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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18)화 (218/317)

그러다가 아스타틴이 신나게 깨졌지만 칼은 그를 지켜 주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겨우 버니언이 아스타틴을 면직하려는 걸 막는 정도였다.

그 와중에 아스타틴이 꽃병으로 머리를 얻어 맞아서 가벼운 뇌진탕을 겪었고, 며칠째 제 숙소에서 요양 중이었다.

방금 전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누워 있는 그를 놀리다 왔지만 칼도 마음이 그리 편한 건 아니었다.

‘연회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데…….’

성질 급한 버니언이 그 정도의 시간을 기다려 줄까?

게다가 요즘 태후와 대공의 일탈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얼마 전에는 버니언이 제 어미한테도 욕을 갈겼다는 후문이었다.

현재 버니언은 사방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제 적으로 보일 것이다.

비렌시움 대공은 물론이고 태후에, 말 안 듣는 제 기사들과 마땅히 지지해 줄 줄 알았던 크레이거 공작가까지.

배신의 징후를 품고 있는 그들 사이에서 있으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손버릇이 나쁘지만 않았다면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처럼 예민하게 구는 그를 어느 정도 이해해 줄 만한 측면도 있었다.

어쨌든 오늘은, 칼 나르바에스도 그 나름의 생명 연장을 하러 온 셈이었다.

마침 원하던 것이 시야 끝, 황성 검문 행렬 끝에 덧붙어졌을 때였다. 동행하는 기사 역시 그것을 발견하고 손으로 가리켰다.

“단장님, 저기 후작의 마차인 듯합니다.”

칼은 그에 성곽에 기대어 있던 몸을 세우며 서둘러 계단 쪽으로 향했다.

“내려가자.”

“예.”

유난히 북적이는 인파를 헤치고 칼을 위시한 기사들이 겨우 성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갔다.

성문 밖에 뜬금없이 노아기사단이 등장하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구경거리가 났다는 듯 시선을 모았지만, 칼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제 목표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파란색 휘장이 드리운 마차 앞에 도착한 그가 걸음을 멈추자 마차 주변을 둘러싼 한 무리가 잔뜩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가 멈춘 곳은 북부 이엘라엠을 다스리는 피에트로 후작 가문의 마차 앞이었다. 칼은 다짜고짜 후작에게 인사말을 외치기보다는, 누구든 나오라는 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얼마 안 가 뒤의 마차에 타 있던 후작의 시종이 먼저 튀어나왔다.

후작가의 시종이니 못해도 상대의 신분 역시 자작 정도는 될 테지만, 황실의 신뢰를 받는 노아기사단의 명성에 따라 상대는 일단 존대를 써 왔다.

“노아기사단에서 무슨 일입니까?”

칼이 그의 쪽으로 몸을 돌린 뒤 가슴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예, 보시다시피 저는 노아기사단 소속의 칼 나르바에스 단장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기사단 소속의 기사라고만 생각했지, 기사단장이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후작의 시종은 놀란 기색이었다.

상대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것을 확인하며 칼은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했다.

“오랜만에 황도에 오신 피에트로 후작 각하와 잠시 담소를 나누고 싶은데, 가능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아마 마차 안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앞을 가로막았으면 담소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밝혀야 하지 않나.”

울림통이 큰 것 같은, 중후한 목소리였다. 정갈하면서도 끝이 완고한 그 음성은 이제 50대가 다 되어 가지만 상대가 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님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칼 나르바에스는 긴장하는 기색 없이 마차의 입구 쪽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물론 비렌시움 대공의 일입니다, 각하.”

“…….”

“각하께서 대공을 지지하고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오브라이언의 황제 폐하께서 무척 심기 불편해하고 계셔서 말입니다.”

칼의 말이 끝나자 안쪽에서 마차 문을 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시종이 눈짓하고, 후작가의 기사들이 마차의 휘장을 걷고는 문을 열었다.

