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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25)화 (225/317)

“너무 걱정하지 마. 넌 지금도 충분히 강하니까.”

“…….”

카밀루스는 입을 굳게 닫은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생각이 아주 많아진 모양이었다.

이온 역시 갑자기 제가 딛고 있는 땅이 불안정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처럼 무섭다고 칭얼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마침 마차가 내황성으로 진입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성문을 통과하기 전에 검문을 위해서 그들이 타고 있던 마차의 문이 활짝 열렸다.

* * *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와 달리 오늘의 황궁은 입구에서부터 다소 복작거렸다.

사실 내황성을 진입하면서부터 이미 살벌한 기운은 충분히 감지되었다. 그레나 기사단의 기사들이 평소보다 많이 동원되어 태양궁 앞을 지키고 있었고, 노아 기사단의 기사들은 내황성 곳곳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마탑주 재니스와 그 조수인 마리엘 때문에 황제의 침실이 숯덩이가 됐다는 소문이 귀족들 사이에도 하루 만에 퍼졌을 정도이니 이 난리를 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온은 마차에서 막 내려 황궁을 들어가기 전, 내황성 어디에서나 보이는 이름 없는 탑을 바라보았다.

언뜻 보기엔 평범하지만, 그 괴괴함만큼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탑. 사실 이제 와서는 흉물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이들의 비극을 품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꼭 가야 해…….’

저의 비극 역시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소공작!”

제가 먼저 내려서 카밀루스가 손잡아 주는 걸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온이 시선을 돌렸다.

물론 듣자마자 썩 반가운 목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평소라면 위엄 있는 척 응접실에 앉아 있었어야 할 버니언이 마중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온은 그에 마침 제 옆에 다가온 카밀루스의 손을 얼른 잡아 버렸다. 순간 버니언의 표정이 뒤틀리는 게 보였지만, 이온은 활짝 웃으며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그간 많이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폐하.”

위신 없이 궁을 뛰어 나오던 버니언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카밀루스와 이온 앞에 우뚝 서서 제 나름대로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안내할 수 있게 해 주겠나?”

궁 안쪽이었다면, 혹은 사람이 좀만 적었다면 카밀루스의 손에서 이미 이온의 손을 떼어 냈을 그였다.

하지만 버니언도 눈치라는 걸 보기는 하는 건지, 평소보다 더 보는 눈이 많은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이온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완곡한 거절의 말을 뱉었다.

“죄송하지만 대공께서 여기까지 함께 온 노고가 있으신 터라.”

그에 버니언은 슬쩍 미간을 좁혔다가 손을 자연스럽게 돌려서 궁문 쪽을 가리켰다.

“서둘러 들어가지,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온은 카밀루스와 눈빛을 한 번 교환한 뒤 안쪽으로 들어갔다.

함께 걸어 태양궁의 홀을 지나고, 버니언과 그 시종들의 발길을 따라 계단을 오르는 동안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카밀루스의 손에서 긴장감이 충분히 느껴졌다.

중앙의 계단을 오르고 회랑으로 진입했을 때였다. 카밀루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재니스와 마리엘이 이 안에서 마법을 썼다고 들었습니다.”

그에 버니언이 카밀루스를 힐끗했다.

평소처럼 눈으로 욕하는 느낌이긴 했지만 버니언은 딱히 비꼬는 말 없이 순순히 답했다.

“그래, 결계의 억지력이 통하지 않은 모양이다. 대공이 시전해 둔 건데 이상하지?”

“…….”

“혹시 날 죽일 생각이었다든가, 그런 의도였던 건 물론 아닐 테지만.”

버니언의 말에 가시가 있었다. 사실상 그의 말뜻은 그런 꼬투리를 잡아서 카밀루스를 몰아붙일 수 있다는 경고나 다름없기는 했다.

반박할 말이 있냐는 듯 버니언이 치켜뜬 눈으로 카밀루스를 올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그 나름의 책임감을 느끼는 카밀루스였지만, 일단은 다른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당연히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폐하. 어쨌든 저희는 한쪽이라도 피가 섞인 형제 아닙니까. 제가 폐하를 해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형제라.”

“그리고 설마 즉위식 때의 재니스를 기억 못 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

“결계의 마법을 간파하지 못한 척하지 않았습니까? 일부러 힘을 숨긴 자입니다.”

미묘한 신경전이 오가는 형제의 대화를 듣고 근처의 시종들이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언뜻 호의적인 것처럼도 보이는 카밀루스의 태도를 진짜로 그렇게 읽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제아무리 정치에 어두운 자라도 현재 황제인 버니언에게 가장 걸림돌이 되는 이가 비렌시움 대공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까.

당연히 당사자인 버니언은 헛웃음을 쳤다.

“밑천 다 드러내 놓고는 여전히 잘난 척하기는.”

