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24)화 (224/317)

무엇보다 이온은 애초부터 먹는 양이 적어서 배가 그렇게 많이 불러오진 않을 수도 있었다. 초기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임신을 했다고 해도 남들처럼 딱히 뭔가 먹고 싶은 충동이 크게 일지도 않았다.

이온은 카밀루스를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말을 고르다가 이내 웃으며 대꾸했다.

“네가 나 무조건 지켜 주는 거 아니었어?”

일부러 밝게.

한데 이러면 또 피식 웃으며 그렇다고 답해 줄 줄 알았던 카밀루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왜 이러나 싶어서 눈을 빤히 마주 보는데,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제는 내가 돌아오는 것도 중요해졌잖아.”

‘이제는.’

이온은 그 말을 듣고서 움찔했다.

제가 해석한 게 착각이겠지 하면서 되물었다.

“그럼 원래 안 돌아올 생각이었어? 그런 거 아니잖아. 바뀌는 건 없는데…….”

“…….”

“카밀루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카밀루스의 평소 성격대로면 절대로 오해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온은 괜히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머리부터 차게 식어 버리는 느낌. 억지로 웃고 있던 이온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너 쓸데없는 생각 하고 있었어? 나한테 혼날 거 뻔한 그런 걸로.”

“그냥, 재니스와 마리엘을 상대하다 보면 최악의 상황도 상정해야 할 거 같아서.”

“네가 생각하는 최악은 뭐였는데?”

“죽는 거겠지.”

여기서의 ‘죽음’의 주체가 누구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카밀루스였던 거다.

이걸 단순히 그의 신중한 성격이 반영된 발언이라고 해야 할까.

이온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카밀루스는 정말로 재니스와 마리엘이 저를 뛰어넘는 강함을 가졌을 수도 있으며, 일이 잘못되면 스스로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각본을 이미 제 안에 세워 둔 것일 터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불가항력적인 부분이니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보긴 해야 하는 일이니까.

문제는 그 이후의 각본도 그의 머릿속에서 전부 다 쓰였을 텐데, 제게 공유되지 않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탑에는 카밀루스 혼자 가기로 한 게 아니었다.

어떤 사고를 하고 있었을지 뻔해서 울컥했지만, 카밀루스와의 싸움을 원하지 않았기에 이온은 침착하게 잠시 틈을 둔 뒤 화제를 돌렸다.

“……얼마 전에 이엘라엠에서 피에트로 후작이 왔다는 이야기 들었어. 네가 불렀지?”

“맞아.”

“그 할아버지를 잘 구워삶은 모양이네. 소문으로는 아주 꼬장꼬장하다던데.”

이엘라엠은 북부에 위치해 있지만 제국 내에 가장 큰 규모의 보석 광산이 있는 만큼 살기 좋은 다른 지역의 부촌 못지않게 풍족한 곳이었다.

사실 그 정도로 자원이 많으면 윗선부터 나태해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카밀루스가 말했던 대로 정작 식량 자원이 부족하다는 걸 항상 경계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정확한 현실 인식 덕분인지 몰라도, 후작의 영지 경영 방식에 빈틈이 없다고 들었다.

대신 자존심도 꽤 강한 사람이라는 소문이었는데, 카밀루스의 편지 한 통을 받고서 몇 년째 오지 않던 수도를 오는 게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해 왔다.

“난 그가 뭘 가장 간절히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만 내주면 됐었어. 네 말대로 꼬장꼬장한 성격인 만큼 한번 넘어오면 더는 긴말 붙이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게 뭐였는지 물어봐도 돼?”

“후작한테 딸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 딸이 많이 아팠거든.”

이온은 그에 침음을 삼켰다. 아프다는 이야기에 상대가 좀 안타까워지기는 했지만 그와 별개로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목에 걸린 옷 안의 마나석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설마 그쪽에도 마나석을 준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있나. 단순히 치료제를 보내 준 것뿐이지.”

카밀루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는 식으로 되묻자 이온은 안도했다. 솔직히 말하면 마나석을 건넸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진짜 화날 뻔했다.

“수년간 불치인 줄로만 알았던 모양이더라고. 하지만 거의 숨넘어가기 직전에 내가 해답을 찾아 준 거니까…….”

“은인으로 생각한다는 거구나.”

카밀루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온은 그렇게 대충 이 화제를 마무리하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후작을 수도로 오게 한 이유가 뭐야? 내 짐작으로는 아까 말했던 ‘쓸데없는 생각’에 이어진 계획이 있었을 거 같은데.”

한순간에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가자,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카밀루스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온, 그건……..”

“말해 봐. 어차피 그 계획, 이제는 폐기할 거 아니었어? 유지할 거야?”

이온이 방금까지와 다르게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추궁을 해 대자 카밀루스가 쩔쩔맸다.

“다른 방법을, 찾긴 할 거야.”

