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시스템이 알려 줘서 이온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이온은 그리 놀란 기색 없이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한데 카밀루스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좀 심상치 않았다. 저주 강화랑 자기랑 별 상관이 없을 텐데 왜 저러나 싶어서 이온이 뚱한 표정으로 빤히 보았다.
카밀루스는 영 말하기 어렵다는 듯이 머리까지 쓸어올렸다.
“아무래도 그 원인이 말이야.”
보는 사람 속 터질 만큼 카밀루스는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에 답답해진 이온이 대충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생각을 이성으로 정제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입을 통해 내뱉었다.
“왜, 내가 임신이라도 해서 그런 거야?”
말하면서도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고 여겨서 딱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가볍게 이야기한 거였는데…….
이온이 무심코 던진 말을 들은 카밀루스가 흠칫하며 과도하게 눈을 크게 떴다. 돌에 맞은 개구리 같은 표정이었다.
이온은 그 반응을 발견하고는 눈썹을 꿈틀했다. 어안이 벙벙해져 괜스레 별것 없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제 납작한 배를 내려다보았다가, 도로 카밀루스를 마주 보았다.
“……설마, 진짜로?”
아니지?
그런 생각을 하며 카밀루스에게 눈으로 답을 재촉했다. 그렇지만 돌아온 대답은 카밀루스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긍정의 답이었다.
“…….”
“…….”
둘 사이에 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온은 면목없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인 카밀루스를 보면서 무어라 말해야 할지 한참을 헤맸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하나?
그렇다기엔 내 앞길이 막막해졌으니 그 위로는 내가 받아야 마땅하지 않나?
그런 쓰잘머리 없는 생각을 이어 가다가 겨우 한마디를 흘렸다.
“너…….”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냐고 묻는 표정으로 카밀루스가 시선을 살며시 올렸다. 그에 이온은 멍한 얼굴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말을 툭 뱉었다.
“진짜 대단하네.”
한 번 만에.
비정상적으로 큰 걸 봤을 때부터 당연히 이런 가능성을 상정해 뒀어야 하는 건데.
말뜻을 알아들은 카밀루스의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그가 입술을 지분거리다가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던 이온의 손을 끌어가 꽉 움켜쥐었다.
“내가, 내가 책임질게.”
“그건 기본인데?”
그럼 애 낳게 하고 책임도 안 지는 쓰레기가 되려고 했냐는 물음에 카밀루스가 짙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소공작을 평생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이온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 * *
미아블레 가문의 영지는 수도에서 서부로 약간 치우쳐 있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서부에 공국이 위치한 크레이거 가문과는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들도 굳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따진다면 황실파이기는 했으나 그것도 로제니아 황후가 탑에서 뛰어내린 다음부터는 유명무실해진 이야기였다. 그들 자체가, 그러니까 전대 후작 부처가 그대로 칩거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후작은 그들의 첫째 아들로, 로제니아의 오빠였고 본인은 아직 모르겠지만 카밀루스의 삼촌이었다.
‘삼촌…….’
지금껏 딱히 누군가에게 혈육의 정이라든가 가족 간의 유대감 같은 것을 느껴 본 적 없는 카밀루스는 미아블레 후작과의 관계를 괜히 입 안으로 곱씹어 보았다.
후작이 수도에 도착했다는 전언이 온 것은 오늘 아침.
여장을 풀고서 오후에 오겠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걸 전해듣고 크레이거 공작 역시 군소리 없이 카밀루스에게 응접실을 내주었다.
간단한 손님 맞이 준비가 거의 완료되고, 응접실 안에는 이제 카밀루스와 페드로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잠시 소란이 지나간 뒤 여유를 되찾자 페드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로 저희가 훔친 물건을 찾으러 오는 걸까요?”
“그게 아니면 지금 시점에 온다는 걸 설명하기 어렵기는 하지.”
이야기하면서 카밀루스는 테이블 아래에 둔 작은 왕관을 잠깐 내려다보았다.
지난번 이온이 손대려고 했다가 저항 마법이 발동되는 걸 알고는, 이후에는 크레이거 공작가에서 얻은 유리 상자에다가 도로 넣어 놓았다. 누군가 함부로 넘보다가 진짜로 손이라도 잘리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도 카밀루스는 종종 꺼내서 왕관을 들여다보았지만, 몇 번을 확인해도 물건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기란 어려웠다.
어쩄든 이온과 카밀루스는 왕관과 레갈리아가 한 묶음일 거라고 추측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마도 같은 보석을 이용해서 꾸민 두 가지를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데 대체 미아블레 후작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할 무렵, 드디어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는 전언이 안쪽에 들려왔다.
“대공 전하, 미아블레 후작이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페드로와 카밀루스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문 쪽으로 향했다. 얼마 안 가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섞인 희미한 소음이 방 앞으로 다가왔다.
가벼운 노크가 울린 뒤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고, 곧 크레이거 공작과 미아블레 후작의 모습이 비쳤다. 아마도 손님의 뒤를 조용히 뒤를 따라왔을 이온과 에밀리의 모습 역시도.
