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역마를 이렇게 완벽히 통제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버니언은 제 등 근육이 뻣뻣해짐을 느꼈다.
유사시를 대비해 지금이라도 칼 나르바에스를 불러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제 와 불러들이는 건 재니스와 마리엘에게 자신이 무서워한다는 걸 너무 드러내는 처사가 아닐까.
그런 고민을 하는 순간 중요한 사실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러고 보니…….’
내황성 전체가 카밀루스가 펼쳐 놓은 결계 안이다.
이 안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클로델 황가의 핏줄뿐.
카밀루스가 거들먹거릴 때는 그 사실에 짜증이 나 미치는 줄 알았는데, 현재 상황에서는 어찌나 다행인지 몰랐다.
버니언은 티 나지 않게 제 안의 마나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언제든 재니스나 마리엘의 머리를 불태워 버릴 수 있도록.
그러는 사이 마리엘이 케이프 안에서 양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분께서는 저에게 거래를 제안하셨지요.”
“……무슨 거래?”
질문을 받은 마리엘이 제 케이프를 들추었다. 그러자 마기에 잠식되어 검게 얼룩진 얼굴이 드러났다.
마리엘은 분명 미인이었지만 마기가 일렁이는 얼굴은 그렇게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에 버니언이 미묘하게 인상을 찡그렸다가 금세 풀었다. 마리엘이 그의 표정 변화를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제 반응을 상당히 마음에 안 들어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생존 본능에 가까운 감에 의해 버니언은 마리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제 감정을 숨겼다.
안 그랬으면 큰일 났을 것이다.
다음 말을 듣자마자 버니언은 확신했다.
마리엘이 손끝으로 제 얼굴 중 검은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마기를 완전히 몰아낼 수 있을 만큼의 마나를 제공받기로 했거든요.”
“마기에 잠식된 건 누군가의 계략에 의해서였나?”
“그럼요. 이 끔찍한 걸 제 안에 스스로 넣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군.”
마리엘에게 마기를 주입한 상대방은 일찍이 죽었겠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버니언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던 마리엘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평소에는 케이프 안에서 살살 걷기에 잘 몰랐는데, 걸어오는 모습까지 재니스와 비슷했다.
재니스가 마리엘의 사역마라는 인식을 한 순간부터 버니언의 눈에는 모든 게 수상하게 보였다.
“그리고 저는 그 대가로 클로델 황가가 영원한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돕기로 했지요.”
버니언은 뒷얘기를 듣기 전에 우선 제 의문 하나를 풀기로 했다.
“마리엘…… 너는, 나이가, 어떻게 되지?”
말이 뚝뚝 끊겨 나간 것에 버니언은 속으로 멍청한 스스로를 탓했다. 그렇지만 마리엘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벌써 버니언의 옆으로 와 앉았다.
이제 재니스는 그의 오른쪽을, 마리엘은 그 왼쪽을 차지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100년 좀 넘게 산 정도일 뿐이니까.”
“…….”
영생을 얻은 걸까.
의문은 곧 풀렸다.
“제 몸을 도는 마기 때문에 저는 눈도 감을 수가 없답니다.”
“몬스터화 때문에……?”
“멀쩡해 보이지만 일부는 이미 그렇게 됐거든요.”
대답을 하면서 마리엘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버니언은 그 시선을 따르다가 그녀의 손을 발견했다. 울퉁불퉁하게 핏줄이 일어나고 손이 사람 손 같지 않게 변형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세 또 억누른 모양인지 원래대로 돌아왔다.
버니언이 다시 마리엘과 눈을 마주치자 그녀가 짧게 변명을 해 왔다.
“송구합니다, 폐하. 이 결계 안에선 저도 완벽히는 통제가 안 돼서.”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니, 이해한다.”
이해하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자칫 잘못했다가는 제가 죽을 텐데.
버니언은 어쩌면 자신이 재니스와 같은 신세가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제 내장과 뼈 일부는 몬스터화가 다 되었답니다. 가장 중요한 심장을 포함해서요. 제가 이 마기를 쉽게 몰아낼 수 없는 이유이지요.”
“버티고 있는 게 대단한데. 네 정신력을 높게 산다.”
버니언은 최대한 그녀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평소 해 본 적도 없는 남의 칭찬을 입에 올렸다.
하지만 그런 억지 칭찬도 칭찬이긴 한 터라, 마리엘은 좀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말투가 다소간 유해졌다.