“그러니까 원래 세워 놓고 말 안 했던 계획은 뭐냐고. 너도 내가 하는 짓 전부 알려고 하고, 미리 다 틀어막아 놓고서 넌 왜 자꾸 뒷구멍으로 딴짓을 하려고 할까?”

본래 제 처지가 엄처시하에 사는 남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카밀루스였다. 그가 이온이 폭발 직전이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바짝 긴장했다.

이온의 어깨를 더 꽉 쥐며 카밀루스가 머뭇머뭇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근데 재니스랑 마리엘이 내 예상보다 더 강하면…….”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그런 말을 잇기 전이었다. 이온이 마치 별것 아니라는 양 카밀루스가 예상치 못한 한마디를 내놓았다.

“그럼 그들과 안 싸우는 방향으로 계획을 잡으면 되겠네.”

“무슨 소리야, 그게?”

“네가 위험해질 거 같으면 내 저주는 안 풀려도 상관없다는 뜻이야.”

대답을 들은 카밀루스는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숨을 크게 들이켜는 걸 듣고는 이온은 마침 제 앞에 뜬 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상태 이상(Hidden): 절대 행운. LUK 수치와 상관없이 생존에 관한 한 플레이어에게 절대 행운이 따릅니다. 심장이 멈추거나 사망 확률이 100%가 되기 전엔 플레이어가 사망하지 않습니다. ※상태 이상 ‘저주’ 해제 시 사라집니다.]

“어차피 이 저주 때문에 내가 죽을 거 같지는 않으니까.”

아니, 오히려 이 저주가 있는 한 제 목숨은 꽤 안전할 터였다.

그러나 제 눈앞의 시스템창을 보지 않는 한 카밀루스는 이 부분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역시나 카밀루스는 이온이 자포자기라도 한 줄 알았는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 이온. 아이를 낳다가 네가 잘못될 수도 있는 거고…… 그럼 난…….”

뭐라고 설득해야 하는지 안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횡설수설하려는 카밀루스를 보며 이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얼마 전부터 이온이 짐작하고 있던 이 저주의 최종 목적에 대해서 카밀루스는 아직 인지하지 못한 거 같았다.

“카밀루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야. 우린 이미 이 저주의 덫에 빠졌어.”

“뭐?”

이온은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카밀루스도 알아야 하는 부분이었기에 입을 열었다.

“내가 저주의 타깃이 된 이유는 아마 너 때문이 맞을 거야.”

“…….”

카밀루스는 그에 입을 벌린 채로 굳어 버렸다. 이온은 그가 더 마음 아파 하리라는 걸 알았지만 설명을 굳이 멈추지는 않았다.

저주를 풀기 위해 목숨을 걸겠다고 말하는 카밀루스의 각오를 바꾸려면 시점의 전환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재니스인지 마리엘인지 모르겠지만, 저주의 시전자가 원하는 건 너나 내가 아니라 이 아이인 거 같아.”

아마도 그들은 이온 크레이거에게 저주를 건 그 시점부터, 이온을 향한 카밀루스의 ‘맹목’을 읽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주 기나긴, 어쩌면 지금보다 더 오래 걸렸을지도 모를 앞날을 내다보며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일지도.

그렇게 생각할 만한 근거가 분명히 있다.

최근 며칠간 이온은 아파서 거의 누워만 있었다. 그러다 잠깐씩 깼을 때 할 일이 없어서 저주의 여러 효과들을 내내 다시 들여다보았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되었다.

이 저주는 분명히 삶의 많은 부분을 제약할 만큼 좋지 못한 증상을 일으키지만, 막상 저주 대상이 죽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떤 성별이든 상관없이 아이를 낳게 해 주는 저주.

어이없고 이상한 저주인 게 틀림없지만, 만약 이 결과 나오는 ‘아이’가 진짜 목적이라면 이 저주 설계가 말이 된다.

하지만 이온에게 달려 있는 온갖 상태 이상 목록을 보지 못할 카밀루스는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아이를 노려서 그들이 얻는 이득이 뭐가 있다고…….”

“반대로 말하면 너랑 나를 노려도 그들이 이득을 보는 건 없어.”

“…….”

카밀루스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아무런 반응을 못 했다. 이온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손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카밀루스, 날 지키려고 목숨 걸 생각 하지 마. 나한텐 이 아이를 지킬 힘이 없잖아.”

카밀루스에게는 잔인하게 들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가 지금껏 가장 중시했던 걸 내려놓으라는 소리이니까.

그러나 이제는 정말로 그래야 한다. 카밀루스가 정말로 책임이라는 걸 짊어지려 한다면.

설령 그 압박감에 짓눌려 숨이 막힌다 해도.

“……이온.”

“네가 내 곁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알겠어?”

계속 다그친 이후에야 카밀루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이온은 그제야 안심하고 작게 미소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