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알았던 거겠지.’
그는 어차피 태후든, 아들이든 썩어 가건 말건 신경 쓰지 않는 위인이었으니.
선황을 떠올리자 순식간에 기분이 상해 버린 버니언이 뒤를 휙 돌아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칼에게로 다가갔다.
터벅터벅 발소리를 내며 걸어간 그가 무릎 꿇은 칼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래, 그럼 배 속의 아이를 어떻게 할까?”
“……황실에는 남겨 둘 수 없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럼 갖다 버려? 태어나자마자 하일로 백작 저 앞에다가 요람이라도 둘까?”
“…….”
칼이 선뜻 판단할 수 없는 문제를 내며 제 짜증을 드러낸 버니언이 곧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아, 하고 감탄사를 냈다.
“그래, 그게 좋겠네.”
“어떻게 처리할까요.”
“탑에다 가둬, 카밀루스 그 새끼처럼.”
대답을 들은 칼이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자 버니언이 그 앞에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
“왜, 내 결정이 별로야?”
“……제가 어찌 판단하겠습니까.”
칼의 반문에 버니언이 씩 웃더니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고 상체를 세우게 해 마주 보게 한 순간, 칼은 거의 광기에 휩싸인 듯한 버니언의 눈동자를 발견하고는 움찔했다.
“카밀루스 그 새끼처럼 재니스한테 실험거리로 던져 주면 되잖아. 안 그래? 왜 대답이 없지?”
재니스라는 말이 나오자 칼은 미간을 좁혔다.
“폐하, 마탑주는 그리 신뢰할 만한 자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만.”
“내가 그딴 것도 모르겠냐?”
“송구합니다.”
“그런데 선황이 재니스를 데려다 쓴 이유는 있을 거 아니야. 그 늙은이가 그냥 생각 없이 한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너는 아는 거 없어?”
“없습니다.”
사리는 듯이 최대한 말을 절제하는 칼의 모습에 답답해진 버니언은 다시 술병을 기울였다. 벌써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그가 반쯤 풀린 눈으로 칼을 바라봤다.
“재니스 지금 황성 안에 있지. 니가 직접 가서 그 새끼 좀 데려와.”
“……예.”
대답한 칼이 뒤돌아 나가는 것을 버니언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응시하다가 문이 닫히자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고 칼이 재니스를 데리고 돌아온 것은 독한 술을 꿀꺽대며 넘긴 버니언이 반쯤 정신을 잃었을 때쯤이었다.
“절 부르셨습니까, 폐하?”
“…….”
제가 언제 그들을 안으로 들이라고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재니스와 마리엘이 이미 앞에 서 있었다.
버니언은 머리를 짚으며 그들을 확인했다. 재니스는 평소와 같이 미미한 미소를 띠며 그의 앞에 서 있었고, 늘 그를 따라다니는 마리엘은 여전히 케이프를 깊게 눌러쓴 채였다.
그 와중에 오늘따라 마리엘이 저를 지그시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좀 나빠졌지만 버니언은 재니스에게 다짜고짜 명했다.
“당장 태후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꺼내서 탑에 가둬 버려라, 재니스.”
“태후께서 회임을 하셨습니까?”
“……씨발, 그래! 어디서 근본도 없는 개뼈다귀 같은 새끼를 배 속에 만들었어. 그러니까 당장 그 새끼를 꺼내야 돼.”
제정신이 아닌 버니언의 말에 재니스가 상황 설명을 요구하듯이 문 쪽의 칼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칼이 한숨을 내쉬더니 앞으로 나와 재니스에게 대강의 설명을 읊어 주었다.
태후가 선황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 현재 몇 개월이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배가 꽤 부른 상태라는 것, 그리고 얼마 안 가 요양을 갈 거라는 이야기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재니스는 가볍게 답했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그래?”
“물론입니다. 저는 클로델 황가의 종이니까요.”
흔쾌히 대답하며 재니스가 무릎을 살짝 굽혔다. 뒤에 덧붙여진 말은 지금껏 지겹도록 들은 이야기라 무뎌질 만했지만 오늘따라 거슬리는 것에 버니언이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재니스를 올려다보았다.
몽롱한 머릿속에서도 선명히 떠오르는 의문에 버니언이 문득 물었다.
“재니스.”
“또 명하실 거라도 있으신지?”
“매번 궁금했는데 너, 선선황이랑은 무슨 거래를 했냐?”
질문에 재니스가 칼을 돌아보았다. 밖으로 내보내야 하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그에 버니언은 하, 하고 웃음을 짧게 뱉더니 칼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아무래도 걸려서 칼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버니언이 가라고 직접 명하자 결국 자리를 떠났다.
방에 재니스와 마리엘, 버니언만 남자 재니스가 특유의 여유 넘치는 몸짓으로 허락되지 않는 짓을 했다.
