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무조건 오해야. 지금까지 말하지 못한 건…… 널 기만하려 했다든가 하는 그런 이유가 절대 아니야.”
그들의 대화에 주변의 호위들은 영문을 몰라 서로를 돌아보았다. 밖에서 소란이 일자 에밀리 역시 마차 창문으로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이온은 그에 대거리를 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주변 이들에게 명령했다.
“대공 전하를 집까지 모셔라. 알렉, 너만 날 따라와.”
“예, 도련님.”
그러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카밀루스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온, 회피하지 말고 나랑 대화를…….”
그리고 자꾸 매달리려 하는 그의 모습에 이온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 버렸다.
“제발! 제발, 카밀루스! 지금은 날 혼자 두라고!”
“…….”
거센 저항에 카밀루스의 손이 움찔 튀었다. 이온은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눈을 마주했지만, 이기적으로 굴 수밖에 없었다.
혼란스러운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으므로.
“나한테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거잖아.”
그러고 다시 돌아섰을 때였다.
순간 이온의 몸이 휘청했고.
“이온!”
“도련님!”
[상태 이상: 탈진]
[상태 이상 ‘저주 강화’로 인하여 플레이어가 ‘탈진’ 상태에 빠집니다.]
‘저주 강화는 대체 언제 얻은 거지……?’
그런 생각과 함께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 * *
돌벽에 손이 닿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빛에 노출되지 못한 내부는 푸른 이끼가 끼어 있었다.
그것을 짚으며 목적도 없이 올라가던 이온은 문득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탑?’
언젠가 꿈에서 봤던 바로 그 탑이었다.
카밀루스와 처음 만났던 그곳과 똑같은 광경에 이온은 잠시 상황을 파악하느라 애를 먹었다.
카밀루스를 뿌리치고 뒤돌아서다가…….
거기서 기억이 끊긴 걸 떠올린 이온은 자신이 또 자각몽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꿈이 너무 선명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아니면 설마 주마등인가?’
하지만 이전에 주마등을 보았을 때는 시야 한편에 계속해서 주마등이 재생된다는 메시지가 떠 있었고, 이렇게 제 의지대로 옴직여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실제로 계단을 오른 것처럼 다리가 아팠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마구 후들거리는 중이었다.
결국 계단을 오르다 말고 멈춰 선 이온은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눈앞에 나선형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어둠에 잠기는 계단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등 뒤가 오싹해졌다. 그건 위를 올려다볼 때도 마찬가지라, 이온은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말았다.
무의식중에 탑에 가고 싶어 하는 열망이 너무 컸던 건가. 그래서 이렇게 탑에 대한 꿈을 꾸는 걸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때였다.
아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자박, 자박.
작은 발소리, 그렇지만 속도는 빠르다. 사위가 조용한 데다 탑 안쪽이라 그런지 어쩐지 소리가 울렸다.
이온은 그것이 왜인지 무섭게 느껴져 자리에서 일어난 뒤 쫓기듯이 위쪽으로 다시 올라갔다.
그러나 자신의 걸음보다 상대방의 걸음이 더 빠른 게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초조해진 이온은 힘이 없는 다리를 재촉해 더 필사적으로 위로 올라갔다.
‘그렇지만 도망치려면 아래로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위로 올라가 봤자 어차피 끝의 층으로 가면 잡혀 버리고 말 텐데.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당장 상대방을 마주하고, 그를 지나쳐서 1층으로 도망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애초에 왜 도망쳐야 하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지만.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힘들어서 허리가 다 꺾이는 느낌이었다. 이온은 나중엔 손으로 계단을 짚어 가며 필사적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다 뒤늦게 눈에 들어온 물건에 등 뒤로 소름이 쭉 올라옴을 느꼈다.
제 양 손목에 금제가 걸려 있었다.
예전의 기억에서 카밀루스가 손목에 걸고 있던 바로 그 금제와 같은 것이었다.
‘설마 간접 체험 같은 거야?’
대화하자는 카밀루스에게 일방적으로 화내고 돌아선 데 대한 벌 같은 건가? 너도 그 녀석의 기분이 어땠을지 느껴 봐라, 뭐 이런 유의 간접 체험?
이온은 이게 대체 무슨 꿈인가 싶어서 어이가 없어졌지만 일단 저를 쫓아오는 사람과 마주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꿈속에서도 자신은 그렇게 체력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현실에서와 딱히 다를 바 없이 금세 몸이 지쳐 버렸다.
한두 층밖에 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이온은 숨이 차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에 계단 중간에서 거의 엎어진 자세로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 이온……!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그리고 곧 제 어깨에 닿아 오는 손길에 이온은 흠칫했다. 뒤를 돌아보았다.
쫓아온 사람은 카밀루스였다.
이온은 또다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카밀루스는 이온이 딛고 있는 계단까지 올라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온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감싸 쥐는 그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 미안, 미안.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얘는 꿈속에서도 계속 사과만 하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온은 뭔지 모를 위화감에 물었다.
- 너, 누구야……?
누가 봐도 카밀루스의 얼굴에, 똑같은 체향, 똑같은 목소리였지만 왠지 제가 아는 그 녀석이랑은 좀 달라 보였다.
하여 물으니 카밀루스는 놀란 모양이었다. 눈동자가 동요를 품고 떨렸다.
- 나 설마 기억 안 나?
- 카밀루스 클로델.
- 그래, 그래. 네가 날 여기서 구해 줬었잖아, 이온.
대화 몇 마디를 나누어 보았지만 딱히 제가 아는 그 카밀루스와 다른 부분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이온은 눈만 깜빡이며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왜 달라 보이지……?’
뭔가 콕 집어 말하기가 어려웠다.
분위기 때문일까.
그러다 곧 해답을 찾았다.
-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가야 해.
- 어디로?
- 황성 밖으로. 여기선 나도 자유롭게 마법을 쓸 수가 없어서 도와줄 수 있는 게 거의 없어. ……내가 안아 줘도 될까?
마법을 자유롭게 못 쓰는 카밀루스.
정말로 낯설다.
이온은 그제야 평소 그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서 자각도 못 하고 있었던 기운이 억제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서 보니 카밀루스의 손에 마법진이 그려진 장갑이 끼여 있는 게 보였다. 마법사들이 흔히 쓰는 마법 보조용 장갑이었다. 미리 마법진을 그려 놔 시동어 없이 즉발되도록 도움을 주는 장갑이다. 단점이라면 장갑에 그려진 마법 하나에밖에 도움을 안 준다는 점이다.
- 결계 때문이구나.
이온이 나직이 중얼거리자 카밀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재니스가 쳐 놓은 결계 때문에.
제 앞의 카밀루스는 마법이 억제돼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제가 아는 그 카밀루스와 같았다.
하지만 상황이 다르다. 재니스의 황성 결계가 살아 있고, 카밀루스는 그 결계의 억지력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 돌아가자, 이온.
이온은 이전의 꿈에서와 같은 말을 듣고는 똑같이 대꾸했다.
- 집으로?
- 그래, 집으로…… 너에게 가장 익숙한 곳으로.
앞의 진행은 조금 다르지만 꿈이니까 그러려니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중요한 건 맥락이었다. 그 맥락이 이런 맥락이었나 싶은 생각이 든 순간, 이온은 이번에도 짧게 거절의 말을 흘렸다.
- 싫어.
- 왜?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세계의 카밀루스면 왜인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재니스에게서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도 틀림없이 많이 다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