카밀루스는 그 말이 썩 불쾌한 모양이었는지 표정을 굳혔다. 내내 신경 쓰던 부분을 긁혔기 때문에 사실 당연한 반응이기는 했다.

“폐하께서 허락을 내려 주신다면 더 강한 결계를 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게 가능하면 왜 애초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지?”

만날 꼬투리만 잡는 버니언치고 제법 합당한 지적이었다. 이온도 이에 대한 답은 궁금한 터라 카밀루스를 올려다보았다.

카밀루스가 곧 낮아진 목소리로 답을 내놓았다.

“결계가 워낙 광범위하게 적용되어서 시전 시 힘이 많이 필요한 편입니다. 그리고 이전 결계의 억지력에 비례해 대략 측정하는 정도가 있었는데…….”

“재니스와 마리엘이 예상보다 셌었다는 소리군요.”

“그렇습니다, 소공작.”

거들어 주자 카밀루스가 얼른 받았다. 이쯤 되니 버니언은 결계보다도 그들 사이에 오가는 좋은 분위기가 거슬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자 차마 그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자, 대공. 그대의 그런 안일한 마음이 어떤 일을 불러왔는지 확인하라고.”

다른 곳과 다르게 문이 날아간 방.

응접실 방향으로 향하지 않았을 때부터 이온도 카밀루스도 짐작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안내된 곳은 침실이었다.

어제의 난리를 증명하듯이 앞에는 진입을 금지하기 위해 줄을 쳐 놓은 상태였다. 앞에 칼 단장이 있는 것을 보고 이온이 눈인사를 하자 칼도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신뢰 안 하는 거 아니었나?’

이온은 버니언에게 약간이나마 심경의 변화가 있었음을 감지했다.

그간 이온은 버니언이 주변 이들을 믿지 못하도록 이런저런 일들을 만들어 냈었다. 실제로 잘 돌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했고.

그런데 칼 단장이 이곳에 있는 게 영 의외였다. 대체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다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는 아니었다.

카밀루스가 이온의 손을 살며시 놓고서 버니언의 침실 앞으로 다가섰다.

과연 예상대로 안쪽이 온통 새까맣게 그을려 버린, 처참한 방의 모습이 드러났다. 카밀루스는 방 안을 둘러보고는 짧게 감상을 읊었다.

“완전히 엉망이군…….”

버니언이 뒤에서 한마디 덧붙였다.

“시전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어.”

이 정도면 마법진 같은 걸 그려서 도망갈 시간도 없었을 거란 얘기였다.

하지만 재니스와 마리엘은 사라졌다.

그것도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카밀루스는 급격한 피로함이 몰려오는 걸 느끼며 뒤돌아섰다.

“그래서 이걸 우리한테 보여 주는 이유가 뭐지?”

기실 침실을 불태운 것은 버니언이지, 재니스와 마리엘이 아니었다. 내황성 안에 거대 결계를 쳐 놓고 그곳에서 마법을 쓰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조항으로 성문화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재니스와 마리엘이 버니언을 직접 공격한 게 아니니 그들에게 현재 명확한 죄는 없다.

애초에 소문을 낼 때부터 그들이 황제를 공격했다고 하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그러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버니언이 소문을 낸 건 아니고, 시종들이 낸 것이기도 하니까 처음 방을 뛰쳐나왔을 때 버니언이 무슨 소리를 했을지가 중요하긴 했을 터였다.

급박한 상황이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한데 질문을 던지면 곧장 카밀루스에게 추궁을 이어 갈 줄 알았던 버니언이 그러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니까 뒤따라와.”

그러고 먼저 등을 돌렸다.

카밀루스는 도로 방을 빠져나와 이온의 손을 잡아 주며 버니언의 뒷모습을 눈짓했다.

왜 저러는 거 같냐는 신호였다. 그에 이온도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해 보면 카밀루스를 부르자마자 면박을 줬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잠깐 빈정거리고 시비만 걸었을 뿐이다.

그런 거야 일상적인 거니까 별로 특별한 일이라고 할 수도 없다.

‘뭔가 이상하긴 한데…….’

이온도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각본을 써 가면서 황궁까지 오기는 했지만, 버니언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존재라 아무래도 전부 틀릴 것 같았다.

그는 상식으로 상대할 사람은 아니긴 하니까.

버니언의 발이 향한 곳은 황궁 내에 있는 집무실이었다.

따라온 시종들을 전부 바깥에 세워 둔 채 안으로 들어선 버니언은 문을 굳게 닫아 놓으라 지시해 놓고서는 카밀루스와 이온을 자리에 앉게 했다.

“거기, 두 사람 편한 대로 앉아.”

“…….”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개인적인 공간에까지 부른 건지.

푹신하고 고급스러운 소파이지만 굳이 왜 이곳을 골랐을까 싶어 긴장이 된 이온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응접실은 대화를 위한 공간이다 보니 상석과 손님 자리가 가까운 편이었는데 집무실은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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