버니언의 옆에 나란히 앉은 것이었다.
순간 버니언이 눈을 치켜뜨자 재니스가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그의 등을 두드리며 속삭였다.
“비밀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요, 폐하. 정말 아무도 들으면 안 되거든요.”
“……정말로 말해 줄 건가 보지?”
“당연하지요. 제가 폐하께 숨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재니스의 반문에 버니언의 시선이 문득 마리엘에게로 향했다. 피식 웃는 소리를 낸 그가 냉소적으로 뇌까렸다.
“저년의 정체?”
버니언은 실제로 저 마리엘이 대체 뭐 하는 년인지 매번 궁금했었다. 단 한 번도 그녀가 재니스와 떨어져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재니스가 있는 곳엔 언제나 마리엘이 있었고, 마리엘이 있는 곳엔 언제나 재니스가 있었다. 마치 한 몸처럼 말이다.
재니스는 마리엘을 힐끗하고는 살며시 입꼬리를 밀어 올려 미소를 그렸다. 곧 그의 매끄러운 입술 사이에서 말소리가 나오는 줄 알고 버니언이 집중했으나, 소리가 들려온 것은 다른 방향에서였다.
검은 케이프 밑에서 조곤조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재니스는 제 사역마입니다.”
“……뭐?”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버니언은 조금 술이 깨는 듯했다. 그가 재니스와 도로 눈을 마주치자 재니스가 두 눈에 살며시 웃음기를 띠었다.
그가 술로 달아오른 버니언의 뺨을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노래하듯이 속삭였다.
“제가 얼마나 완벽하게 만들어졌는지, 제 정체를 간파한 자는 지금껏 두 명밖에는 없었지요.”
아마 카밀루스까지 곧 세 명이 될 거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공 역시 아직은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일 터.
재니스의 말을 한 박자 늦게 알아들은 버니언은 문장이 끝나고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재니스가 만들어진 인간…….
도저히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상대를 뜯어보았지만 말을 듣고도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안 그래도 술에 뻑뻑해진 머리가 아예 정지해 버린 느낌이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재니스가 친절히 덧붙였다.
“눈치 못 채는 것도 문제는 아니지요. 전 마리엘의 뼈로 만들어진 인간이니까요.”
“…….”
“그리고 그걸 안 최초의 사람이 바로 선선황이셨지요.”
상상도 하지 못한 이야기 앞에서 버니언은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선황이었던 제 아버지는 선선대 황제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거의 없지만 버니언에게는 할아버지 되는 사람인 데다가, 선선대 황제는 선황 못지않게―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의뭉스러운 사람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의뭉스러움이란 선황과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선선대 황제를 모셨던 사람들이 평하기를, 그는 소위 말하는 괴짜라고 했다.
카밀루스보다야 아니겠지만 그는 수준급의 마법사로도 알려져 있다.
재니스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탑의 사람들을 가까이하고, 그들의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버니언의 머릿속에 있는 정보는 고작 이 정도.
버니언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선황이 황위에 오른 뒤였고, 할아버지 역시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던 터라 실제로 본 기억은 아예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좀 고릿적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재니스의 말은 그렇게 옛날 옛적 이야기처럼 흘려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마리엘의 사역마라니.
마리엘의 뼈로 만들어졌다니.
전부 사람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게 이야기들이었다.
사실은 늘 의문이었다.
선선황대에 충성 맹세를 했다는 재니스는 대체 왜 나이가 이리 적어 보이는가.
자신은 나이를 먹는데 왜 그의 얼굴은 그대로인 것인가.
더러 마법으로 얼굴을 숨기는 자들이 있다고 하니 재니스 역시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었다. 혹은 마나가 넘쳐서 노화도 늦게 되는 게 아닌가 추측했었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진’ 인간이라면 이해를 달리 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버니언은 완전히 술에서 깨 버렸다. 재니스에게서 딱히 위협적인 신호가 흘러나오는 것도 아닌데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헀다.
혹시 재니스에게 들릴까. 제 빨라진 심장 소리가?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버니언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주저함이 담긴 음성에서 배어났다.
“설마 정체를 들켜서…… 협박이라도 당해 맹세를 했나?”
그런데 이번 질문도 마리엘에게서 들려왔다.
“그럴 리가요. 선선황께서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답니다.”
묘하게 재니스의 어투를 닮았다. 아니, 재니스가 마리엘의 어투를 닮았다고 해야 하나.
버니언은 대체 눈을 어디다 두고 대화해야 할지 헷갈려 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연신 의문을 떠올렸다.
‘완전히 연결돼 있는 건가. 행동도 통제하고……?’
그래서 마리엘이 재니스와 늘 함께였던 걸까.
돌이켜 보면 둘이 일정 거리 이상 떨어져 있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