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니스도, 그 옆의 마리엘도 훨씬 강한 이들이니까.
그런 건 싫었다.
고개를 젓자 카밀루스는 실로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온을 어린아이처럼 토닥토닥 달래며 속삭였다.
- 괜찮아, 무섭지 않을 거야.
- 그게 아니라…….
-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나, 엄청 강하잖아.
정말로? 정말로 그래?
현실의 카밀루스였다면 이런 생각 하지 않았을 텐데, 이 꿈속에서의 카밀루스에게는 이런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여기까지 온 것도 무리한 결과인 듯했다.
그래도 이온은 그가 변함없이 저를 찾아 줬다는 것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마음을 놓자 속에 쌓여 있던 불안이 눈물로 드러났다.
- 날 잊지 않아 줘서 고마워.
그러자 카밀루스도 미간을 안타까이 일그러뜨렸다. 그가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 ……여기서, 나가야 돼, 이온.
- 하지만.
- 내가 지켜 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 …….
- 그러니까, 제발 날 믿고 나가자. 지금뿐이야. 다음 기회는 안 올 거야. 응?
카밀루스의 간절한 요청에 이온은 울음을 삼켰다. 갈등이 일었다. 정말로 그의 손을 잡아도 되는 걸까.
- 자, 잘못되면 어떡해? 너도, 나도…….
카밀루스의 손이 어느새 눈물로 젖은 이온의 뺨을 쓰다듬었다. 너무나도 다정한 손길이었다.
넌 이때도 날 사랑했구나.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 만큼의.
어느새 그의 눈시울도 조금 붉어져 있었다.
- 반드시 살려 줄게.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온은 결국 그의 의지 하나만 믿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잡았다. 카밀루스가 곧 그를 안아 올렸다.
그렇게 끝없는 탑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이온 크레이거’가 상태 이상 ‘저주 강화’로 인하여 ‘탈진’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런 메시지와 함께 어떤 징후도 없이 이온이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
카밀루스는 뒤돌아서다가 돌연 맥없이 쓰러져 버리는 그를 추슬러 공작 저로 돌아오는 동안 초조감에 돌아 버리는 줄 알았다.
대체 저주 강화가 왜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왜, 대체 왜…….
한동안 이온이 재니스와 마리엘을 직접 마주친 적도 없었다. 그럼 그 둘은 저주를 건 당사자가 아니란 말인가?
카밀루스 자신도, 크레이거 공작도,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이 이온의 기절에 우왕좌왕했다.
듣자 하니 몸이 늘 안 좋기는 했어도, 최근엔 기절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단다. 물론 자다가 기절하는 걸 두 번이나 직접 확인했던 카밀루스는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불안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이온이 눈을 못 뜨는 시간이 좀 길었다. 자고 일어나는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이온이 실신한 지 만 24시간이 되도록 깨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꽉 채운 이틀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카밀루스는 저주 강화가 된 유력한 원인을 알게 되었다.
페드로의 만류에도 이온이 깨어나지 못하하고 원인도 찾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도저히 참지 못한 카밀루스가 다시금 제 몸의 피를 빼내고 이온의 몸을 살폈다.
그리고 그의 몸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이온의 배에 올라가 있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건 비단 몸이 무리해서만은 아니었다.
그 기색을 알아챘는지 뒤에서 숨 죽인 채 카밀루스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크레이거 공작이 질문을 던져 왔다.
“뭔가 알아내신 겁니까?”
하지만 카밀루스는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아니, 거짓말을 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공작. 나도 이번엔 잘 모르겠군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온의 배 속에서 아이가 자라는 중이었으니까.
아는 순간 눈앞이 새카매졌다. 카밀루스는 배에서 손을 떼어 내고도 한참을 잠든 이온을 내려다보았다.
이온의 창백한 안색이 금세 눈에 들어왔다. 가끔 생각보다 활달하게 움직여서 잊고는 하지만, 이 방에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가늘고 작은 몸을 지닌 그다.
1년 내내 감기를 달고 있는지 조금만 추워도, 말을 많이 하기만 해도 기침을 쏟아 낼 만큼 안 아픈 때가 없었다.