“전 그만큼 위대한 마법사였거든요.”
“그런가…….”
“지금의 대공보다 더 강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재니스를 보세요, 제 일부만으로 움직이는 건데 인간 중에 따라올 자가 없지 않습니까?”
“…….”
버니언의 시선이 재니스에게 향하자 재니스가 특유의 이목구비가 흐릿한 얼굴로 생긋 웃었다.
자세히 살피니 저 얼굴도…… 불쾌하고 음습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버니언이 마른침을 넘기며 뒤늦게 대꾸했다.
“그래서 우리 황가의 영광을 이을 방법이 구체적으로 뭐지?”
한데 이번 질문에는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마리엘이 어쩐지 서늘함이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에, 버니언은 손이 떨릴 것 같아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에 벌써 땀이 흥건한 것이 느껴졌다.
“왜 대답을 안 하는 건가. 나 역시…… 그대가 충성을 맹세한 클로델 황가의 일원인데.”
“사실 말입니다, 폐하.”
“……?”
“폐하의 존재는 계획에 없었거든요.”
“뭐?”
버니언은 마리엘이 무슨 말을 하는가 싶었다. 그렇지만 이해는 할 수 없어도 그 말이 제게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님은 충분히 짐작이 됐다.
“선선황과 선황의 의견이 조금 다르셨던 터라, 약간의 오차가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
이런 대화를 하려고 재니스를 부른 게 아니었는데.
버니언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마리엘이 던진 이 화두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이긴요. 제가 준비해 놓은 그 영광의 존재를 선황께서 저희의 먹이로 던져 주시지 않았습니까?”
영광의 존재, 그것이 가리키는 바가 카밀루스라는 걸 버니언은 바로 알아들었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버니언 클로델이 그녀의 ‘계획’에 없던 이물질이었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버니언의 파란 눈이 어둠 속에서 침잠했다.
마리엘의 음성이 계속 귀에 웅웅 울리는 거 같았다.
영광의 존재…….
“카밀루스 클로델은, 사생아가 아닌가?”
호흡이 조금 거칠어진 탓에 버니언의 목소리에 다량의 숨소리가 섞였다. 버니언은 그것이 단지 술에 취했다는 징후로만 비치기를 바랐다.
사실 머리 한구석으로는 마리엘이 제 긴장감과 분노를 전부 감지했을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그렇게 알려져 있기는 하지요? 뭐라더라, 있는지 없는지 알 수도 없는 마녀의 아들이라고 했던가.”
“…….”
마리엘의 대꾸를 들은 버니언은 그 속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리고 재니스와 마리엘 둘을 번갈아 살폈다.
둘은 하나인가, 아니면 둘인가.
자신을 농락한 이는 대체 누구인가.
차라리 육안으로 보지 않는 게 덜 헷갈릴 거 같았다.
그러나 둘이든 하나든, 버니언의 배신감은 결코 줄지 않았다.
그의 아랫입술과 함께 턱이 떨렸다. 마리엘은 그러한 반응을 보면서 약간 즐기는 듯도 했지만, 버니언은 스스로의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카밀루스 클로델, 그 새끼가 사실은 적통이라…… 이건가?”
“폐하와 이복이라는 건 변함이 없지만요.”
대답을 들은 버니언은 갑자기 실소를 하기 시작했다.
“……하, 하하.”
순간 머릿속에 한 장면을 떠올렸다.
〈카밀루스, 그 녀석의 어미를 찾아야겠다.〉
그때 재니스가 어땠더라? 그를 말리지 않고 오히려 찾기만 하면 도와주겠다는 듯이 발언을 했었다.
한마디로 그것도, 전부 연기였다는 소리였다.
더는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난 그가 둘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어이가, 없네…….”
카밀루스가 적통.
황후 로제니아 클로델의 아들.
지금까지 풀리지 않았던 의문 하나가 싹 거두어진 느낌이었다.
선황이 왜 그렇게 카밀루스를 애틋하게 여겼는지.
버니언은 제 두 눈이 뻑뻑해짐을 느꼈다.
“어이가 없어.”
그런데 촛불로 밝혀진 방 안의 풍경이 빙글빙글 돌았다.
술기운이 가셨다고, 제 상태는 아주 멀쩡하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던 것이다. 그가 침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이 꺾여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이상하게 다리가 축축해졌다. 따끔함이 몰려온 건 그다음이었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더 늦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