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12)화 (212/317)

황성의 이름 없는 탑에서 카밀루스를 꺼내 오며 얻은 이상한 저주.

탑에서 나오는 과정에서 정신을 잃었던 이온을 데리고 있었던 건 선황이고, 선황의 주변에서 이런 상급 저주를 다룰 만한 인물은 마탑주인 재니스가 가장 유력하다.

하지만 마탑에서 마기를 다루는 일은 금기시하고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 옆을 따라다니는, 마기에 잠식된 마리엘을 보면 저주는 오히려 그녀가 거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카밀루스는 둘 중의 본체가 사실은 마리엘이 아닐까 의심되는 터였다.

온몸이 마기에 잠식되고도 멀쩡하게 걸어다니는 인물.

애초에 존재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수준이다.

“다만 확증이 없고, 둘 중 누군지는 더 오리무중이니 힘든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더는 둘 중 누가 진짜인지 고민하느라 허비할 시간은 없지.”

“그 말씀은.”

“재니스와 마리엘을 둘 다 죽여야겠습니다.”

“…….”

카밀루스의 입에서 살벌한 소리가 흘러나오자 공작은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카밀루스의 파란 눈은 평소보다 훨씬 서늘한 온도를 띠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다. 가볍게 마음먹은 것도 아니다. 둘을 처리하기 위해선 어쩌면 목숨을 내놔야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목숨이 자신의 것만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들과 싸운다면 주변이 초토화되는 건 순식간일 테니까.

“마리엘이야 마탑의 일원으로 제대로 인정도 받지 못하는 모양이니 부담은 없지만, 재니스는 다르지요. 제대로 된 이유도 없이 죽여 버리면 마탑의 마법사들이 전부 다 날 죽이려고 달려들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이젠 상관없습니다.”

의지를 다진 카밀루스는 아직 제 두 손에 잡혀 있는 이온의 작은 손을 꽉 쥐었다.

“내 손으로 마탑마저 무너뜨려 주면 그만이니.”

제 전부를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존재가 있다면 딱 하나였다.

이온 크레이거.

그건 자신의 구원자인 그를 향한 경외와 제 어리석은 과거에 대한 속죄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공작은 그의 무모한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가 제 아들을 위해서 결심한 것이라 해도 카밀루스의 발언엔 확실한 문제가 있었다.

“……학살자라도 되고 싶으신 겁니까?”

그러자 카밀루스가 반문했다.

“마탑 하나쯤 지워 버리는 건 내가 오브라이언의 지존이 되면 문제없지 않나?”

그런 뒤 카밀루스가 이온의 손을 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크레이거 공작과의 거리를 좁힌 뒤 허리를 살짝 굽혀 공작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곧 크레이거 공작의 심장을 싸늘하게 얼어붙게 할 만한 이야기가 카밀루스의 입술을 가르고 나왔다.

“그리고 공작 역시 이제 한배를 타기로 한 것으로 건너들었는데?”

“…….”

“아니면 아직도 버니언과 날 마음속에서 저울질해 대고 있는 건가.”

크레이거 공작은 제 앞의 비렌시움 대공을 지그시 마주 보았다.

카밀루스는 인생의 절반을 탑에 갇혀 살았다.

솔직히 말하면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그가 무언가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반편이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생을 마쳤을지도 모르겠다.

대공이라는 지위가 있어 봤자 뭐 어쩌라는 건가. 그까짓 작위가 모든 영광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선황은 본인이 죽을 때까지 카밀루스를 정통성 있는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생아라는 꼬리표는 여전히 그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다.

그래서 내심 그를 애송이로만 봤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거라고.

저택에 들여놓고서 몇 번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느 정도 놀란 부분도 있었지만, 그에 대한 모든 의구심이 거두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여 제 아들이 무릎까지 꿇어 가며 그를 도와달라고 할 때조차도, 그냥 말도 안 되는 사랑에 눈이 멀어 그러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이온과 각서까지 썼음에도 내심으로는 계속 버니언와 카밀루스를 저울질하는 중이었다.

최선을 고르기 위한 저울질은 아니었다.

그냥, 차악을 고르기 위한 저울질이었다.

버니언이 워낙 개판이기는 해도 카밀루스 역시 검증된 자는 아니다.

그런데 제 속마음을 정확하게 짚어 내는 그 말을 듣고 나니 카밀루스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카밀루스는 단순 애송이가 아니다. 이리저리 휘둘릴 반편이도 아니었다.

“그런 거라면 저울질은 그만 마치고 내게 붙어, 공작. 후회는 절대 하지 않게 해 줄 테니.”

……아무래도 선황이 적은 답지 중, 인생 최악의 오답을 눈앞에 둔 것 같았다.

크레이거 공작은 지금껏 선황이 워낙 예민한 성격이라 남들 보기에 괴악한 것은 둘째 치고,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이런 카밀루스 대신 버니언을 황위에 올린 것을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고인이 된 선황은 이제 후회조차 할 수는 없는 몸이고, 앞으로는 산 사람들의 의지에 따라 세상이 굴러갈 테니 크게 상관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공작은 수년 전의 조그마했던 어린아이가 이제는 저를 내려다보는 것에 격세지감을 느끼며 한숨 섞인 한마디를 내놓았다.

“대공께선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존재십니다.”

그에 카밀루스가 조금 굽혔던 허리를 펴며 제 몸 앞으로 팔짱을 꼈다.

“무슨 뜻입니까?”