내가 미쳤던 걸까.
그때 그렇게 충동적으로 이온을 안으면 안 되는 거였다.
얼마 전엔 홧김에 아이를 만들까 했었지만 그것도 저주가 풀리고 나서의 이야기였다.
게다가 아이를 가지는 게 이온의 몸 안에 정착해 있는 저주를 더 강화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그 밤에 이온의 안에 제 씨를 뿌리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생각을 이어 가는 사이 아까부터 시야 한구석에서 계속 마구 텍스트를 흘려내던 시스템이 카밀루스를 자극할 만한 내용을 띄워 냈다.
[‘이온 크레이거’의 ‘저주 강화’를 해제할 방법에 대한 탐색을 완료했습니다.]
[1. □□ 죽이기
2. 아이 낳기]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걸 확인한 후 이미 충분히 유추해 냈던 것이다. 카밀루스는 굳이 그것을 눈으로 보여 주는 시스템창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대공.”
그런데 뒤에서 멍하니 있는 그를 지켜보던 페드로가 문득 불러왔다. 뭐냐는 눈빛으로 돌아보니 손목에 감을 붕대를 살짝 당겨 보였다.
저런 건 또 언제 준비했는지.
하지만 덕분에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저를 주시하고 있다는 걸 인식한 카밀루스는 치유 마법으로 제 왼손을 회복시켰다. 그러고 저조해진 기분 때문에 평소보다 더 딱딱한 어투로 선을 그었다.
“붕대 같은 건 필요 없으니 호들갑 떨지 말도록.”
한마디 뱉어 낸 카밀루스는 곧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공작을 돌아보았다.
“공작, 주위를 전부 물려 줄 수 있습니까? 공작과 할 말이 있는데.”
“그렇게 하지요.”
둘만 남아 이야기하자는 말에 공작은 곧장 방 안에 몰려 있던 집안사람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다. 카밀루스도 눈짓으로 페드로에게 나가라고 명했다.
금세 방 안엔 잠든 이온과 카밀루스, 크레이거 공작 세 사람만이 남았다.
카밀루스가 이온을 살피는 동안 착잡하고 답답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던 크레이거 공작은 즉시 그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전하, 무언가 알아내신 거 아닙니까? 그런 게 있으면 말씀을 좀 해 주시지요.”
“그거 관련해서는 나한테 잠시 시간을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건 다른 것입니다.”
“뭡니까?”
“미아블레 후작이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된 거 같은데.”
카밀루스의 말에 공작은 날짜를 셈해 보는 듯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니면 내일일 겁니다.”
미아블레 후작은 일주일 뒤에 도착한다고 했지만, 눈과 추운 날씨 때문에 길이 얼어서인지 조금 지연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하루 이틀 차이다. 수도에 오자마자 카밀루스를 보러 올 테니 곧 나타날 때가 된 건 분명했다.
“……공작, 내 말을 끝까지 흥분하지 말고 들어 줄 수 있나?”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하시려고 이렇게 어렵게 서두를 띄우시는 겁니까.”
카밀루스가 제 옆에 서 있는 공작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다시 이온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가 곧 두 손으로 이온의 늘어진 손을 잡고 들어 올리자 크레이거 공작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카밀루스도 물론 그것을 알아챘지만 멈추지 않고 이온의 손끝에 입술을 내렸다.
이제는 누구의 눈치도 보고 싶지 않았다. 어느 누가 뭐라 하든, 죽음이 가로막지 않는 한 이젠 이온의 손을 놓을 일은 절대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모두가 알게 하고 싶었다.
감히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카밀루스는 붕대가 꽉 감긴 이온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전에 공작에게 알려 주었는데, 기억합니까? 이온의 저주는 시전자를 죽여야 끝이 난다고 했던.”
“뭐, 돌려서 그런 이야기를 해 주셨지요.”
공작의 대꾸에 고개를 끄덕인 카밀루스가 곧 단정적으로 말했다.
“시전자는 재니스, 아니면 마리엘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짐작하던 바입니다만.”
“그런가?”
“전후의 맥락을 보면 그렇게 추론을 안 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