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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드레스숍에서는 에밀리의 드레스쇼가 펼쳐졌다. 그렇지만 이온답게 질색한 표정인 와중에도 카탈로그와 입고 나온 드레스를 꽤 진지하게 봐줬고, 덕분에 제 옷과 카밀루스의 옷을 고르고 나올 때쯤에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결북 이온은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흔들리는 마차의 소음 속에서도 깨지 않을 만큼 제대로 곯아떨어진 그를 카밀루스가 들여다보던 무렵이었다. 황도의 번화가를 채 벗어나기 전에 에밀리가 돌연 마차를 멈추라고 바깥에 명령하더니 카밀루스를 불렀다.
“전하.”
속삭이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춘 그녀의 부름에 카밀루스가 고개를 들자 에밀리가 마차 밖으로 나가자고 손짓했다.
조금 주저되긴 했으나 이온에게 담요를 덮어 두고 나온 카밀루스가 그녀의 의사에 따라 조심조심 마차 밖으로 나섰다.
마차가 멈춘 곳은 번화가의 입구 언저리였다. 저녁때가 와 낮과 달리 가게마다 램프를 하나씩 달며 야시장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는 거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에밀리가 먼저 감탄사를 흘렸다.
“와, 이렇게 저녁에 지나간 적은 처음이라 몰랐는데 굉장하네요?”
평소 괄괄한 성격에 가려진 탓에 가끔 잊곤 하는데 에밀리 역시 귀한 공작가의 아가씨다. 오빠와 나온 덕분에 겨우 허락받은 작은 자유에 흥분한 그녀를 진정시키려 카밀루스가 얼른 에스코트하는 자세를 잡았다.
“크레이거 양? 위험하니 제 팔을 잡아요.”
“아, 네…….”
부드러운 지적에 먼저 앞으로 튀어나가려던 에밀리가 살짝 볼을 붉히며 그를 잡았다. 그에 카밀루스는 어느새 마차 앞에 서서 지키고 있는 에렌스트 경과 눈짓을 한번 주고받고는 에밀리와 함께 거리에 스며들었다.
큰 길을 따라 각종 가게가 세 줄로 늘어서 있는 이곳은 저녁이라 해서 사람들이 줄지 않았다. 에밀리는 저녁의 이 풍경이 무척이나 생소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며 눈을 반짝이다가 손으로 어느 곳을 가리켰다.
“전하, 저기요, 저기!”
에밀리의 고조된 목소리에 카밀루스는 하는 수 없이 그녀의 의도대로 발을 옮겼다. 카밀루스는 혹시나 소매치기가 있지는 않은지 조심스러운데, 옆의 사람을 믿는 건지 뭔지는 몰라도 에밀리는 움직이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먹을 걸 파는 데에서 기웃거리다 포기하고, 예쁜 모양의 램프를 파는 곳에서 감탄사를 흘리다가 마침내 꽃집에서 발을 멈춘 에밀리가 꽃다발 하나를 만들어 품에 안았다.
그녀가 안은 건 라넌큘러스 꽃다발이었다.
“왜인지 오늘은 저 자신한테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그러고 만족스러워하며 볼을 살짝 붉히는 그녀를 보고 카밀루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고 옆에 신사가 있는데 레이디가 꽃다발을 직접 사게 할 수는 없지요.”
“그런 건가요?”
카밀루스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며 제가 꽃다발을 계산해 주었다. 에밀리는 저에게 유난히 친절한 그를 보면서 생긋 웃다가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상보다 훨씬 짧은 일탈 시간이 의외라고 생각했던 카밀루스는 그녀를 에스코트해 주며 에밀리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제 시선을 알아차렸을 텐데도 굳이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모습에 카밀루스는 어쩔 수 없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뭡니까, 크레이거 양?”
그러자 에밀리가 시선을 올리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아…… 역시 눈치채셨군요?”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카밀루스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걸음은 일부러 조금 늦추었다.
그러자 에밀리답지 않게 약간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조심조심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기, 제가 대공께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편하게 말씀하세요, 크레이거 양.”
이제 와서 뭘 그렇게 가리는 게 있는 건지. 카밀루스는 새삼스럽다고 생각하면서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제가 아버지랑 오빠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어서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꽤 중요한 얘기였던 모양이군요.”
카밀루스의 대꾸에 에밀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온과 크레이거 공작이 할 만한 중요한 얘기라면 카밀루스도 짐작이 가는 바가 따로 있기는 했다. 얼마 전 이온이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었으니까.
