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나 황위에 올리고 튈 생각 하고 있지.”
속 시원히 이야기하자더니 진짜로 카밀루스는 봉인 풀린 사람처럼 말을 돌리지도 않았다. 덕분에 말을 듣자마자 이온은 멍청한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뭐?”
외마디 말을 내뱉고 나서야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야 네 계획이 어떤 건지 눈에 보이는 거 같은데 내가 말해 줘?”
카밀루스의 목소리엔 거침이 없었다. 평소 이온에게만큼은 누가 뭐라 해도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한 녀석인데, 날 잡고 작정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본인이 점쟁이라도 되는 양 말투도 아주 자신만만했다.
“저주 풀리면 이제 나 필요 없다고 할 계획이잖아,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완전히 정곡이라 이번에도 이온의 말투에는 주저함이 배었다. 어처구니없다고 웃어 줘야 하는데 그게 안 됐다.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건 상상 속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리고 뻔하지. 가문의 의무니 어쩌니 하면서 나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있는 것처럼 떠들 생각이었을 거야.”
“…….”
그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말은 아버지와 각서를 쓰고 나온 뒤에, 그리고 카밀루스가 저에게 마나석을 만들어 준답시고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인 걸 확인하고 나서 실제로 머릿속으로 그려 왔던 계획 중 일부였다.
그 정도 핑계가 제일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카밀루스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속아 줄 거라고 여겼다. 매번 제 말 한마디에 너무나 쉽게 흔들려 버리는 그이기에.
그런데 카밀루스가 갑자기 이렇게 나와 버리면 그 계획을 전부 폐기해 버려야 했다.
이온은 마른침을 삼켰다.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는데, 머리가 새하얘져서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카밀루스가 얼굴을 진지하게 굳히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그거 하지 마, 이온. 내가 너한테 그런 말 들으면 얼마나 애타 하는지 잘 알잖아.”
어조가 퍽 간절했다. 살며시 입술 끝을 떠는 이온의 뺨을 쓰다듬는 손길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원하면 포기할 수 있다는 것도 거짓말이었어.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상상도 안 되는데…… 그냥 참으면 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이야.”
이온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그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마주 보고 있어 봤자 하찮은 대꾸밖에 할 수가 없을 거 같았다.
한데 카밀루스가 그런 이온을 와락 껴안아 버렸다. 그리고 귀엣말을 작게 속삭였다.
“이온, 우리 그냥 사고 쳐 버릴까?”
“사고라니…….”
이온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들었지만 설마 하는 마음으로 대꾸했다. 그렇지만 곧 카밀루스의 입에서 예상대로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아이, 아이 가지자고.”
“…….”
“어차피 황태후랑의 소문 떄문에 지금 완전히 난봉꾼 이미지 다 됐을 텐데, 널 임신시켰다고 하면 사람들이 당연히 날 손가락질하지 않겠어? 비난은 전부 내가 받을게. 차라리 이 저주도 내가 걸었다고 하자.”
다른 이유보다도 이온이 아픈 것 때문에 계속 참아 왔으면서 말은 잘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 실행되지 못할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한마디로 카밀루스의 간절함은 충분히 와닿았다. 그 때문에 이온은 제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막지 못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역시 내 애를 갖는 건 싫어?”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진짜로 그런 식으로 소문 나면…… 네가 아무리 대공이라도 재기 불능이야.”
한데 이온의 대답을 들은 카밀루스가 작게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는 게 들렸다.
“이거 봐, 이온. 너, 네가 싫다는 말은 안 하잖아.”
그의 지적에 이온이 움찔했다. 저를 향한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면서 카밀루스가 이어 물었다.
“나 진짜 엄청 사랑받고 있는 거 맞지?”
“……애정을 이런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확인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
“네가 매번 말도 안 되게 도망치려고 하니까. 그런데 그거 제발 하지 마. 왜 너랑 내가 둘 다 상처받아야 하는 건데? 머리도 똑똑하면서 왜 그런 방법밖엔 생각을 못 해?”
이온은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카밀루스의 지적을 들었음에도, 사실 이온의 마음속에 들어찬 망설임은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애초부터 단추가 잘못 꿰어진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카밀루스와의 적절한 관계 설정에 대한 문제는 이온에게는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의 문제를 젖혀 두면 또 다른 게 걸리고, 그 문제를 젖혀 두면 또 다른 게 튀어나왔다.
크레이거 공작이 황후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냐고, 차가운 현실을 지적했을 때는 그야말로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카밀루스와의 관계를 단지 감정만으로 이끌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으니까.
