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이라고 하시면…….”
머리가 똑똑한 아이니 의미를 분명 알아들었을 텐데 굳이 묻는다. 하여 공작도 굳이 지적해 대답했다.
“너와 에밀리도 짝을 찾아야지.”
“…….”
대답을 듣고 이온이 공작을 물끄러미 살폈다. 평소보다 눈빛이 조심스러웠다.
“왜 눈치를 보는 거냐.”
“……대공이 그렇게 싫으세요?”
“싫다.”
공작의 단호한 대답에 이온이 입술을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렇지만 공작이 카밀루스를 좋아할 이유가 정말 어디에도 없었다.
제 귀한 아들을 수상한 눈으로 보는 놈인 와중에, 마법 능력만 빼면 이온보다 잘난 게 하나도 없었다.
공작은 우선 크레이거가의 권세가 대공의 권세에 결코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현 시점에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건 대공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이온도 얼마 전에 제 앞에서 무릎까지 꿇고 각서를 쓴 것이었다.
의외로 똑똑해 보이는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공작의 눈엔 당연히 이온이 세상에서 제일 영민해 보였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도 카밀루스는 실격이었다.
그런데 제 아들의 저주도 여태 해결해 주지 못하고, 감히 그동안 제 아들한테 마수 같은 손을 뻗어서 사고까지 쳤으니 그 면상을 볼 때마다 속이 뒤집히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나마 욕을 하고 있지 않은 건 더 개차반인 버니언이 이온을 똑같이 노리고 있고, 카밀루스가 나름대로 그 방면으로는 처신을 잘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온과 카밀루스의 미래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따.
“너도 그만 정신 차리거라. 어차피 황위에 오른다고 치면 지금까지 너한테 한 짓은 싹 잊고 다른 이를 취하겠지. 어쩌면 네놈이 퍼뜨린 소문대로 태후에게 다시 황후 자리를 줄지도 모를 일이고.”
거의 폭언에 가까운 그의 발언에 이온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아버지, 카밀루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왜, 그사이에 그놈이 너에게 뭔가 약속이라도 한 거냐?”
설마 황후 자리를 내준다는 감언이설을 제 아들에게 속삭였을까? 만약 그랬다면 당장 가서 그놈의 멱살이라도 잡을 생각이었다.
다행히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온이 고개를 살살 저었다. 피곤한 듯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뜬 이온이 한숨 섞어 대꾸해 왔다.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아버지도 존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
“네?”
이온이 이제는 공작의 손까지 잡아 오며 숫제 애원하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공작은 그에 또 속에 돌덩이가 얹힌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그는 대답 대신 다른 화제로 넘겼다.
“아비는 왜 부른 게냐.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오라고 한 것은 아닐 테고.”
이온은 화제가 바뀐 것에 불만이 있는 것 같았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제 저주가 아무래도 더 강해진 모양이에요.”
그리고 첫마디를 듣자마자 공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라고?”
“요즘에 컨디션이 한층 더 안 좋아졌어요. 얼마 전에 쓰러진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하고요…….”
아마도 카밀루스가 했을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온은 계속해서 공작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살폈다.
공작은 이온의 손을 붙잡았다. 매번 저보다 온도가 훨씬 낮은 아이의 손이 안타까워 벌써부터 마음이 아팠다.
“대체 왜? 대공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따로 없고?”
“그게…….”
뭔가 들은 이야기가 있기는 한 것 같았다. 이온이 시선을 내리깔아 공작의 눈길을 피했다.
혹시 큰일이라도 난 걸까…….
안 그래도 오랜 시간 저주에 시달려 온 탓에 몸이 많이 약한 아이였다. 말을 많이 한다는 이유로 숨이 차 할 때도 있었고, 잘못 사레가 들리면 하루 종일 기침 소리가 울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 끔찍한 저주가 더 강해졌다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온의 저주 앞에서는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공작은 속이 타 금세라도 미칠 것 같았다.
원인이라도 알아야겠기에 공작이 머뭇거리는 이온을 재우쳤다.
“어서 말해 보거라, 이온.”
“솔직하게 말할 테니까…… 그 전에 한 가지 약속해 주세요.”
“뭐냐?”
“제 말을 듣고 대공을 쫓아내거나 하지 않기로요. ……카밀루스의 잘못이 아니니까.”
