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온의 말에 후작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머리가 있다면 이온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대강 알아들었을 것이었다.
그가 신음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대략 짐작은 하셨겠지만 대공께서 가지고 계신 그 물건은 우리 미아블레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입니다. 이 오브라이언 제국의 역사보다도 오래된 물건이지요.”
후작은 숨을 크게 들이켠 뒤 이내 품에서 하얀 천에 감싸인 무언가를 꺼냈다.
테이블의 유리 위에 묵직한 무게감이 있는 물건이 올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미아블레 후작은 테이블 한가운데 올려놓은 그것을 내려놓은 뒤 카밀루스를 바라보았다.
“전하, 이것을 직접 열어 보시겠습니까?”
후작의 요청에 카밀루스는 그것을 힐끗하다가 이내 손을 뻗어 천천히 천을 헤쳤다.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온은 작게 숨을 삼켰다.
레갈리아였다. 그림으로만 봤던, 한 뼘 크기의 작은 미아블레 가문의 가보.
촘촘히 박힌 물빛의 보석이 오후의 햇볕을 받자 흐르는 물 위의 윤슬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실제의 모습은 그림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색이 밋밋해 보이면서도 레갈리아의 둥근 끝에 박힌 보석의 반짝거림은 저절로 눈길을 끌었다.
황제의 레갈리아와 한쌍이지만 이쪽은 화려하기보다는 단아한 느낌이다.
이온은 그걸 보면서 자연스럽게 욤뇽이의 물빛 보석안을 떠올렸다. 햇볕을 받으면 참 예쁜.
‘그러고 보니 욤뇽이도 왕관을 가지고 놀았었잖아.’
이온이 닿았을 때의 저항감이 카밀루스와 욤뇽이가 만질 때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설마 욤뇽이가 블랑셰인 걸까.
아무리 잘 봐줘도 욤뇽이의 현재 모습은 오브라이언의 건국을 도왔다는 전설의 동물……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아주 멀지만, 성체가 되면 다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욤뇽이의 엄마가 블랑셰였다든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쪽은 가능성이 꽤 높아 보였다. 게다가 욤뇽이의 순진함, 잔망스러움, 귀여움과도 위배가 안 돼서 마음의 안정이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을 켜켜이 쌓아 가고 있는 와중, 카밀루스가 먼저 입을 열어 의문을 표했다.
“이 왕관과 레갈리아, 혹시 용도가 따로 있습니까?”
질문을 받은 후작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가문에 따로 이야기가 내려오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의식을 치르는 용도가 아닐까 싶지요.”
그러고 후작이 고개를 들어 카밀루스를 마주 보더니 입술로 조용히 미소를 그렸다. 카밀루스는 그에 맞추어 고개를 들고 눈길을 맞추었다가 차마 함께 웃어 주지는 못하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성별은 다르지만 초상의 어머니와 묘하게 닮은 미아블레 후작을 보고 있자니 가슴에 묵직한 돌이 얹혀지는 느낌이었다.
저를 낳고 스스로 탑에 올라가 뛰어내렸다는 그녀를 그냥 머릿속으로 떠올리기만 했을 때는, 솔직히 말하면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먼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로제니아 황후와 얽힌 탑에 대한 이야기를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인식이 생기기 전부터 종종 들어 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의 후작을 보니 그 감회가 남달랐다.
어쩌면 제 곁을 늘 지켜 주는 페드로와 비슷한 나이대의 삼촌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현재 미아블레 후작이 카밀루스의 모습 너머로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 건지 예상이 됐다.
곧 그의 입에서 바로 그 이름이 흘러나왔다.
“눈꼬리가 좀 비슷한가 싶기는 하네요.”
“…….”
“그 아이, 로제니아와.”
그 이야기를 듣자 선황의 기억이 끌려 나왔다.
〈넌 네 어미를 참 닮았다.〉
저를 보면서 항상 그녀를 그리워하던 아비의 말이.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감상에 빠지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뼈마디가 다 보이는 삐쩍 마른 손으로 제 뺨을 쓰다듬던 소름 끼치는 그 감각도 함께 끌려 나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이 대화가 오히려 거북해져 버린 카밀루스는 냉정을 되찾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난 후작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실 후작의 용건은 간 크게 저택에 숨어들어서 미아블레의 가보를 도둑을 확인하러 오는 것이었다. 상대가 누군지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다지만 다짜고짜 첫 만남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는다니, 카밀루스가 후작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좀 황당할 것 같았다.
하지만 후작은 이 역시도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듯 태연히 대꾸헀다.
“무슨 도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시다시피 현재 우리 가문은 그렇게 영향력이 크지는 않은 터라…….”
몇 년간 칩거하다시피 살아오기도 했고, 미아블레 가문은 제국 초기에도 군사권을 나눠받지는 않았다.
신을 모시는 건 아니니 딱 맞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굳이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성직자 집안이었다.