제게 붙으라 했으면서 다분히 경계하는 신호를 보내는 카밀루스를 앞에 두고 크레이거 공작은 속으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 태도로 하여금 카밀루스의 저를 향한 신뢰는 이온을 향한 신뢰에 기반한다는 걸 확연히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를 제어하는 목줄 끝이 아들이 손에 쥐어져 있는 게 아니냐고 묻는 듯한 태도. 실은 아주 불쾌했지만, 한편으로는 카밀루스나 저나 같은 처지라는 걸 알기에 공작은 그 부분을 특별히 걸고넘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카밀루스의 이런 통찰력이 어디서 나오느냐가 심히 궁금한 터라 그에 대한 질문을 입에 올렸을 뿐.

“인생의 절반을 탑에 갇혀서 산 분께서 매번 모든 걸 꿰뚫고 있는 듯하니 하는 말입니다. 이제 보니 타고난 건 마법 능력만이 아니신 것 같군요.”

“공작이 내게 그런 시답지 않은 칭찬을 할 줄은 몰랐는데.”

“그건 저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카밀루스를 집에 들일 때만 해도 주변의 정세가 어찌 돌아가지는지 알지도 못하는 인간이 제 아들에 눈이 멀어서 스스로의 가능성을 다 포기했구나 싶기만 했다.

그런데도 그를 저택에 들인 건 그가 어떻게 되든 딱히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공작에게 중요한 건 이온의 안위였다. 카밀루스는 그것을 개선하는 데 답을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한데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지금은 그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여 어떻게 그렇게 되었느냐고, 그런 의미를 담아 쳐다보며 공작이 카밀루스의 다음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문득 카밀루스가 오른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순식간에 힘줄이 불거져 올라온 그 손을 왼손으로 감싸 괜스레 만지작거리던 카밀루스가 길게 콧숨을 내쉬었다.

곧 그가 잔잔한 분노가 깔린 음성으로 이 자리에 없는 이에 대한, 그러나 아마 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공작은 궁금해한 적 없습니까. 내가 왜 아직도 마탑주를 살려 두고 있는 건지?”

“이유가 따로 있는 거였습니까.”

사실 공작도 내심 그가 왜 어렸을 적 저에게 직접적인 폭력을 자행했던 재니스와 마탑을 가만히 놔두는지 좀 의아스럽기는 했다.

다만 그들을 처리하기엔 제 위치가 아직 온전하기 않다고 여겼기 때문인가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카밀루스에게는 명확한 계기가 있었다. 먼 일을 회상하는 그의 파란 눈동자가 꽤 매섭게 허공을 노려보았다.

“탑에서 막 나왔을 때 나는 힘도 없는 애송이였던 주제에 선황에게도, 재니스에게도 분노했었습니다. 사실 분노조차도 힘이 있는 자의 권한이라는 걸 모르고.”

“…….”

“그리고 선황은, 날뛰는 날 제압해서 다시 탑에 가두려고 했었지요.”

이런 얘기는 처음 듣는 터라 공작은 눈썹을 슥 치켜올렸다. 역시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던 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다시는 안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거기엔, 많은 사정이 있었어서.”

많은 사정. 카밀루스는 한마디로 일축했지만, 크레이거 공작은 그 안에 긴 이야기가 숨어 있음을 알아채고 반문했다.

“어떤?”

그러나 카밀루스는 입을 다물었다. 별로 자세히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공작에게는 그 이야기를 들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의 기준에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자가 있다면, 그건 이온뿐이었다.

하여 이야기를 건너뛴 카밀루스는 가볍게 네 통찰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만 도출해 냈다.

“실패를 겪고 난 뒤에야 깨달았지요. 냉정을 찾지 않으면 또다시 당할 뿐이라는 걸.”

말하는 중간에 카밀루스가 하, 하고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내 처지가 바닥인 줄 알았고, 잃을 게 없는 줄 았았지만 더한 지옥이 실제로 있었거든.”

태어나서부터 십수 년을 탑에 갇혀 학대당한 것보다 더한 지옥?

크레이거 공작은 카밀루스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카밀루스가 탑에서 나온 이후의 행적을 공작은 꽤 자세히 알고 있는 편이었지만, 딱히 그가 어디서 더한 좌절감을 느꼈을지 짚이는 바가 없는 탓이었다.

그나마 유력해 보이는 건 황태자궁을 뒤집어 놨던 그 일 정도였다.

“실패는 8년 전의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대공께서 북부로 가야 했던 그 일?”

“북부로 가야 했던 일…….”

공작의 표현을 곱씹던 카밀루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할 수 있겠군요.”

카밀루스의 말엔 또한 크레이거 공작이 생각하고 있을 그것과는 의미가 좀 다르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크레이거 공작도 이 이상 호기심을 채울 생각을 하진 않았다. 자세한 사정도 모르고 함부로 입을 댈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고 느낀 것이다.

다음에 이어진 말을 생각하면 더더욱.

“공작, 사실 난 재니스를 볼 때마다 찢어 죽이고 싶은 충동이 입니다.”

“…….”

“나에게 지킬 것이 없었으면 이미 한참 전에 이성을 잃었겠지. 하지만 그 끝에 기다리는 게 누구의 파멸인지는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겨우 나 자신을 억누르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가 봤던 끔찍한 지옥의 모습을, 절망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제 상황을 마치 제삼자처럼 퍽 냉정하게 평가한 카밀루스가 눈을 굴려 도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재니스의 이야기를 떠올릴 때의 그 서늘한 기운은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어쨌든, 더 긴말은 필요 없겠지. 내가 미아블레 후작을 설득할 테니 공작은 그와 손을 잡아요.”

크레이거 공작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제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카밀루스는 실은 꽤 무서운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온과 자신의 부하들, 그리고 제 딸까지. 몇몇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너그럽고 양순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다.

그런데 재니스와 마리엘을 죽인다든가, 마탑을 없애 버리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모습은 그런 순함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 보였다.

대체 카밀루스 클로델의 그 독함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