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02)화 (202/317)

* * * 

다음 날 저녁, 심드렁한 눈으로 미아블레가의 호소문을 보던 이온은 마지막 마침표를 보자마자 작게 웃어 보였다.

“카밀루스가 맞았네. 가문의 보물이라고 하는 걸 보면…….”

호소문의 요지는 간단했다.

지난 저녁에 누군가 미아블레 가문의 저택을 침입하였으며 내부에 있던 가문의 보물을 훔쳐갔다. 그들을 고발할 것이니 누군지 발견하면 제보를 해 달라, 그게 아니면 본인들이 순순히 자수해라.

옆에 서서 이온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던 에렌스트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께서도 생각보다 감이 좋으신 것 같군요.”

그 말이 맞았다. 저택에 잠입했다가 별 소득이 없었으면 억울할 뻔했는데, 도둑질을 하자는 카밀루스의 제안을 따른 결과가 썩 괜찮은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에게 도둑으로 몰리니 좀 귀가 간지러운 것 같았지만 말이다.

게다가 카밀루스의 말대로 미아블레 후작이 정말로 황도로 급하게 향해 오는 모양이었다.

반응을 보면 정말 중요한 물건인 게 틀림없기는 했다.

그런데 자꾸만 찝찝한 구석이 하나 남았다. 호소문에서는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물건이라고 떠들고 있었는데…….

‘어느 멍청이가 가보를 그렇게 허술하게 둬?’

심지어 어딘가에 숨긴 것도 아니다. 응접실의 장식용 테이블 한가운데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사정을 아는 누군가가 봤으면 못 훔쳐가게 장치라도 해 놓은 줄 알았을 것이다.

옆에 가치가 더 높아 보이는 것들이 있었으니 숲에 나무를 숨기는 느낌으로 거기다 뒀던 걸까.

‘그것도 하인들만 있는 곳에.’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이온은 미간에 주름을 새기다가 고개를 흔들며 일어났다.

어차피 예의 왕관은 지금 카밀루스가 가지고 있다. 제 손에 있는 게 아니니 그 물건의 거취는 그가 정할 것이다.

이온은 목욕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에 방문을 열고 나가며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에렌스트 경에게 물었다.

“아직 황태후궁에서 소식은 없고?”

“연말 연회를 말씀하시는 거면 아직입니다.”

“다른 쪽은 소식이 있다는 거야?”

대답을 듣고서 반문하자 에렌스트 경이 복도를 일별해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바짝 따라붙었다.

“듣자 하니 대공이 태후의 치마를 들치고 있었다는데요. 저희가 원하는 대로 이야기가 도는 걸 보면 아무래도 대공과 황후가 모종의 거래를 하긴 한 것 같습니다.”

“…….”

일단은 카밀루스가 황태후와 스캔들을 제대로 냈다는 얘기인데, 에렌스트 경이 선택한 단어가 다소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래라니.

그런 걸 할 만한 패가, 카밀루스에게 있기는 했던가?

어차피 카밀루스가 만든 약물은 그녀가 가지고 있으리라 추정되는 약물을 적당히 비슷해 보이도록 만든 것에 불과했다. 진짜와 똑같을지 안 똑같을지도 잘 모른다.

사실 이온은 황태후 본인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아직도 좀 아리송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녀는 현재 궁 안쪽에 조용히 틀어박혀 정치적인 행보는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황제인 버니언을 너무 안 돕는 거 아니냐는 말도 슬슬 나오는 중이다.

“아들 편이…… 아닌 거야?”

이온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에렌스트 경은 묵묵히 들으며 고개만 숙였다.

안 그래도 카밀루스에게 황태후궁에 다녀온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었었는데, 저번에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 얼렁뚱땅 넘어갔던 것 같았다.

그 뒤로 딱히 말이 없었던 걸 보면 카밀루스도 뭔가 전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비밀이라.’

그것도 카밀루스와 황태후가 공유하는.

약간 거슬리는 부분이었다.

이윽고 별관으로 넘어간 이온이 하인들에게 이것저것 챙겨 오라며 명령한 뒤 가만히 한구석에 앉아 목욕탕에 물 채우는 걸 지켜보았다.

물이 다 찬 뒤에는 주변을 밝힌 불빛이 수면에 흔들리는 걸 잠시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목욕 준비가 다 됐는데도 이온이 평소와 달리 이온이 멀뚱히 있는 것에 주변의 하인들이 눈치를 보다가 그에게 넌지시 언질을 주었다.