마차 안에는 자세를 꼿꼿하게 세운 채로 앉아 있는 후작이 보였다. 그가 눈만 굴려 칼 나르바에스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디 갈 만한 상황은 아니니, 이곳에서 대화를 하는 게 좋젰지?”

칼은 후작이 들고 있는 지팡이를 힐끗했다. 중간에 약간의 미세한 금이 그려져 있는 걸 보면 안에 비수가 숨겨져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칼은 기꺼이 후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대답한 그는 후작가 기사들의 살벌한 눈초리를 받으며 마차의 입구를 걸어갔다.

그러면서 떠올렸다.

얼마 전, 마리엘과 재니스를 만난 이후의 어느 날을.

저녁 늦게 인적 드문 길거리를 걸어가던 와중 이온 크레이거가 제 기사와 함께 나타나 칼의 앞을 가로막았었다.

찬 바람을 맞아서 자꾸 기침이 나온다며 말소리를 쉬이 잇지 못하던 크레이거 가문의 병약한 도련님은 그 초록빛 눈만큼은 어둠 속에서도 맑게 빛냈다.

그러면서 물었다.

〈칼 나르바에스, 당신이 진짜로 섬기는 사람은 누구죠?〉

내황성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세세하게 알고 있던 이온이 그런 질문을 던졌을 때, 칼은 순간적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불경하게도, 제 충성의 대상은 아직도 선황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그리 좋은 황제로 평가받지 못하는 그다.

또한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아버지로서 좋은 사람도 아님을 인정했다. 황태자는 개차반으로 길러 내고, 사실은 적통인 첫째 아들은 사생아 취급을 하며 평생을 고통받게 했다.

그렇지만 세상 누구보다도 자신을 인정해 준 사람인 그를, 칼은 경외했고 또한 존경했다. 그것 아스타틴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그 아들인 버니언의 뒤를 닦아 주는 거였다.

그러니 이온 크레이거의 그 질문은 아주 적절했고, 또한 의표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이어지는 말 또한 그간 칼이 못내 불편해하던 부분을 긁어 주었다.

〈선황 폐하를 마음 깊이 따르고, 그 유언을 들은 다섯 증인 중 한 사람으로서 칼 단장은 유언의 의미가 무엇인지 끝없이 고민했었겠죠. ……그래서 그 결론은 뭐였죠?〉

마음속으로 대략 짐작은 하면서도, 차마 결론 내리지 못한 그를 일깨우는 발언이었다.

칼은 이온의 질문에 침묵했지만, 이온에겐 그 침묵이 대답이 되었을 것이다.

〈여전히 그 유지를 받들 생각이 남아 있다면 대공을 도와요.〉

물론 당신이 돕지 않아도 딱히 상관없다고 했던 이온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게 지금의 당신에게 거의 유일하게 남은 소중한 존재를 지킬 방법이기도 할 테니까.〉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짧은 대답만 내놓으며 적당히 상대방을 무시하지 않는 정도의 대응만 하고 있던 칼은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제 소중한 존재가 누군지는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칼은 황도 출신이 아니었다. 오브라이언 땅 중에서도 남부 끝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 출신이었다. 현재 그에게는 가족이라고 부를 만한 이도 딱히 없었다.

아마, 선황은 칼의 그 부분을 특히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다.

지킬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으며 딱히 욕심도 없어 무엇에도 얽매이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그의 특성을 말이다.

그런데 저를 잘 알지도 못하는 이온 크레이거가 옅게 미소 짓더니 물었다.

〈아스타틴 아닌가요?〉

이온은 이전에 아스타틴과 대화를 하고 나서 무언가 답을 얻은 모양이었다.

칼은 그 순간 입을 싹 다물어 버렸다.

〈아스타틴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던데요.〉

제 앞에서 칼 단장을 언급하는 아스타틴의 모습이 꼭 주변에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고 했었다. 칼은 예의 ‘누군가’가 대공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어쩄든 대체 아스타틴이 뭐라고 했길래 이온 크레이거가 그렇게 단숨에 간파해 버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후 칼은 아스타틴을 몰래 떠보기도 했지만 별게 나오지는 않았다. 아마 그 곰 같은 녀석이 여우 같은 이온 크레이거를 상대로 뭔가 숨기기는 어려웠겠지만 말이다.

