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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07)화 (207/317)

카밀루스는 방금 전 제 품에 안긴 꽃을 내려다보았다. 애초부터 에밀리는 이 꽂다발을 그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이온에게 제 등을 떠밀려고 말이다. 

눈을 한 번 굳게 감았다 뜬 카밀루스는 대답 대신 에밀리와 거리를 좁힌 뒤 팔을 내밀었다. 에밀리는 뜻을 얼른 알아듣고는 손을 올렸다.

다시금 마차 쪽으로 발을 옮기며 그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크레이거 양, 그래서 내용을 얼마나 엿들으신 겁니까?”

그러자 에밀리가 입꼬리를 올려 살짝 웃었다. 카밀루스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고 용기를 내 줄 것임을 눈치챈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아직 화가 덜 풀린 척 새침하게 대꾸했다.

“아마…… 각서도 쓴 것 같았어요.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요.”

각서라면 이온이 그냥 썼을 리는 없고 크레이거 공작과 무언가를 교환하려 했을 거였다. 역시나 에밀리가 걷다가 카밀루스에게 키를 낮춰 달라는 의미로 그의 팔을 당겼다. 그에 순순히 몸을 기울이니 에밀리가 귓속말을 해 왔다.

“오빠가 전하를 돕고 싶다고, 아버지에게도 도와달라면서 빌고 있었어요.”

이건 좀 위험한 것 같은데.

카밀루스는 혹시나 싶어 넌지시 질문을 덧붙였다.

“……내용도 전부 자세히 들으신 겁니까?”

다행히 에밀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갔다가 금세 돌아 나왔어요. 제 시녀가 더 있다가 들키면 혼난다고 계속 돌아가자 하는 바람에.”

“그렇군요.”

카밀루스는 겉으로 티 내지 않았지만 공작가의 시녀 교육이 잘된 것 같다며 속으로 안도했다. 에밀리를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더 엿들었으면 솔직히 좀 꺼림칙했을 터였다.

“어쨌든 알려 주어서 고맙습니다, 크레이거 양. 진심으로.”

“그럼 오라버니를…… 붙잡아 주시는 거죠?”

카밀루스는 왜인지 간절한 그녀의 눈빛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하지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왜 저에게 이런 말을 해 주는 겁니까?”

카밀루스의 말에 에밀리가 평소와 달리 약한 씁쓸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가 그냥 행복해졌으면 좋겠으니까요. 오라버니는 그동안 하고 싶은 걸 별로 못 하면서 살았어요. 아파서 어디 여행 한 번 제대로 간 적이 없는걸요. 그리고 오랜 시간 가문의 의무에 짓눌린 채 살아야 했잖아요.”

“……그건 크레이거 양에게도 해당되는 말 아닙니까?”

“네, 그래서 더.”

에밀리는 대답하고는 제 답답한 마음을 거두어 내듯이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마냥 오빠 놀리기를 좋아하는 장난기 많은 동생인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속이 깊은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이온을 진심으로 위해 주는 사람이 더 있어서.

짧은 대화를 마치고 마차 앞에 도착했을 때 어느새 잠이 깼는지 밖으로 나와 있는 이온이 보였다.

“이온?”

카밀루스가 부르자 고개를 돌린 그가 에밀리가 가까이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잠깐 멈칫하는 게 보였다.

그러고 어째선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짓는 이온을 본 카밀루스는 조심스럽게 제 팔을 잡고 있는 에밀리의 손을 빼내었다.

방금 에밀리의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가, 왜인지 이전보다 이온의 표정 더 잘 볼 수 있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차에 좀 더 다가서자 이온이 카밀루스가 아닌 에밀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어딜 다녀온 거야?”

“대공께서 꽃을 사고 싶다고 하셔서 잠깐 나도 따라갔다 왔어.”

마치 준비된 것처럼 굉장히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에밀리의 반응에 카밀루스는 내심 놀랐다. 그에 잠깐 시선을 주자 에밀리가 저택에서 나올 때부터 내내 비워 두었던 마차 쪽으로 향했다.

“난 이제 내 마차 타고 갈래.”

그러자 이온의 옆에 있던 에렌스트 경이 서둘러 그녀의 손을 붙잡아 올라타게 해 주었다.

카밀루스는 마차 문이 닫히기 전에 그녀가 파이팅하는 손짓을 하는 것을 확인하고 순간 웃을 뻔했지만 꾹 참았다. 대신 추운 날씨 때문에 두 손을 꼭 맞붙잡고 있는 이온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 주었다.

“추운데 왜 나와 있어?”

“잠깐 눈떴는데 이상한 데 마차가 멈춰 있고 안에도 나뿐이라…….”

콜록콜록.

이온이 말을 하다 말고 기침을 흘렸다. 바깥에서 얼마나 기다린 건지 몰라도 볼이 좀 상기된 것이 보였다.

그에 카밀루스가 기꺼이 제 겉옷을 벗어 주고 이온을 부축해 마차 안으로 들였다. 먼저 올라탄 이온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겠는지 아직 바깥에 있는 그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 꽃은 뭐야?”

“네 선물.”

사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제 돈으로 샀으니 카밀루스는 당당하게 내밀었다. 그러자 이온이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받아 들었다.

“뭐야, 갑자기…….”

딱히 고맙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온은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카밀루스는 역시 에밀리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속으로 칭찬하며 살짝 웃었다.

그러고 마차에 따라 올라타기 전에 주변을 살폈다. 멀리서 제 게으른 독수리가 대기 중인 것을 확인한 그가 곧 이온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얼마 안 가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만히 꽃향기를 맡고 있던 이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카밀루스, 있잖아.”

