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이 권력을 잡으려는 이유는 뭡니까? 원래는 본인이 것이 되어야 하는 것에 대한 소유권 주장을 하려는 겁니까?”
“내가 그런 유치한 짓을 할 거 같습니까.”
“아니면 선황에 대한 복수인지?”
“그런 거라면 차라리 재니스와 마탑에 대한 복수라고 하는 편이 낫겠지.”
“그럼?”
연신 토해 내진 공작의 질문에 카밀루스가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간단히 답했다.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고 도로 이온이 누워 있는 침대 근처에 가져다 둔 의자에 앉았다.
그가 다시금 이온의 손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는 걸 보며 공작은 역시나 이번에도 답이 뻔한 질문인 것 같았지만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중에서도 제 아들이겠지요?”
카밀루스가 공작을 힐끗 곁눈질하더니 희게 실소를 흘렸다.
“잘 알고 있어 다행이군요. 혹시 공작이 망각한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말에 가시가 잔뜩 돋친 것이 느껴졌다. 그 가시의 표적이 저임을 단숨에 눈치챈 크레이거 공작이 저도 모르게 움찔한 기색을 보였을 때였다.
“공작, 뒤에서 개수작 부릴 생각 하지 협상할 게 있다면 나와 해요.”
공작이 최근 카밀루스의 뒤에서 개수작, 이라는 표현을 들을 만한 짓을 한 건 이온과의 각서 얘기밖에 없었다.
제 아들이 설마 그에게 이런 것까지도 미주알고주알 말해 줄 정도인가 싶었던 크레이거 공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밀루스는 제 할 말만을 이었다.
“난 이온의 눈에서 피눈물 흘리게 하는 인간들을 가만둘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알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내 충고를 듣는 게 좋을 거야.”
“절 협박하시는 겁니까?”
“아니, 나 또한 클로델 황가의 피가 흐른다는 걸 잊지 말라는 경고지.”
“…….”
역대 왕조를 생각해 보면 클로델 황가가 오브라이언을 다스리는 방식은 굉장히 과격한 편이었다. 카밀루스는 그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크레이거 공작은 어처구니가 없어져 실소를 흘렸다.
“지금 저한테 발톱을 드러내는 게 대공께 그리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러다가 내가 널 안 도우면 어쩔 거냐는 공작의 질문에 카밀루스는 여유롭게 받아쳤다.
“내가 대안도 없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가 본데, 공작도 자만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기묘한 발언이었다.
설마 카밀루스가 손에 쥔 패가 더 있나? 그것도 자신을 황위에 올릴 만한 패가.
‘혹시 반정을 일으키려는 건가.’
첫 번째 안은 크레이거 가문의 지지를 받으면서 평화롭게 황위에 오르는 것이지만, 그게 여의치 않으면 힘으로라도 갖겠다?
황성의 결계까지 제 손에 넣은 그이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대본일지도 몰랐다.
다만 그런 것이라면 크레이거 공작은 굳이 논쟁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은 서로 자존심만 내세우는 소모적인 대화 거리에 불과할 테니.
하여 일단은 그가 먼저 한 걸음 물러났다.
“제 아들에 대한 건 말씀대로 나중에 시간 내어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지요, 대공.”
“뭐, 그러도록 하지.”
별 관심 없다는 양 대꾸하는 카밀루스의 말을 듣고 공작은 곧 방 밖으로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은 순식간에 적막감에 잠겼다. 그에 카밀루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이온을 내려다보았다.
곧 이온의 가슴 위에 카밀루스의 손이 조심스레 얹어졌다.
얼마 안 가 숨이 끊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아주 옅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그곳에.
색색,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숨소리를 들으며 카밀루스는 한참을 그 자세로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이온…….”
겉으로 보이는 건 분명 눈을 감고 조용히 자고 있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온이 제게서 뒤돌아 걸어가다가 줄 끊어진 인형처럼 한순간에 쓰러지던 광경이 뇌리에 깊게 각인된 터라 두려움이 일었다.
이대로 네가 영영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싶어서.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도 자신이 힘겹게 꺼낸 고백을 듣고 차갑게 식어 버렸던 이온의 얼굴을 떠올리면 또 심장이 저미는 듯이 아파 왔다.
〈그동안 날 기만하고 있었어?〉
이후로 몇 번을 곱씹어 봤지만 이온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정말 갈피가 안 잡혔다.