“자, 후작. 안쪽에 계신 분이 비렌시움 대공 전하시네.”
크레이거 공작이 손짓으로 카밀루스를 정중히 가리키며 하는 말에, 카밀루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을 돌렸다.
그러고 미아블레 후작을 발견한 카밀루스는 잠시 멈칫했다.
그가 낯선 상대를 불렀다.
“……미아블레 후작?”
“비렌시움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오브라이언의 예법에 맞추어 공손하게 인사하는 상대의 몸짓을 카밀루스가 물끄러미 눈으로 좇았다.
언젠가 황실 일람에서 어머니의 작은 초상을 보고서 그녀와 똑같이 생긴 게 맞을까 고개를 갸웃한 적이 있었는데…….
카밀루스는 제 옆의 페드로를 슬쩍 확인했다. 그러자 페드로가 카밀루스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가 도로 내렸다.
그 초상의 이미지가 아마도 실제 어머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걸, 현 미아블레 후작의 모습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단정함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 홍채의 모양이 보일 정도로 밝은 갈색빛이 눈동자.
이제 막 40대에 들어선 듯한 꽤 젊은 나이의 그는 꽤 준수한 미중년이라 할 만했다.
카밀루스가 몸을 돌림에 따라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 들어온 미아블레 후작은 자연스럽게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송구하게도 제 부인은 영지에서 출발이 좀 늦었던 터라 함께 오지 못했습니다, 대공 전하. 아시다시피 황실 연회가 머지않아 준비할 것이 많았던 탓에.”
반대로 말하면 그 준비할 것을 전부 부인에게 미뤄 두고서 미아블레 후작은 카밀루스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었다.
아주 급하게.
카밀루스는 후작의 말을 듣고는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담소를 나누기에는 더 좋은 환경이 됐군요.”
그러고 닫히는 문 쪽을 힐끗했다. 순간 이온과 눈이 마주친 카밀루스가 서둘러 하인들을 제지했다.
“잠깐. 소공작?”
“……예, 전하.”
이온을 부르는 소리에 닫히던 문이 도로 열렸다. 뒤돌아가려던 크레이거 공작도 카밀루스를 의아해하는 눈으로 보았고, 그건 이온도 마찬가지였다.
예정에 없던 일이 벌어지자 이온이 뭐냐는 눈빛을 보내왔지만 카밀루스는 설명하는 대신 후작을 돌아보며 요청했다.
“자리에 소공작도 함께하고 싶은데 그렇게 해도 되겠는지?”
“예? 아, 예…… 그렇게 하십시오.”
예정에 없던 사람을 안에 들이겠다는 말에 미아블레 후작이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귀족 사회에서는 썩 무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공의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는 탓에 미아블레 후작은 떨떠름해하긴 했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보고 이온도 좀 꺼림칙했으나 일단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카밀루스는 이온에게 제 옆자리를 내어 주며 자연스럽게 먼저 소파에 앉았다.
이온은 붕대를 아직 풀지 못한 오른쪽 손목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미아블레 후작과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카밀루스가 먼저 말꼬를 텄다.
평소 카밀루스의 스타일대로, 딱히 이리저리 돌리지 않은 첫마디가 흘러나왔다.
“이걸 불미스러운 일로 마주 봤다고 해야 할지, 사실 잘 모르겠군요.”
“…….”
카밀루스가 먼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미아블레 후작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정작 말을 뱉은 카밀루스는 페드로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페드로, 물건을.”
그에 페드로는 주군의 요청대로 밑에 내려놓았던 유리 상자를 집어 테이블 위로 올렸다.
작은 왕관을 발견한 미아블레 후작의 미간이 조금 좁혀지는 것이 보였으나 카밀루스는 입가에 약간의 웃음기를 비치며 계속 태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후작, 이걸 찾으러 온 것 아니었습니까?”
“……정말로 대공께서 가져가셨던 거군요.”
아마 미아블레 후작도 카밀루스를 찾아오면서 반신반의했던 모양이다. 그는 왕관과 카밀루스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한숨 지었다.
아주 많은 의미가 담긴 한숨이었다.
그렇지만 분명 도둑놈을 앞에 둔 분노는 그 안에 없었다.
다행한 일이었다. 후작에게 더 중요한 다른 용건이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리고 그건 분명 카밀루스와 이온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이온은 서로를 묵묵히 바라보기만 할 뿐 선뜻 더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두 사람을 보며, 카밀루스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대략 짐작했다.
카밀루스도 제 ‘삼촌’이라는 사람과 어떻게 말을 풀어야 할지 이 이상으로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온은 급격하게 어색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카밀루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대공 전하, 제가 대신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되돌아오는 말에 이온은 역시나, 하면서 맞은편의 미아블레 후작을 확인했다.
“후작 각하, 이런 말은 조금 당황스러우실 수 있겠지만…… 저희 크레이거가는 여기 있는 비렌시움 대공과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크레이거 공작가는 대표적인 친황실, 친황제파 아니었습니까?”
“물론이지요.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고요. 저희의 이 지지는 기존의 기조와 위배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