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니언의 손에 있었던 술병이 깨져서 흩어졌다. 그의 밑에서 진한 알코올 냄새가 올라왔다.
버니언은 유리병을 들고 있던 손을 올려 들여다보았다. 깨진 유리병의 파편이 잔뜩 박혀 벌써 손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보고만 있자 재니스가 먼저 다가와 버니언을 부축했다.
“충격이 크셨나 봅니다, 폐하?”
제 어깨 아래에 손을 집어넣고서 일으켜 세우는 그를 버니언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손이나 다리에 박힌 유리 파편으로 인한 따끔함 따위는 잊고 물었다.
“그래서 원래는 카밀루스 클로델이 황제감이었다, 이건가……?”
어딘지 절박함마저 밴 버니언의 말소리와 달리 재니스는 태평하기만 했다.
“임신시킬 때만 해도 그랬지요.”
“…….”
버니언이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는 재니스에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버니언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니스가 입을 멈추지 않았다.
“이 재니스가, 아니지, 마리엘이 이후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요.”
“무슨 공을?”
“그야, 괴물을 하나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정기적으로 제 마나라도 뽑아서 황후께 갖다 바쳐야지요.”
“그렇게 해서 그 돌연변이가 나왔다? 그런 얘기인가.”
“과정이 많이 생략되었지만 대략은 그런 얘기지요.”
재니스가 역겨운 면상으로 생긋 웃었다.
예상치 못한 새로운 정보가 한꺼번에 너무 많이 쏟아져 들어와, 안 그래도 술에 취한 그의 머리에 과부하가 걸렸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결국 이거였다.
카밀루스 클로델은 적통이며, 선선대 황제와 마리엘의 맹세 속에서 태어난 차기 황제감이었다는 것.
그들의 계획 속에서 버니언 클로델은 원래 없어야 하는 인물이었다는 것.
버니언의 인지는 다행히도 어지러운 가운데에서도 그 두 가지만은 정확하게 포착해 내었다.
버니언은 저를 부축하던 재니스에게서 빠져나와 손을 탁 쳐 내며 물러났다.
그리고 술주정뱅이의 흔한 주사처럼 재니스와 마리엘 두 사람을 시야에 담은 버니언이 크게 웃었다.
“그거 엄청 재밌는 얘기네?”
그러자 재니스도 연극용 가면이라도 쓴 사람처럼 가식적인 웃음을 비쳤다.
“그렇죠?”
술 한 방울이라도 더 필요했던 버니언이 제 손등에 흘러내린 술을 혀로 핥았다. 피맛이 섞여서 썩 맛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혀를 얼얼하게 하는 감각만은 똑같아서, 꽤 위안이 되었다.
버니언은 미친 사람처럼 웃다가 문득 떠오르는 걸 물었다.
“야아, 그럼…… 혹시 이온의 저주도 그 새끼 같은 괴물을 만들려고 건 거야?”
대답은 마주 보고 있는 재니스가 아닌, 좀 더 떨어진 마리엘에게서 흘러나왔다.
“이미 그 배 속에 아이도 만들어졌을 겁니다.”
순간 버니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이 좆 같은 새끼들이.”
이어 방 안에서 무언가 터져 나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밤의 고요에 어울리지 않는 굉음과 거센 진동이 버니언의 침실에서 일어나자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칼을 비롯한 시종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방문마저 날아가며 순식간에 퍼져 나온 화기에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다. 방 안에 뛰어들려고 가장 먼저 방 쪽을 향해 달려간 사람은 칼이었다.
그가 막 버니언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안쪽에서 누군가 휘청거리며 빠져나왔고, 그게 버니언이라는 걸 눈치채자마자 칼이 그의 몸을 붙들었다.
“폐하!”
칼이 방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술에 조금 취했을 뿐 멀쩡했던 버니언이다. 그런데 갑자기 엉망이 된 모습으로, 방을 빠져나온 그를 보고서 칼은 당황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자 버니언이 그의 품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씨발…… 마탑주 새끼가…….”
뒷말을 무어라 무어라 지껄이는데, 칼의 귀에는 한 단어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칼은 상태가 이상한 버니언을 다른 시종에게 넘기고 제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쪽은 순식간에 까맣게 타 버린 뒤였다. 마치 거대한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렇지만 버니언과 함께 있었던 재니스와 마리엘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안을 천천히 걸어 둘러보던 칼은 금세 상황을 짐작했다.