짐작할 수 있는 건 최후이자 최선이라 여겼던 자신의 선택이 아마도 많은 것들을 어그러뜨린 것 같다는 사실뿐이었다.
대체 뭐가 얼마나 뒤틀렸는지 카밀루스도 아직 다 파악을 못 한 상태였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이런 대가를 치르라는 하는 건 역시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닐까.
무엇보다 이온이 때때로 자신을 의심하는 것은 제게는 너무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에게 비는 것이 전부다. 이온의 너그러움에 기대는 일 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다.
“내가 무조건 잘못했어.”
이온의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죽을 것 같은 행복을 느끼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맛보고는 한다.
그렇지만 설령 이온이 저를 욕보이고, 나아가 증오하게 된다 하더라도 자신은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문제는 곁에 있으면서 그가 아파하는 모습을 매번 들여다봐야 하며, 그 원인을 제가 제공했다는 것에 매 순간 비참함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너는 알까.
네 모든 순간을 지켜보는 내내 속죄를 바라는 나다.
네 존재 자체가 나의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거라서.
그럼에도 카밀루스는 그 지극한 괴로움에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이온 크레이거를 너무나 사랑했다.
이온이 제 고백을 어느 정도의 무게감을 받아들이고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렇지만 제 전부를 줄 수 있다는 말을 뱉었을 때 단 한 순간도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카밀루스는 이온의 차가운 오른손을 제 두 손으로 꼭 쥔 채 고개를 떨궜다.
[‘이온 크레이거’가 ‘탈진’ 상태에서 벗어날 확률을 조회 중…….]
[……75퍼센트입니다.]
* * *
당연하지만 눈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건 제 방의 천장이었다. 이온은 아직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며 생각 하나를 떠올렸다.
‘이런 식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탑에서 나온 직후에 마법을 썼다는 카밀루스의 고백을 듣고서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제가 이 몸에서 눈을 뜬 게 바로 그 시점이었으니까.
그가 대체 무슨 마법을 썼는지까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이전의 맥락들을 고려하면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제 기억이 없는 이유를, 그는 알고 있다.
다만 카밀루스가 죽고 못 사는 이온 크레이거 대신 다른 영혼을 이 몸에 넣었을 리는 없으니 그것까지는 의도한 바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 무슨 행동을 취했을 터였다.
‘마법이 잘못 시전된 결과였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제 처지가 더 비참하게 여겨졌다.
이성이 마비된 느낌이었다. 카밀루스를 계속 앞에 두면 그에게 신경질만 낼 것 같아 멀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화를 하자며 매달리는 그의 손을 뿌리친 거였는데.
이온은 눈을 굴려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결국 제자리다.
카밀루스가 양손을 모아 이온의 손을 꽉 쥐고 있었다.
고개 숙인 모습을 보니 혹시 잠이 든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얼마나 곁을 지키고 있었던 걸까.
이쯤 되니 제가 아플 때 저택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 카밀루스에게 간병의 역할을 맡기는 것이 좀 우습다는 생각도 들었다.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자, 어깨를 움찔한 카밀루스가 바로 얼굴을 들었다. 그는 이온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온, 깨어났구나.”
이온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걸 보고는 카밀루스가 협탁에 가져다 놓았던 물이 담긴 접시와 숟가락을 들어 이온의 입 안을 축여 주었다.
조심조심 떠먹여 주는 물을 목구멍으로 천천히 몇 번 삼킨 뒤 이온이 쉰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얼마나 지났어?”
“이틀 하고 몇 시간 더.”
다행히 염려했던 것에 비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기절했을 때 가끔은 일주일 이상 날아가 버릴 때도 있으니 양호한 편이다.
다만 이것저것 신경 쓸 것이 많은 때라 누워 있었던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긴 했다.
미아블레 후작은 왔다 갔을까. 도착할 때가 됐는데.
그런 의문을 떠올리고 있는데, 이온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던 카밀루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첫마디로 들려온 것은 사과의 말이었다.
“……미안해.”
이온이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는데도 어찌 된 게 카밀루스의 이 습관은 고쳐지질 않았다.
“어디서부터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내가 그, 너한테 마법을 건 사실을 숨긴 건.”
왜인지 잠자코 들어 줄 수가 없어 이온이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