“카밀루스, 난 네가…… 네 자리를 잘 되찾았으면 좋겠어.”
“갑자기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올까.”
“터놓고 얘기하자며. 거짓 안 섞은 내 생각은 이렇다는 걸 말해 주려는 거야.”
거짓 없다는 제 변이 그에게 어떤 효력을 발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카밀루스는 계속 듣겠다는 듯 묵묵히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에 힘을 얻어 이온도 좀 더 솔직해질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지막엔 내가 네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거잖아.”
“이온.”
걸림돌이라는 말에 이온은 저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역시나 카밀루스가 조금 저조해진 목소리로 호명하자, 이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너도 무조건 싫어하지만 말고 들어. 이건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니까. 나도 내가 그런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싶을 거 같아? 그런데 어쩔 수 없는 현실도 엄연히 존재하는 거잖아.”
이온만 얽히면 이성이 없는 것처럼 굴 때가 종종 있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면 카밀루스도 꽤 냉정하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하여 이 정도면 그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조금도 납득한 기색이 아니었다.
“……얘기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온.”
“여기서 풀 얘기가 있어?”
“당연히 있지. 난 네가 내 걸림돌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까.”
“…….”
대답을 들은 순간 이온은 둘 사이에 명확한 시각 차이가 있음을 단번에 깨달았다. 이온에겐 그와의 감정 역시 ‘현실’의 일부였으나, 카밀루스의 ‘현실’에서는 이온 크레이거가 예외인 것이다.
이래서는 대화가 전혀 안 통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역시나 이어지는 말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다른 걸 희생해서 널 가지는 거면 모를까, 그 반대의 선택지는 고려해 본 적조차 없는데 네가 왜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겠거든.”
과연 풀어야 하는 건 이온의 생각인지, 카밀루스의 생각인지 이온도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카밀루스가 딱딱한 어투로 한 가지를 지적해 왔다.
“너 내가 내 목숨까지 줄 수 있다는 말, 전혀 안 믿지?”
그에 이온이 고개를 흔들며 대꾸했다.
“……믿어, 그건.”
자신 없는 투로 대답하긴 했지만, 사실 이건 이온도 부정하기 힘들었다. 일단 말도 안 되는 내용만 줄줄이 있는 마법 계약의 세부 사항만 봐도 너무 명확했다.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가 없다.
그런데 카밀루스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이온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너 아직 진심으로는 안 믿고 있어.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여전히 잘 몰라.”
“내가 뭘 몰라?”
“내가 왜 아이오딘에서 8년을 참았다고 생각해?”
아이오딘이 언급된 순간 이온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애써 외면하는 듯이 둘 사이에선 지난 8년간의 이야기가 거의 나온 적이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암흑기였으니까.
그리고 그 시간은, 이온에게 있어선 카밀루스의 희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표상이었다. 한마디로 불편한 주제였다.
“그리고 내가 지금 왜, 어떻게 여기에 있을까.”
“어떻게, 라니…….”
“네가 아니면 난 여기 존재하지도 않았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카밀루스의 입에서는 중간이 듬성듬성 빈 문장들이 두서없이 흘러나왔다.
그 때문에 맥락을 따라가기가 어려운 와중, 마지막 말은 이전에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것이라 이온은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또 탑에서 구해 준 이야기야? 그런 거면 그만하자. 난 이미 대가를 다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방금 그가 꺼낸 8년의 시간. 그리고 목숨 걸고 제게 건넨 마나석들.
얼떨결에 그를 탑에서 꺼내 준 진짜 이온 크레이거가 아니라 제가 대신 대가를 받아 버렸지만 분명한 건 그는 이미 넘치도록 되돌려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아니.”
“……?”
예상외로 그에게서 부정어가 들려왔다.
“사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야, 나는.”
사명. 굉장히 거창하면서도 지금 자리에는 안 어울리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이온은 카밀루스의 표현을 입 안으로 곱씹었다. 어떻게 받아 넘겨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제 저주를 풀지 않으면, 저를 살리지 않으면, 혹은 제가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그런 발언이 아닌가.
얼마 전에 품었던 의혹이 다시금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카밀루스…… 너, 역시 나한테 비밀이 있는 거지?”
대체 ◇◇가 왜 너야? 나만 볼 수 있는 시스템이랑 너 사이에 대체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거지?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역시나.
[상태 이상: 금어]
그 말은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이온은 하나의 가능성을 따져 보았다.
“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