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날 무슨 일로 불렀나요, 버니언?”
“어머니.”
본래는 잠들었어야 하는 깊은 밤, 제 시종장을 휴가 보낸 이후 버니언은 약간의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금껏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잘 풀리지는 않았어도 요즘처럼 불안한 적은 거의 없었다.
딱, 딱 소리를 내며 저도 모르게 이로 손톱을 튕기던 버니언은 제 손톱이 다 갈라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카밀루스…….’
요즘 그 새끼가 제 주변에 거는 온갖 수작질이 거슬리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심지어 제 어머니와의 스캔들이라니, 어디서 되지도 않는 도발인가 싶었다.
그 새끼가 죽고 못 살 만큼 목 매다는 게 이온 크레이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
결국 참지 못한 버니언이 황태후를 불러들였다. 그녀가 황궁에 도착했을 때 버니언은 이미 술에 흠뻑 취해 있었다.
황태후는 주변에 술병이 굴러다니는 걸 보고도 염려의 말을 건네기보다는 그저 말없이 버니언의 맞은편에 앉았다. 몸을 살짝 튼 채로.
한 번도 살가운 적 없는 아들을 향한 서먹함의 표시였다. 그러나 버니언은 익숙하다는 듯이 그녀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옆의 시종에게 손짓해 준비해 놓은 그녀의 잔에 와인을 따르도록 했다.
“드세요, 어머니.”
잔이 다 채워지자 버니언이 그리 말했으나 황태후는 힐끗하기만 할 뿐, 입에 대지 않았다. 대신 드레스 아래의 볼록한 배 위에 가만히 손만 올렸다.
그러고 입이 움직이는 대로 습관적인 설교를 시작했다.
“저녁에 너무 과음을 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그것도 혼자서…….”
그런데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버니언이 잔을 다 비우고 쾅, 내려놓으며 히스테릭하게 소릴 질렀다.
“제가 지금 안 그러게 생겼습니까? 그 사생아 새끼가 내 어머니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온 세상에 파다한데!”
“…….”
버니언의 핏발 선 눈이 황태후를 사납게 노러보았다.
“처음엔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라 생각해서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대체 왜! 처신을 그따위로 해서는 말도 안 되는 소문에 부채질을 해!”
흥분한 버니언이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하며 이제는 어머니에게 반말을 지껄였다. 그렇지만 황태후는 당황하는 법 없이 가만히 보기만 했다. 그 태도에 더 화가 오른 버니언이 테이블 위를 쓸어버렸다.
위에 놓여 있던 잔이며 병이 전부 바닥에 부딪쳐 깨지고, 붉은 와인이 흩어졌다.
“도대체가, 선황이 그리 그리웠습니까? 그래서 선황 닮은 그 새끼를 보니까 머리가 돌아 버렸어? 어?”
버니언은 외치면서 머릿속으로 그 지긋지긋한 늙은이를 떠올렸다.
저를 따뜻한 눈으로 봐 준 적이 거의 없는 아버지. 외려 경멸의 눈빛을 받은 적이 훨씬 많았다.
버니언은 본능적으로 알아 버렸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카밀루스를 탑에 가둬 놓고 학대했지만, 선황의 진심은 그에게 있었다.
닮아서일까.
버니언이 봐도 저보다는 카밀루스에게서 선황의 모습이 더 많이 비쳤다. 성격적으로나, 외모적으로나.
그러나 결국 선황이 억지로 그를 북부 아이오딘에 처박았기 때문에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제게 황위를 물려줘 놓고 카밀루스에게 굳이 대공위를 줘서 자신을 위협할 요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카밀루스는 실제로도 아주 거슬리는 행보를 보였다.
“치마를 걷어 주고 그다음엔 뭐였지? 정말로 자기라도 했나? 설마 애까지 밴 건…….”
버니언은 말하면서 진짜로 황태후의 배를 보다가 손이 다소곳이 올려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평범한 자세였을지 모르지만 왜인지 모르게 등 뒤가 오싹해진 그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사그라들었다.
“……아니겠지.”
설마.
겨우 말을 마치긴 했으나 표정이 굳어 버린 버니언이었다.
“…….”
황태후와 눈이 마주친 잠시간, 둘 사이에 정적이 일었다.
하아, 하아. 술을 마셔 뜨거워지고, 분노로 거칠어진 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버니언이 곧 주변의 시종들을 돌아보며 명했다.
“다 나가라.”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은 주변의 시종들이 서둘러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전부 나가고 어머니와 둘만 남자 버니언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황태후의 정면에 선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까. 아니라고 하셔야죠? 그 새끼랑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하셔야죠. 아니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말하면서도 시선이 계속 황태후의 배로 향했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보면 볼수록 헷갈린다고, 그렇게 생각할 무렵이었다.
버니언으로서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말이 들려왔다.
“아이를 가졌습니다.”
“…….”
어머니의 그 한마디에 버니언은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그러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제가 혹시 술에 너무 취했나.
그래서 헛소리가 들리는 건가.
버니언은 이제야 사람들이 으레 말하는 눈앞이 깜깜해진다는 말이 비유 표현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눈을 감은 것도 아닌데, 정말로 시야가 아득해졌다.
한데 아들의 그런 상태를 알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인지 황태후는 특유의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마치 버니언이 자신을 불러 주길 기다린 사람 같았다.
“이번 연말 연회가 끝나면 요양 명목으로 남부에 갈까 하니 허락해 주었으면 좋겠네요.”
순간 버니언은 참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막말을 뱉었다.
“……미쳤어?”