버니언이 재니스와 마리엘을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이곳에서 이렇게 흔적도 없이 빠져나갔다는 것은 다른 한 가지 사실을 담보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카밀루스가 쳐 놓은 이 결계 안에서, 재니스와 마리엘은 마법을 쓸 수 있다.
칼이 심각한 얼굴로 밖을 나갔을 때였다.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그 품 안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버니언이 누군가에게 명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마자 비렌시움 대공을 황궁으로 불러와……. 이온, 이온 크레이거도.”
* * *
황궁에서 버니언이 제 침실을 불태우는 난리가 났다는 소리가 밤사이에도 일파만파 퍼지고, 아침부터 황궁에서 나온 시종이 크레이거 공작 저택으로 급하게 달려왔다.
버니언이 카밀루스와 이온을 동시에 불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공작도 함께 가겠다고 했으나, 결국 마차에는 두 사람만 올라탔다.
말발굽이 지면을 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덜그럭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온은 마차에 올라타기 전에 대략 전해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제 눈앞에 어른거리는 창을 확인했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17%입니다.]
이온은 아침에 눈뜨자마자 소폭 올라가 있던 사망 확률 수치를 확인하고는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카밀루스가 마나석을 새로 해 준 이후로 딱히 무리를 하는 게 아니라면 15%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에서 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렌스트 경이 들려준 이야기에 제 사망 확률 수치가 올라간 것을 납득해 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좀 충격적인 이야기이기도 했다.
〈재니스와 마리엘이 황성 결계 안에서 마법을 썼다고 합니다.〉
순간 이동 마법인지 뭔지 종류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버니언의 눈앞에서 바로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그것은 곧 카밀루스가 쳐 놓은 황성 결계가 그들을 억지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카밀루스도 그 점을 신경 쓰는 듯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내내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이제 재니스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평가할 만한 잣대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카밀루스?”
살살 눈치를 보던 이온이 결국 카밀루스를 넌지시 불렀다.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인지 그는 흠칫하더니 이내 이온과 눈을 마주쳤다.
“미안, 무슨 말 했지?”
“아무 말 안 하긴 했는데.”
이온이 겸연쩍어하는 표정으로 대꾸하자 카밀루스가 아, 하고 약간의 신음마저 흘렸다.
이전 대화로 미루어 보면 재니스가 더 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제가 펼친 결계 안에서 마법을 썼다는 게 그렇게 충격적이었던 걸까?
결계 안에서라도 마법진을 이용한 시전은 가능하니 어쩌면 버니언 몰래 그런 방법으로 사라진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쪽은 역시나 가능성이 낮으려나.’
여하튼 재니스가 그렇다고 해도 딱히 개의치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이온도 뭐라고 말을 건네야 할지 모호했다.
이온은 주저하다가 결국 어렵게 돌려 말하기보다는 솔직하게 물었다.
“재니스 때문에 그렇게 불안해하는 거야?”
질문을 던져 놓고 보니, 카밀루스가 불안해하는 건 자신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에 하나 저주를 못 풀어줄까 봐…….
지금까지 계속 네 저주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목숨을 걸고서라도 풀어주겠다고 외치던 그이니까.
목숨 걸고 푼다는 발언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가 이 일에 얼마나 진심인지만큼은 이온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카밀루스는 대답 대신 부드럽게 웃더니 약간 떨어져 앉은 그들 사이의 빈 공간을 툭툭 두드렸다.
“이온 가까이 와 볼래?”
“……?”
뜬금없는 요청이긴 했지만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 카밀루스가 앉은키도 훨씬 큰 탓에 고개를 살며시 들어 올려다보았을 때였다.
카밀루스가 어깨를 끌어당기며 고개를 기울여 왔다.
갑자기 키스라도 하나 싶었던 이온이 놀라 움찔했다. 하지만 곧 그게 제 착각임을 깨달았다.
카밀루스는 그저 이온을 제 가슴에 기대게 하며 속삭여 왔다.
“사실은 재니스 때문에 불안한 거 맞아. 그런데 그가 무서워서는 절대 아니고.”
“그럼?”
“널 잃을까 봐. 그리고 네 안에 이제 내가 지켜야 할 존재가 하나 더 있으니까 말이야.”
“…….”
그 말에 이온은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렇지만 며칠 만에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