‘바보 같은 아스타틴…….’

칼은 괜스레 속으로 제 부하를 욕하며 상념을 마쳤고, 그와 거의 동시에 후작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보기만 해도 긴장감을 일으키는 상대의 날 선 눈빛과 마주쳤을 때였다. 마차의 문이 도로 닫히고 짙푸른 색의 휘장이 내려졌다.

* * *

이온이 저를 찾는다는 전언을 듣고 제 아들 방으로 올라온 크레이거 공작의 표정은 한껏 굳어 있었다. 미아블레 후작을 만나고 나오더니 도로 침대 위에 누웠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최근 며칠간 이온의 몸이 다시 심상치 않아졌다는 것은 같은 집 안에서 지켜보고 있는 크레이거 공작 역시 잘 알고 있는 바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온이 쓰러지거나 침대 위에서 꼼짝을 못 할 때마다 공작은 카밀루스를 내쫓고 싶다는 충동에 심하게 사로잡히고는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문을 열자마자 제 사랑하는 아들인 이온이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린 채로 그를 보고 있자, 공작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했다.

8년 전부터 시작된 원인 모를 이온의 저주. 곧 해를 넘기면 9년째가 된다. 10년이 되기 전에 해결이 되기는 할까.

그러기 위해서 대외적인 이미지니 뭐니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카밀루스의 의지와 능력만 믿고서 그에게 저택의 방을 내주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 제대로 회복되지 못하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애간장이 탔다.

이온은 여느 때처럼 이마에 식은땀을 살짝 맺은 채로 공작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부드러운 색의 초록빛 눈이 깜빡거리는 것을 보면서 공작은 역시나 제 아들이 너무 미인인 것 같다는, 묘한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이러니까 카밀루스니 버니언이니 하는 녀석들이 내 아들에게 목을 매달지. 사내아이를 너무 예쁘게 낳아 놔도 문제다.

“이 아비를 불렀다고.”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첫마디를 떼자 이온이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혹시 많이 바쁘셨어요?”

제 눈치를 보는 것 같은 아들의 모습에 크레이거 공작은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가, 협탁 위로 손을 뻗었다. 그 위에 올려진 마른 수건으로 이온의 이마에 맺힌 땀을 톡톡 눌렀다.

그러자 뺨이 살짝 상기되는 이온을 내려다보며 공작이 무뚝뚝한 한마디를 내놓았다.

“가문의 일도 이제 네가 거의 처리하는데, 내가 바쁠 일이 있겠느냐.”

“……얼마 전에 공국 쪽으로 편지를 보내신 거 아니셨어요?”

“잘도 아는구나.”

누워 있는 이온이 에렌스트 경을 수족으로 부리면서 집 안은 물론이고, 그 바깥의 일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온이 제가 누구에게 편지를 보냈는지 아는 건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에 별 표정 변화 없이 이마의 땀을 신중하게 훔쳐 내던 공작은 이내 이온의 구레나룻 쪽이나 목까지도 내려갔다.

그러다 눈빛을 가라앉혔다. 카밀루스가 왔다 간 것으로 아는데 목깃의 단추가 풀려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괜히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그놈이 짐승 같은 눈으로 본다는 사실을 알 텐데 이온이 너무 무방비한 게 아닌가 싶었다. 경계 좀 했으면 좋겠는데, 다른 건 다 경계해도 카밀루스한테는 과할 정도로 달라붙어 있는 데다 허술한 모습까지 보이는 제 아들이 솔직히 좀 못마땅했다.

이온이 저를 불렀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부터 속으로 카밀루스를 향한 불만만 열심히 쌓던 공작은 또다시 울컥 올라오려는 충동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말거라. 아직 공국으로 가기 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기왕이면 황도에서 큰일들은 다 치르고 가야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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