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26)화 (226/317)


또한 창문이나 방문과의 거리도 훨씬 멀어서 이쪽의 소리가 바깥으로 빠져나갈 것 같지도 않았다.


비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말은 거의 적중했다.


“마리엘이 그러더군. 이온이 아이를 가졌을 거라고 말이야.”


첫마디부터 충격적이었다.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순간적으로 그런 계산을 놓칠 만큼 당혹스러운 이야기였다.


이온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 책상에서 뭔지 모를 서류를 가져오며 걸어오는 버니언을 빤히 바라보았다. 당황한 건 카밀루스도 마찬가지였기에 두 사람의 시선이 버니언에게로 고정되었다.


그게 썩 만족스러운 듯 버니언이 한쪽 입꼬리를 살며시 올려 웃었고, 카밀루스는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버니언의 말을 곱씹었다.


“마리엘이 그랬다고?”


“그래, 마리엘.”


재니스가 아니라.


카밀루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버니언의 말의 진위를 알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온이 임신한 걸 이미 인지했다면, 그녀가 저주의 시전자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버니언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들과 마주 앉았다.


이온은 다리까지 꼬며 앉는 버니언을 보면서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버니언은 언제나 약간의 조급함을 내비치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의연한 척해도 어딘가 급해 보이고, 늘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평소 은연중 내비치는 그 초조함이 버니언에게서 거두어져 있었다.


버니언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카밀루스에게로 눈을 향했다. 약간의 질타마저 어린 말투로 그가 카밀루스에게 한마디 헀다.


“누가 말했는지만 물어보고 부정을 안 하는 걸 보니 진짠가 보다?”


“…….”


카밀루스가 침묵으로 답을 대신하자, 버니언은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이 이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온, 진짜로 임신을 할 수 있었구나.”


“이미 알고 계셨나 보죠.”


이온은 노골적으로 피곤하다는 신호를 보내며 대답했다. 그러자 버니언이 살며시 눈웃음을 지었다.


좀 불쾌한 웃음이라 이온이 눈썹을 살짝 들썩였다.


“빠르게 용건을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폐하. ……편지에 썼듯이 제가 요즘 몸 상태가 썩 좋지 못해서요.”


“그래, 이온. 넌 겨울에는 특히나 약하지.”


염려스럽다는 어투로 건네는 버니언의 말이 이온은 솔직히 거북했다.


제게 제발 관심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니 아무래도 버니언이 또 자신을 두고 뭔가를 하려고 불러낸 느낌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그래도 버니언이 그렇게 질질 끄는 성격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언제나 골 아픈 문제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온의 아이, 내가 지킬게.”


역시나 이야기를 듣자마자 카밀루스는 곧장 욕설을 뱉었다.


“무슨 개소리를 하고 싶은 거지?”


“말 그대로야. 이온도, 이온의 아이도 내가 지킨다고. 어차피 네놈 새끼는 제대로 못 할 거잖아. 재니스랑 마리엘을 감당해 낼 수 있겠어?”


카밀루스는 하, 하고 실소를 흘렸다.


대꾸해 줄 가치도 없는 말이었지만 앞에 면상을 들이대고 있으니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미쳤어, 버니언 퍼렌도 클로델?”


“안 미쳤는데.”


“그럼 넌 그 재니스와 마리엘을 감당할 수 있나 보지? 아니, 그 전에…….”


버니언을 서늘하게 노려보며 카밀루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온의 배 속에 있는 게 내 아이라는 건 알고 지껄이는 소린가.”


카밀루스의 지적에 버니언이 이온을 한번 흘낏했다.


“……당연하지.”


그리 말하며 제 배로 향하는 그의 시선에 이온은 부담스러움을 느꼈지만 이곳에 앉아 있는 한 피할 방도는 없었다.


다행히 카밀루스가 그걸 감지한 모양인지 버니언에게 경고했다.


“그딴 눈깔로 보지 마. 계속 그따위로 보면 평생 앞을 못 보게 해 줄 수도 있어.”


“이 새끼가…….”


“설마 내가 못 할 거 같나? 너무 손쉬운 일인데.”


버니언과 카밀루스 사이에 신경전이 일었다. 덕분에 버니언의 눈길에서 해방된 이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버니언의 망언은 끝나지 않았다.


“어쨌든, 너보다 내가 이온을 더 안전하게 지킬 수 있어. 난 재니스와 마리엘, 두 사람이랑 협상할 카드를 가지고 있거든.”


“협상할 카드? 믿을 만하긴 한 건가.”


“충분히 실효성 있는 카드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굳이 네 역겨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이렇게까지 말하겠어?”


“그럼 어디 그 쓸모없는 계획을 말해 보든가. 물론 무슨 말을 듣든 내가 네 손에 이온을 넘기는 일은 절대 없을 테지만.”