하지만 태후는 이미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양, 여전히 태연했다. 물론 뒤이어 나온 말도 버니언의 속을 뒤집어 놓기에는 충분했다.
“내 아들이 황위에도 무사히 올랐으니 이제 이 황성에 들어온 자로서의 의무도 잘 끝난 것 같아요. 다행이지요.”
“의무가 잘 끝나? 다행이라고?”
“크레이거 공작가의 영식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다른 좋은 영애들도 많으니 이번 연말 연회 때 잘 찾아서 내년엔 식을 올렸으면 해요.”
“어머니!”
더는 들어 줄 수가 없어 버니언이 와락 소리를 질렀다. 순간 조금 어긋나 있던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버니언의 숨소리는 아까보다 더 거칠어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황태후의 입에서 나온 그 어떤 말도 버니언의 입장에선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어머니로서 딱히 제게 깊은 사랑을 느끼게 해 준 살가운 어머니는 아니었다. 버니언은 그것이 아마도 내로라하는 귀족가에서 태어나 주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의 성향 때문이겠거니 하면서 애써 납득했고, 포기하며 살았다.
그러니 애초에 아들 생각을 해 주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이쪽에 방해가 되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버니언은 기가 막혀서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하여 입만 벌린 채로 멍하니 보고 있는데, 황태후가 넌지시 물어 왔다.
“더 할 말이 있나요?”
버니언은 턱뼈가 뻐근해지도록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입술이 다 떨렸지만 물어볼 수밖에 없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설마, 그 배 속의 아이가 진짜로 그 새끼 아이는 아니겠지요.”
“물론 아니에요.”
“그럼 말해, 누구야. 대체 누구냐고!”
다른 누구도 아닌 황태후의 사생아라니. 이런 미친 경우가 또 어디 있는가 싶었다. 불륜도 보통 불륜이 아니었다.
그런데 황태후는 여전히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버니언, 좋은 구실이 생긴 거 아닌가요? 이걸 핑계로 대공을 축출해요. 나 또한 그가 강제로 날 취했다고 증언할 테니. 때는…… 역시 떠들썩한 연말 연회가 좋겠지요.”
한마디로 카밀루스를 일방적인 가해자로 만들자, 이 소리였다. 그러나 그놈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당하기만 하겠는가. 그것도 제가 하지도 않은 일로. 버니언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랬다가 그 새끼가 빠져나가면? 아니, 어떤 경우든 황실은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할 추문만 하나 얻을 뿐인데 도대체가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애초에 생각이 있었으면 아이도 갖지 않았겠지.
버니언은 속으로 그리 생각하면서도 열불이 터져 소리르 지를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누군가 엿들으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잠시 뒷전이었다.
그런데 태후가 더 답답한 소리를 해 왔다.
“칼이 도와줄 거예요, 버니언.”
“뭐, 라고요?”
황태후가 굳은 버니언의 얼굴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뺨을 쓰다듬는 손짓이, 버니언에게는 마치 마녀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칼 나르바에스. 노아 기사단의 단장 말이에요. 그는 버니언의 편이에요. 너무 경계하지 말고 칼을 잘 이용해요.”
“…….”
“선황이 특별히 아꼈던 자예요. 그이가 사람 보는 눈만큼은 정확했으니 너무 날만 세우지는 말고요.”
황태후는 제 나름대로 진심 어린 조언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버니언은 어머니의 손을 탁, 쳐 냈다. 냉정한 반응에 황태후는 제 손을 순순히 거두었고, 버니언은 그런 그녀를 날 선 눈으로 내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그래서 그 애, 대체 누구 애냔 말입니다. 진실을 알아야 이용해 먹든 말든 할 거 아냐!”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또다시 버니언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미안해요, 버니언.”
“…….”
“아무것도 묻지 말고 조용히, 요양을 보내 줘요. 아이는…… 내가 잘 처리할 테니까.”
결국 애를 낳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버니언은 도무지 제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처구니가 없으니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하, 하하하. 웃음소리가 뚝뚝 끊겨 나왔다. 그에 따라 숨이 벅차 올랐다. 버니언은 주변을 돌아보다가 새로운 술병 하나를 더 따서 그대로 제 목에 쏟아부었다.
목구멍을 태우며 내려가는 술기운을 빌려 그는 주변의 모든 걸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그 가운데서도 덤덤한 황태후를 보고 화를 참지 못한 그는 결국 제 어머니인 황태후에게 욕지거리를 토해 냈다.
“그냥 꺼져 버려, 이 개년아!”
애초에 사람에 대한 신뢰는 없다고 생각했다. 저에게 피를 물려준 아버지조차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여 칼 나르바에스니, 아스타틴 딜런이니, 저를 평생 보좌해 온 시종장이니…… 그들이 배신하든 말든 전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제 편은 아무 데도 없는 거니까.
그러나 저를 배 아파 낳은 어머니까지도 이딴 식으로 나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상에 의지할 사람도, 믿을 사람도 하나 없었다.
잠시 뒤 황태후가 조용히 물러나고, 혼자가 된 버니언은 의식을 놓을 때까지 술을 마셨다.
그렇게 취해서 이리저리 비틀거리다가 깨진 병이 뒹구는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어느 순간 들어온 시종이 놀라 그를 부축했고, 버니언은 그에게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여 침대 위에 누웠다.
그러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들어온 입술을 본 순간이었다. 이미 이성이 마비되었던 그는 충동적으로 그곳에 제 입을 맞추었다.
“하, 이온…… 이온.”
잠시 뒤 덜 닫힌 침실의 문 사이에서 금세 짙은 신음 소리가 울렸다. 결코 달콤한 소리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