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에 저주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 말을 듣고 크레이거 공작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침 카밀루스가 얼마 전에 마탑을 다 쓸어버리겠다는 이야기까지 한 참이었다. 이온과 카밀루스의 청사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짜여 있는 건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온은 카밀루스 클로델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크레이거 공작이 현재 이온과 소통이 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게 가장 크게 걸림돌로 작용했다.
“문제가 그것만이 아니지는 않니. 넌 우리 가문의 후계자다. 너 혼자만 생각할 위치가 아니지.”
이미 몇 번이나 한 이야기라 지겹기까지 했지만 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온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텐데 실소하는가 싶더니 툭 물었다.
“그렇다고 아이를 지워요?”
“…….”
“대답이 없으신 걸 보니 낳아도 버리라고 하실 판이네요?”
“이온.”
말하면서 이온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긴 속눈썹 때문에 그 모습이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실망감이 가득 들어찬 이온의 눈빛이 공작을 향했다. 이온은 그 상태 그대로 몇 번 숨을 색색거리다가 냉랭하게 식어 버린 목소리로 일침을 놓았다.
“……아버지가 카밀루스를 싫어하는 건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이온.”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고요.”
공작과 이온이 서로를 마주 본 채로 잠시 침묵했다. 점점 이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아, 하아…….
유난히 거칠어진 숨소리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러다 과호흡이 오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즈음이었다. 이온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차라리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헤드에 기대어 손으로 목을 감싼 채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겨우 깊은숨을 쏟아 낸 이온이 잠시 진정이 된 틈을 타 공작을 재우쳤다.
“아버지, 아직도 마음속으로는 대공을 인정 안 하고 계시죠?”
“…….”
“정말로 이용만 하려고 하셨어요? 내 아들을 좋아하니까 저주 푸는 데만 적당히 활용하면 되겠다 하면서……?”
연신 질문이 쏟아지는 것에 공작은 제 아들이 제게 확실히 실망했음을 느꼈다.
그러나 진심을 숨기지는 않았다.
“그럼 그놈 때문에 내 아들이 평생 저주에 시달리고 있는데 반길까?”
“제 저주가 카밀루스 탓인가요? 다른 사람이 건 거잖아요.”
“하지만 누가 봐도 그놈을 구하다가 얻은 저주가 아니냐. 저주를 건 게 선황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지. 만약에 그랬으면 클로델의 성씨를 가진 놈들을 벌써 다 쓸어버렸을 테니.”
“아버지…….”
“이 아비한테 그놈에 대한 인정을 강요하지 마라, 이온.”
크레이거 공작의 과격한 발언에 이온이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공작은 정말로 진심이었다. 카밀루스가 시전자가 죽어야 끝나는 저주라고 알려 주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선황이 제 아들에게 저주를 걸었을 거라고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탑에서 나온 이후 데리고 있었던 게 그였기 때문이다.
레이어먼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었다. 제가 그의 무덤을 파헤치지 않아도 되어서.
아마 그런 생각을 충분히 읽어 냈을 이온은 한동안 얼어붙은 채로 빤한 시선만 보냈다. 크레이거 공작은 이온의 입 안에 수많은 말이 잔뜩 고여 있음을 알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잠시 뒤 이온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아마도 이온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상 중 하나였다.
“혹시 제 계획에 동참하고 황위는 아버지께서 가지려고 하셨어요?”
공작은 즉각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욕심은 없다.”
크레이거 공작도 제 분수는 알았다. 스스로가 오브라이언의 넓은 땅을 다스릴 대제국의 황제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이온의 표정은 굳어 있었지만 말소리에서는 약간의 안도가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럼 카밀루스를 돕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테니까?”
“그게 아니면 카밀루스 클로델이냐, 버니언 클로델이냐이 문제일 터이고.”
“그런 거였군요.”
이온은 이 문제의 핵심을 알았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 카밀루스의 편을 절대 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아이가 있든 없는 그건 하등 상관없는 문제임을 이미 밝히고 난 뒤이니 이온에게 공작을 설득할 만한 다른 논리가 필요했다.
방금의 그 끄덕임은 이온이 그것을 찾아냈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이 아비에게 답을 내 줄 수 있는 게냐, 이온?”
“물론이에요. 절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진심이시니까. 그렇죠?”
“그래, 그것만은.”
공작은 대답하면서 이온의 목덜미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이온은 그런 아버지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크레이거 공작은 남에게, 특히 카밀루스에게 너무 가혹한 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이기 때문에 이온은 그의 미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해도 이해는 했다.
실제로 크레이거 공작이 카밀루스는 안 된다고 하는 말 중에 그 자신을 위한 이유는 없었다. 모두 이온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여 해결이 어려워 보였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쉬웠다.