가문 대대로 내려왔다는 물 속성의 마법 능력도 이제는 유명무실해졌다. 실제로 미아블레 후작은 잔재주만 조금 부릴 수 있을 뿐 그렇게 훌륭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물론 카밀루스 역시 저간의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바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후작이 제게 미아블레 가문의 피가 섞여 있다는 걸 증명해 줬으면 합니다.”
동시에 아주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
카밀루스가 제 조카라고 생각은 했어도, 이 자리에서 차마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는지 후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공 전하, 설마…….”
그러자 카밀루스는 입가에 슬쩍 냉소를 비쳤다.
“선황이 내가 본인의 아들이라는 것까지는 부정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안 그런가?”
이온은 그런 그를 약간 불안해하는 눈으로 보다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후작께서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일이 모두 끝난 다음에…….”
뒷말은 후작이 이었다.
“대공 전하의 정통성을 증명해 달라는 것이군요.”
이온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가 눈짓으로 탁자 위에 놓인 레갈리아와 왕관을 가리켰다.
“이 두 가지는 미아블레의 피가 흐르지 않으면 만질 수 없는 것이죠?”
“……아마도. 직계로부터 너무 멀어져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모자람도 넘침도 없는, 제가 원하는 그대로의 정답을 들은 이온이 미소 지었다.
“대공에겐 바로 그 한마디가 필요한 거예요. 후작께서 도와주실 수 있나요?”
“…….”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을 것이기에 후작은 한동안 선뜻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렇지만 카밀루스가 조카일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바로 편지를 보내온 것을 미루어 볼 때 미아블레 후작이 거절할 가능성은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았다.
한데 미아블레 후작이 대답을 보류하고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대공 전하, 실례지만 이 두 물건의 용도가 정확히 뭔지는 알고 계십니까?”
혹시 거절을 하고 싶은 걸까.
이온은 내심 당혹스러워하면서 카밀루스를 돌아보았다. 카밀루스는 그와 눈길을 한 번 주고받고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성전과 관련됐을 거 같긴 하더군요. 아마도 블랑셰를 섬기는 이들이 제를 올릴 때 쓰거나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성전에는 제단이 없습니다.”
후작의 대꾸에 카밀루스가 눈썹을 움찔했다.
“설마, 성전의 구조를 알고 있나?”
“본가에 구조도가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성전이 무너진 지금에야 별로 의미도 없는 기록이지만.”
순간 카밀루스의 안색이 바뀌었다.
후작은 의미가 없다고 했지만 카밀루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황성의 이름 없는 탑으로 가기 위한 거의 유일한 길이었으므로.
황실 도서관에서도 찾기 어려웠던 그것이 미아블레 가문에 있었다니. 그야 발견할 만한 가장 유력한 곳이기는 했지만, 후작이 이렇게 쉽게 그 실체를 확인해 줄 줄은 몰랐다.
당장 그 구조도를 그려 줄 수 없겠느냐고 채근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카밀루스가 후작의 말에 대꾸했다.
“그래서, 그 용도가 무엇이지?”
“저도 두 눈으로 확인해 볼 기회가 없었으니 정확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걸 물려받을 때 후계자들이 전해받는 이야기가 있는데…….”
서두가 너무 길어서 답답했지만, 카밀루스도 이온도 일단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이 왕관과 레갈리아는 블랑셰 그 자체라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조금 긴장까지 하며 듣고 있던 카밀루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미아블레 후작이 넌지시 설명을 덧붙였다.
“블랑셰는 전설의 동물이지요. 하지만 전설이란 원래 실체가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한마디로 실제로는 그 레갈리아와 왕관을 두르고서 인간이 힘을 썼을 것이다, 그런 건가?”
“영민하십니다, 전하.”
“…….”
그 나름의 칭찬을 받은 건데 카밀루스는 묘하게 떨떠름해졌다.
블랑셰의 전설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굳이 성전을 지을 이유가 없었을 텐데. 게다가 그 실체가 인간이라면 황실이 왜 성전을 만들어 받들기까지 했겠는가? 여러모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 말은 어폐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후작.”
“일단 저는 그렇게 해석했지만, 다른 것일지도 모르기는 하지요. 한데 제가 진짜 드리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닙니다.”
“그럼?”
후작의 눈이 천 위에 가지런히 놓인 레갈리아를 내려다보며 예상치 못한 한마디를 내놓았다.
“이 레갈리아는 가짜입니다.”
“뭐라고……?”
카밀루스가 놀라 외마디 물음을 뱉었다. 그 반응을 보고 후작이 이온에게 레갈리아 쪽을 손짓했다. 만져 보라는 의미였다.
그에 이온이 마른침을 한번 삼켜 내고는 물빛 보석이 박힌 레갈리아에 손을 가져다 댔다. 과연 왕관과 달리 아무런 변화도 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후작이 씁쓸히 웃었다.
“몇 년 전에 도난당했습니다.”
대체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