그거 때문에 위험한 짓 하지 말라고 추궁하려고 하는 걸까. 카밀루스가 마음속으로 어떤 변명을 입에 올려야 할지 재고 있을 때였다. 조금 의외로운 이야기가 에밀리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공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크레이거 가문은 본래 오브라이언 제국의 서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공국을 이끄는 가문이었다. 현재 남은 4대 공작가 중에서도 가장 너른 영지를 소유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근 몇 년간 황도의 저택을 비운 적이 없는 그들이라 카밀루스도 잠시 열외로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예상외의 말이 들려오자 카밀루스는 다소간 당황했지만, 저보다 더 시무룩해 보이는 에밀리의 모습에 일단 제 감정을 숨겼다.
“공작이 공국을 지나치게 오래 비우긴 하였지요. 더는 부담을 느꼈을지도 모르겠군요.”
한데 에밀리가 그를 올려다보며 불쑥 물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시는 건가요. 아니면 혹시 외면하시는 건가요, 전하?”
“…….”
“오라버니한테 진지한 감정인 거 아니셨어요?”
카밀루스가 이렇다 할 대꾸를 내놓지 않자에밀리는 제가 더 애달아했다. 대답을 추궁하는 그녀의 말에 카밀루스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겨우 한마디를 찾아 입에 올렸다.
“……소공작에게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에밀리가 이렇게 따로 이야기를 해 줄 정도면 이온에게도 제게 말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한데 이 비슷한 이야기조차 들은 적이 없었다.
제게 숨기고 싶었던 걸까.
‘최근에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이긴 했는데.’
아니, 안 좋다기보다는 이온의 기분이 좀 오락가락한 게 아닌가 싶었다. 제 나름대로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종잡을 수 없는 구석이 보였으므로.
그게 설마 이거 때문이었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카밀루스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온이 자신에게 그 사실을 숨기려 한 이유가 뭔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일이 전부 끝나면 조용히 떠나려 했던 것이다. 아마도 제게 말도 안 한 채로.
카밀루스의 표정이 굳는 걸 보면서 에밀리가 카밀루스의 품에 제가 든 꽃다발을 밀어넣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카밀루스가 왜 자기에게 이걸 주냐고 얼떨떨해하는 표정을 짓자 에밀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진짜 두 사람 다 답답해서 응원할 맛도 안 나요.”
“……크레이거 양.”
에밀리는 제가 더 울적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공께서 오라버니의 마나석을 새로 만들어 주셨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그걸 만들려면 평범한 사람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서요?”
“저한테는 그 정도로 어려운 일은 아닙…….”
“전 그런 말을 듣자고 한 말이 아닌데요, 대공 전하.”
“아, 예.”
에밀리의 일침에 카밀루스는 고개 숙였다. 이온이나 에밀리나, 그들 남매 앞에서는 왜인지 카밀루스조차도 좀 쩔쩔매게 되는 구석이 있었다.
“그만큼 좋아하시면서 왜 붙잡지는 못하시는 건가요?”
“그게, 소공작이 저를 원하지 않으면…….”
그러면 제가 무슨 자격으로 그를 붙잡겠느냐고,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 때였다. 에밀리의 눈가가 살며시 촉촉해지는 것을 보며 카밀루스가 눈을 크게 떴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기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환경이 안 되니까 변명하는 것뿐이지.”
“저기, 크레이거 양?”
본의 아니게 여자를 울려 버린 카밀루스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달래려 했으나 에밀리는 몸을 휙 돌렸다. 그러고는 걸음을 빨리하는 그녀를 뒤늦게 쫓아가며 카밀루스가 이런 말 저런 말 주워섬겼다.
“그야 소공작에게는 저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그러니까…… 가문을 물려받는 거 외에도 본인이 하고 싶은 일들도 워낙 많으니 그런 건 어쩔 수 없다고…….”
그러다가 에밀리가 갑자기 걸음을 세우고 노려보는 것에 카밀루스는 움찔해 버렸다.
“이제 보니 대공께서는 저희 오라버니를 못 믿으시는 거네요?”
“예? 그런……. 그건 절대 아닙니다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눈빛으로 카밀루스가 저는 결백하다는 뜻으로 손바닥을 펴 보였으나 에밀리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카밀루스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눈을 새침하게 치켜올린 그녀가 카밀루스를 계속 몰아댔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전 우리 이온 오라버니를 엄청엄청 아껴 주는 사람이 아니면 인정할 수 없다고요.”
“아, 예. 물론 기억합니다만.”
“그런데 떨어져 있으면서 아낄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있으면 듣고 싶네요, 전하. 너그러운 신사로서 이 무지한 레이디에게 알려 주시겠어요?”
“…….”
“왜 대답이 없으신가요?”
그녀의 매서운 추궁에 카밀루스는 누가 망치로 제 머리를 때린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해짐을 느꼈다.
반박할 말이 단 한 마디도 떠오르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