버니언도, 카밀루스도 서로를 향한 혐오를 아낌없이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이온은 이러다가 이 방도 불타는 게 아닌가 우려가 되었지만, 일단 버니언의 입에 주목했다.


그가 두 손을 깎지 끼고 무릎 위에 올려 놓더니 여유롭게 말을 시작했다.


“사실은 내가 어제저녁에 마리엘과 재니스의 비밀을 알게 됐거든. 카밀루스, 너도 선선대 황제와 재니스가 한 맹세에 대해선 알고 있겠지?”


“긴말 필요 없어. 본론만 말해.”


“성질 급하긴…… 계속 들어.”


카밀루스가 짜증을 내는 모습이 썩 마음에 드는지 버니언은 오히려 여유와 배짱을 부렸다.


“재니스가 이 클로델 황가에 왜 충성 맹세를 했는지, 그러니까 그들의 그 거래 조건이 뭐였는지 알게 됐어.”


“…….”


핵심을 말하지 않고 자꾸 말을 빙빙 돌리는 버니언을 카밀루스가 지그시 노려보았다.


공작에게서 선황과 선선황의 이야기를 듣기는 했었다.


하지만 거기서 선선대 황제에 대해서 유추할 수 있는 건 사실상 거의 없었다. 로제니아와 선황의 아이를 원했다는 것 외에는.


그리고 그 아이가 바로 카밀루스, 자신이다.


……어쩌면 거래의 조건 중 하나가 카밀루스의 존재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는 있었지만, 재니스의 충성 맹세에 대한 배경은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하여 어서 그 조건이 뭐인지 말하라고 추궁하고 싶었지만, 버니언은 절대로 쉽게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그게 자신의 우위 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예상대로 버니언은 그게 훈장이라도 된다는 듯이 내세우며 카밀루스를 도발했다.


“이 정도면 꽤 흥미가 있는 소리 아닌가? 지금 어차피 너도 확신을 못 하고 있을 거 아니야. 네가 그들보다 센지 약한지. 그럼 싸우기보다는 거래를 택해야지.”


“……하.”


카밀루스는 버니언이 제가 뭐라도 된다는 양 말하는 게 황당한 터라 깊은 한숨을 흘렸다.


“그래서, 실체도 알지 못하는 그걸 나더러 신뢰하라고?”


“너, 이온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거 아니었어?”


“제일 중요하지. 그리고 난 그런 소중한 걸 너 따위한테 맡길 정도로 무능하지 않아.”


카밀루스가 더 들을 것도 없겠다는 듯 그만 소파에 몸을 기댔다.


“할 말은 그게 끝인가?”


“아니.”


그만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치는 카밀루스에게 버니언은 단호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온을 황궁에 두고 가. 네 손에 맡기기엔 불안하거든.”






“……제 의사는 생각 안 하시나 보죠?”




카밀루스와 버니언의 이상한 논쟁을 지켜보던 이온이 마지막 말을 듣고 불쑥 끼어들었다.


제가 물건도 아닌데 황궁에 두고 가라느니 하는 말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게다가 자기가 뭔데 이온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겠다 말겠다 하는 걸까. 솔직히 말하면 버니언의 이야기에는 신빙성이 전혀 없었다.


카밀루스의 아이를 버니언이 지킬 이유가 하등 없기 때문에.


그런 말에 진짜로 이쪽이 넘어갈 줄 알았다면 버니언의 머리가 어떻게 되었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재니스한테 머리라도 맞았나.’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버니언의 시선이 이온에게로 향했다.


“내 선택은 전부 널 위해서야, 이온.”


버니언의 눈빛에 이온은 뒷골이 좀 오싹해졌다. 이전에 저를 따라다닐 때와는 또 다른 집요함이 그의 시선에서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절 위해서요……? 저는 저희 공작 저가 안전하고 편하게 느껴지는데요. 여차피 여기 황궁 결계, 재니스랑 마리엘한테는 통하지도 않는다면서요.”


“그런 게 아니라니까.”


이온이 계속해서 반박하는 말을 입에 올리자 버니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격이 다소 넓은 테이블을 돌아 제게로 다가오려는 것을 보고 이온이 놀라 뒤로 물러나려는데, 다행히 카밀루스가 먼저 튀어나가 버니언을 저지했다.


카밀루스가 팔을 확 움켜쥐더니 버니언을 밀쳐 냈다. 그러자 버니언이 비틀거리면서도 이온을 집요하게 바라봤다.


“내가 널 지켜 줄 수 있어. 진짜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버니언, 너 못 닥쳐?”


중간에 카밀루스가 있든 말든 버니언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이온은 버니언이 진짜로 돌아 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때마침 눈앞에서 연신 점멸해 대는 시스템 창 때문에 그의 행동에 약간의 공포마저 느꼈다.






[상태 이상: 호의]


[버니언 퍼렌도 클로델이 플레이어에게 극도의 호의를 느낍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