“응?”

“나 저주 풀리면 건강해지기는 할까?”

최근 이온의 기분이 저조하다고 느끼긴 했는데, 진짜로 작은 머리통으로 온갖 생각을 다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이온 크레이거’의 저주가 해제되었을 시 그 후유증이 남을 확률은 99.9%입니다.]

[본 확률을 낮추기 위한 방법을 재탐색 중…….]

가끔 제 눈에만 보이는 시스템창이 이런 짓궂은 짓거리를 한다는 점이었다.

이 확률을 처음 봤을 때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어지는 메시지에도 역시.

[탐색에 실패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꿈도 희망도 없는 수치나 후유증에 대한 해결 방법이 없다는 말을 이온에게 말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후유증이 별것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지.

“……왜 그런 소리를 해?”

카밀루스는 다시금 애가 타는 제 마음을 애써 숨기며 그렇게 반문했다. 그러자 이온이 쓴웃음을 짓는 게 보였다.

“아니, 이 상태로 너무 오래 있었어서.”

카밀루스는 어떻게 해야 그의 불안감을 가라앉힐 수 있는지 고민하다가 제가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끌어모았다.

“네 몸 한곳에 뭉쳐 있는 게 문제지, 네 마나가 적은 편은 아니야. 저주만 풀리면 몸의 마나가 순환될 테니 틀림없이 나아질 거라고 믿어.”

“그럼 다행이고.”

하지만 정작 질문을 던진 이온은 어쩐지 제 말을 그렇게 진지하게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카밀루스는 그가 혹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닌가 싶어 더 강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너 계속 아프게 둘 것 같아? 절대 안 그래.”

확신 어린 말을 건네자 이온이 고개를 들어 카밀루스의 눈을 마주 보았다.

정면에서 보자 이제 좀 이온의 상태가 어떤지 보였다. 왜 여태껏 안갯속이라고 여겼던 것인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심리 상태가 선명하게 보였다.

이온은 그냥 모든 걸 불안해하고 있는 거였다.

카밀루스 클로델의 인생을 바꿔 줄 수 있다고 확신하며 움직이고 있는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가늠하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이내 그의 시선이 카밀루스에게서 살짝 벗어났다. 잠시 뒤 들려오는 말에 카밀루스는 가슴이 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네가 뭐든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야 그렇다. 자신은 신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이온의 이런 태도도 그렇게 좋은 것이라고는 도저히 말 못 할 것이었다.

“왜 이렇게 부정적이야? 최대한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야지. 그래야 지금 우리가 하는 짓이 진짜 의미 있어지는 건데.”

“카밀루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속 시원하게 하자, 이온.”

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야? 혹시 내가 널 최후엔 널 선택하지 않을까 봐? 그럴 리가 없는데…….

왜 넌 내 사랑을 희생이라고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카밀루스가 해 주려는 모든 것들은 사실은 그런 숭고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냥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사람에게 뭐든 다 내주고 싶은 마음, 그 하나뿐이었다.

한데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굳게 닫고 있던 이온이 몇 번을 들어도 복장 터지게 하는 소리를 또 했다.

“나는 역시 네가 나한테 얽매이진 않았으면 좋겠어.”

카밀루스는 한숨이 나올 뻔했지만 꾹 참고 일단 또 한 번 듣기로 했다.

“……무슨 뜻이야?”

“널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많잖아. 당장 우리 저택에 있는 사람들도 북부에서 너랑 8년 동안 같이했던 거 아니었어? 페드로도 이쯤 되면 날 싫어할지도…….”

“그 아저씨 그런 사람 아닌데.”

이온의 오해와 달리 페드로는 카밀루스의 뺨을 칠지언정 이온을 원망할 사람은 아니다. 그 아저씨가 생각보다 사리분별은 확실했다.

하지만 카밀루스의 이러한 태클이 못마땅한지 이온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내 말 좀 진지하게 들어 봐.”

“그래. 속 시원히 말하라 했으니까 일단은.”

일부러 대충 받아치자 이온이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카밀루스는 이렇게 계속 도돌이표만 찍는 거라면 그렇게 유의미한 대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너도, 나도 각자 지위라는 게 있는 사람들이니까 머리가 꽃밭일 수만은 없는 거잖아.”

머리가 꽃밭? 카밀루스는 저희들의 감정이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저절로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네가 생각하는 현실이 뭔데. 내가 이런 꽃을 너에게 건네지 않는 거? 남자끼리는 역겨우니까 키스도 하지 마, 뭐 이런 거?”

“…….”

“우리가 잔 거 알면 고상한 귀족 나리들이 손가락질하는 뭐 그런 현실?”

에밀리의 한마디로 정말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말하면서 카밀루스는 에밀리를 평생 제 등에 엎고 다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가 진짜 자신을 구했다.

이온의 이 말을 듣고서도 땅굴을 파지 않는다니. 게다가 그는 이온과 크레이거 공작이 썼다는 그 각서 따위 나중에 자기가 직접 불살라 버리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이야기하면서 몸을 기울인 그가 이온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그러자 이온의 초록빛 눈이 동요해 살며시 떨리는 게 보였다.

자신은 진짜로 바보였다.

이 모든 징후들을 놓치고 있었다니…….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안 놔, 이온.’

카밀루스는 다짐하면서 그를 확실히 당혹게 할 수 있는 한마디를 뱉었다.

“너 나 황위에 올리고 튈 생각 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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