“도련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제야 이온이 눈의 초점을 되살렸다.

“적당한 때 알아서 할 테니 나가 봐.”

그러고 고개를 까딱여 에렌스트 경까지 내보냈다.

넓은 공간에서 혼자가 된 뒤에야 이온은 묵묵한 표정으로 스스로 옷을 벗고 뜨거운 물에 발부터 넣고 탕에 걸터앉았다.

크레이거가의 저택이 크기는 해도, 안에서 할 만한 일들이 많지는 않아서 기분이 저조할 때는 목욕을 하면서 푸는 편인데 오늘은 막상 와 보니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이미 채워 놓은 물 때문에 그냥 가기는 아쉬워 이온은 그냥 다리만 살살 흔들었다.

그러다가 이온은 한숨을 푹 내쉬고 중얼거렸다.

“짜증 나네…….”

저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상황이 바쁘게 돌아가는 와중에 제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다는 게 문득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황태후와 카밀루스의 스캔들은 제가 설계한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소문이 나니까 둘이 무슨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지 몰라서 불안해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소심해 보이고 싫었다.

게다가 태후의 치마를 들쳤다고?

그야 카밀루스가 일을 벌이는 과정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니 한 일일 터였다. 소문이 아무 실체도 없이 날 수는 없는 것이니까.

에렌스트 경의 말을 듣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순전히 제 마음의 불안정성 때문이다. 

마지막에는 다 놓기로, 제 몫은 남겨 두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실제로는 그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탓이다.

‘바보 아냐.’

이온은 스스로를 욕하면서 그만 물에 몸을 푹 담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차라리 카밀루스가 좀만 더 나쁜 놈이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제 몸 따위 배려 안 하고서 차라리 임신이라도 시켜 줬으면 공작도 둘의 관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제 몸과 인생을 건 실로 자기파괴적인 생각이긴 했으나 그렇게라도 등을 떠밀어 주었으면 좋았을걸 싶었다.

이온은 제 배를 내려다보며 괜히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카밀루스와 결국 한 번은 치러 냈으니 혹시나 가능성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 반, 아이가 찾아와도 낳을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손가락질을 할까 하는 두려움 반의 심경이 아직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다 외면해 버리고 싶은 마음에 이온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히고 몸을 늘어뜨렸을 때였다. 두꺼운 목욕탕의 문이 살며시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하인일 것이다. 목욕탕은 문밖에서 안쪽까지 소리가 잘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무언가 알리려면 지금처럼 문을 열어야 했다.

그러나 이온은 하인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날 선 말을 뱉었다.

“중요한 거 아니면 그냥 나중에 말해.”

“아, 예, 도련님. 다른 게 아니라…… 대공께서 오셔서 말씀드립니다.”

난처해하는 하인의 말을 듣고 이온이 미간을 좁혔다.

“급한 게 아니면…….”

나중에 제가 가겠다고, 그렇게 말하려는데 카밀루스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급합니다, 소공작.”

“…….”

“휴식을 취하는 데 방해해서 미안합니다만,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잠시만, 제 옷 좀 걸치고요.”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여기까지 온 건지 모르겠다.

이온은 서둘러 탕 밖으로 나갔다. 뜨거운 물에서 나와서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제가 미처 대처하기도 전에 현기증이 일어 비틀거린 바람에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쿵, 하고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쓰러진 이온이 신음을 흘리자 밖에서 결국 카밀루스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소공작? 이온!”

금세 문 앞의 통로를 지나온 카밀루스가 이온의 앞으로 다가와 그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아, 윽…….”

“괜찮아?”

카밀루스는 진심으로 당황한 모양인지 눈동자에 동요가 가득 배어 있었다. 그런 그에게 몸을 기댄 순간 이온의 몸에 통증이 몰려왔다.

넘어지면서 무릎을 부딪힌 건 둘째 치고 손으로 바닥을 짚은 바람에 오른쬐 손목을 접질렸는지 찌릿찌릿하다. 이온은 제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감싸고 아픔을 꾹 참으며 물었다.

“급한 일이라니 대체 뭐야…….”

그러면서 혹시 별거 아니면 가만 안 둘 거라고, 이걸로 평생 갈구겠다고 다짐했다.

곧 카밀루스가 예의 급한 일이 뭔지 알려 주었다.

“미아블레 후작이 내게 방문을 청하는 편지를 보내왔어.”

“……뭐?”

들은 순간 잠시 통증도, 그에게 나신으로 안겨 있다는 사실도 잊을 만큼 당혹스러운 소식이기는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