“황실 연회 때 아버지께서 이목을 끌어 주시면 저랑 대공은 탑으로 갈 겁니다.”
“탑이라니. 설마 황성 안의 그 탑을 말하는 게냐?”
“네, 대공이 갇혀 있던 바로 그 탑이요.”
모든 문제의 시작인 바로 그 탑.
그렇지만 지금 그곳에 남아 있는 문제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곳은 지금 폐쇄돼 있어. 마탑주가 아주 강력한 결계를 걸어 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물론 그걸…… 대공은 풀 수 있겠지만, 무리해서 갈 이유가 없지 않느냐.”
“일단 그곳에 가면 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이온이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탑에서 나온 뒤로 기억에 혼란이 있다는 사실은 공작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 같은 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으냐.”
“저한텐 무엇보다 중요해요. 심지어 저주를 푸는 것보다 더요.”
“…….”
이온의 반박에 크레이거 공작은 입을 굳게 닫았다.
어째서인지 이전의 기억이 제대로 살아 있지 않다는 말을 이온은 지금껏 따로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신경 쓰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한데 말하는 동안 작은 손이 이불을 움켜쥐고 있었다. 뼈마디가 불거진 그것을 보면서 공작은 이온이 이 문제를 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단숨에 알아차렸다.
“단순히 저주가 어떻게 걸렸을지 알고 싶다는 이유가 아니에요.”
“그럼.”
“……이상한 말처럼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이온은 잠시 말을 끊고 마른침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제가, 이온 크레이거가 대체 누군지 알고 싶어서요.”
크레이거 공작은 어리둥절해한 기분이 되어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워낙 큰일을 겪었으니 기억이 혼란한 거는 그렇다 쳐도, 제 아들이 설마하니 그 때문에 정체성에 혼란까지 느끼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뭐라 대꾸해 주어야 할지 헤매는 가운데, 이온이 크레이거 공작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대공은, 아니 카밀루스는 그곳으로 가야 재니스와 마리엘이 끌어들여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요.”
“무슨 뜻이냐.”
“그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데, 접촉은 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렇다고 직접 마탑으로 찾아가기에는 적의 소굴로 걸어 들어가는 셈이라…….”
너무 많은 적을 상대하기엔 카밀루스도 뒤가 빌 수 있어서 위험하다는 의미였다.
말허리를 늘인 이온은 마무리할 적절한 표현을 고르는 듯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뒤 이어진 말은 공작의 결의를 끌어내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그곳에서 둘 모두를 제거하겠다는 계획이에요.”
그것은, 현재 공작이 가장 염원하는 일이기도 했으므로.
* * *
황궁의 복도를 걸어가는 버니언의 눈은 반쯤 풀려 있었다. 힘이 빠진 발걸음 소리에도, 처진 어깨에도 선황이 죽고 이곳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무렵의 당당함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귀족들과의 만찬을 대강 마치고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한 버니언은 쉬기 위해 그대로 방에 틀어박혔다. 그러고 막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어 한숨 돌렸을 무렵이었다.
옷시중을 든 시종을 그만 내보내려고 잠시 문이 열린 틈에 밖에서 곤란해하는 다른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노아기사단의 칼 나르바에스 단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그에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버니언이 문 쪽을 숫제 노려보듯이 하다가 짧게 대답했다.
“그래, 들라고 해라.”
사실 낮부터 황궁 밖에 서 있던 터라 이 정도면 이미 충분히 기다리게 한 뒤였다.
버니언은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침실의 한편에 위치한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술병 하나를 집은 뒤 발코니 입구 앞으로 걸어갔다.
커튼을 거두어 내고 쏟아지는 달빛을 마주하며 막 술병의 주둥이에 입을 댔을 때였다. 한 모금을 채 마시기 전에 칼 단장이 나타났다.
“폐하.”
그가 침실 안에 한 걸음 들이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추었다. 버니언은 그런 그를 곁눈으로 힐끗하며 비소했다.
“무슨 일이냐? 설마 하라는 일 다 해서 찾아온 건 아닐 거고.”
이미 칼 나르바에스를 깊이 불신하고 있는 버니언이 그리 비꼬았다. 그렇지만 칼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담담히 답했다.
“명하신 아이의 아비가 누군지 찾았습니다.”
순간 병을 움켜쥔 버니언의 손에서 힘줄이 불거졌다.
“웬일로 잘했네. 누구냐?”
“하일로 백작이라고, 선황의 시종인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애초에 카밀루스일 거라고 기대도 안 했지만 예상대로 다른 이름이 흘러나왔다. 하, 하고 실소를 흘린 버니언이 병을 기울여 술을 물처럼 목구멍에 쏟아부었다.
그러고 고개를 한 번 턴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과연 선황은 태후의 불륜을 몰랐던 걸까, 아니면 알고도 눈을 감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