공작은 카밀루스가 뭔가 대단히 잘못했음을 눈치챘다. 대체 뭐길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온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며 속는 셈 치고 답했다. 제 아들의 몸 상태가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마.”
그리고 공작은 다음 순간 그런 제 발언을 심히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온이 진정해야 한다는 듯이 손을 꼭 마주 잡아 오며 충격적인 이야기를 내놓았다.
“제가 저주 때문에……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됐나고 한 말 기억하시죠?”
“…….”
물음에 공작은 속으로 설마, 했다.
그 설마가 맞았다.
“저, 제 배 속에 아이가 있대요.”
순간 공작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어 버렸다. 이온은 그런 아버지를 간절히 올려다보았다. 제발, 이성을 잃지 말라는 양.
하지만 아들과 맞잡은 공작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아들의 임신 소식이라든가, 그로 인한 카밀루스를 향한 분노. 그런 부분도 지금 그의 심리 상태를 어지럽게 한 건 분명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가 동요한 이유는.
〈공작, 황태자비의 배 속에 아이가 있다.〉
이온의 말이 공작의 기억 중 가장 불쾌한 기억을 끌어냈기 때문이었다.
맥을 못 추어 누워 있는 사람.
차가운 손, 땀에 젖은 이마, 가라앉아 있는 방의 분위기.
〈몸이 너무 안 좋아서 폐하께서 권하신 대로 남부로 요양을 가려고 해요.〉
건강이 더 안 좋아졌다는 발언까지.
모든 것이 로제니아 클로델을 사석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기억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크레이거 공작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구역감이 올라와 빈속이라도 게워 내고 싶어졌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아이를 가졌다고요…….”
당연히 그 아이란 카밀루스 클로델, 그놈의 아이일 터였다.
그렇게 생각한 뒤에 공작은 혼란스러움에 눈동자를 정처 없이 굴렸다.
‘왜.’
어째서 이 순간에 그녀가 떠오르는 것이지.
카밀루스가 그녀의 아들이라서?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순간, 공작은 벼락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황후가 되기 전엔 평범했던 그녀가 황궁에 들어간 뒤로 늘 건강이 오락가락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악화한 때가 아이를 가진 시점이었다.
마치, 지금의 이온처럼…….
‘어째서.’
공작은 또다시 머릿속으로 의문사를 떠올렸다.
어째서 자신은 이런 생각을 이제 와서 하는 건가.
왜 제 아들이 임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도 한 번도 이 가능성을 상정해 보지 못했나.
내내 카밀루스를 태어나서는 안 되었던, 저주받은 아이라고 여겨 왔으면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공작은, 스스로가 결코 마주해서는 안 되는 심연을 들여다보게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이어 공작의 귓가에 아주 오래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비의 환후가 심상치 않으니 혹 저주에 걸린 것은 아닌가 살펴 달라 특별히 부탁하셨습니다.〉
〈제 짧은 식견으로는 이는 저주가 아닌 듯합니다. 음독을 하신 것 같군요.〉
〈해독제를 만들어 드릴까요?〉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레이어먼.’
속으로 제 오랜 친우의 이름을 부른 크레이거 공작은 생각했다.
당신이, 아무래도 재니스에게 속아 버린 것 같다고.
“……아버지? 제 말씀 들으셨어요?”
상념에 빠져 있던 크레이거 공작은 이온의 말에 숨을 들이켜며 겨우 아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이불 속에 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이온의 뺨이 들어와 있을 때보다 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크레이거 공작은 아픈 아들의 모습에 목에 피가 고이는 느낌이었다. 얼마 안 가 그가 냉정하게 툭 뱉었다.
“그 아이, 낳으면 안 된다.”
제법 단호한 한마디에 이온은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아이의 존재를 반기지는 않는다고 해도 공작이 화낼 줄로만 알았지, 설마 첫마디가 아이를 낳지 말라는 이야기인 줄 몰랐던 것이다.
이온의 초록빛 눈이 당혹감으로 물드는 것을 보였다. 그러나 공작에게 제 나름의 논리가 없지는 않았다.
“네 몸이 이리 약한데 아이를 어찌 낳는다고?”
이 말엔 차마 이온도 반박하지 못하겠는지 시선을 살며시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