 그가 왕관을 꺼내 이리저리 유심히 살피며 이온이 놀랄 만한 발언을 했다.

“이걸 가져가야겠어.”

“설마 도둑질을 하겠다고?”

이온의 눈과 입이 크게 벌어졌다. 카밀루스는 그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게 정말로 그것과 한 쌍이라면…… 그 정도로 가치가 있다면 말이야. 이걸 훔쳐야 미아블레 후작이 황도로 알아서 걸어오지 않겠나?”

어쩌면 레갈리아까지 가지고서.

카밀루스의 대담한 계획에 이온은 숨을 삼켰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제 행동에 문제가 없다는 양 아주 태연했다.

“책 같은 걸 뒤지는 것보다 그게 훨씬 더 효율적이지.”

“미아블레 가문의 영지에서부터 황도까지는…… 시간이 꽤 걸리지 않아?”

“그래 봤자 일주일 정도야.”

미아블레 가문의 영지는 실제로 황도에서 그렇게 많이 떨어져 있지는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후작가에 침입한 좀도둑이 되어 버렸다.

다음 날 느지막한 시간부터 황도, 그중에서도 가장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거리에 도둑을 잡아 달라는 미아블레 가문의 간절한 호소문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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