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온이 소파 끝으로 이동하며 물었다.
“저 그만 돌아가도 될까요?”
사실 묻지도 않고 나가도 될 것 같았지만.
금세 안색이 하얘진 이온을 돌아보며 카밀루스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먼저 가.”
방의 주인이 아닌 카밀루스가 멋대로 가라고 하자 버니언이 곧장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카밀루스는 한숨을 내쉬더니 그의 두 팔을 붙들고 저를 똑바로 보게 했다.
“넌 나랑 얘기해.”
“난 네놈 새끼랑 더 할 얘기가 없…….”
버니언의 어깨를 집무실 안쪽으로 밀면서 카밀루스가 이온을 재촉했다.
“뭐 하고 있어? 멍하니 있지 말고 빨리 가, 이온.”
“아, 아, 응…….”
이온은 카밀루스가 버니언을 붙들고 있는 동안 서둘러 일어났다. 집무실 문을 열고 나가기까지 버니언이 뒤에서 이온, 이온 하고 부르는 소리 때문에 척추 선을 따라서 소름이 쫙 끼쳤다.
제 이름을 한 번 부를 때마다 시스템 창이 요동을 쳐 대서 더더욱.
[상태 이상: 호의]
[상태 이상: 호의]
[상태 이상: 호의]
[상태 이상: 호의]
문을 닫고 나오면서 이온은 제 손이 살짝 떨리는 걸 느꼈다.
‘대체 뭐야……?’
이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버니언의 집착이 제 생각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았다.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스스로에게 묻던 이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태후 때문에?’
얼마 전에 버니언이 태후에게 욕설을 갈겼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었다. 버니언이라면 얼마든지 그럴 만하다고 여겨서 그냥 넘겼는데 그렇게 단순하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나 보다.
원래 태후가 버니언에겐 애착 대상이라도 되었던 걸까. 그랬다면 벌집을 잘못 쑤신 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공작 저에 찾아와서 문을 안 두드린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문을 닫은 뒤에도 안쪽에서 카밀루스와 버니언이 무어라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싶어서 선뜻 물러나지 못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이온을 불러왔다.
“소공작.”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온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러자 노아 기사단의 칼 나르바에스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당신…….”
“돌아가시려는 거면 제가 마차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네.”
얼마 전 따로 만나서 몇 마디 나눈 적은 있지만 그 외에는 어떠한 교류도 없었던 사람이다. 그래도 이 순간에 도와준다고 하니 조금 고마워진 이온이 어색하나마 그의 뒤를 따라서 걸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딛기 전까지 이온이 연신 집무실 쪽을 돌아보는 걸 칼이 유심히 지켜보다가 들릴 듯 말 듯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최근엔 낮이든 저녁이든 술에 빠져 계십니다. 다행히 소공작께서 오시기 전엔 아니었지만.”
“그런가요.”
이온이 그를 딱히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칼도 그것을 원하는 모양인지 마찬가지로 입을 움직이는 것 외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몸조심하십시오.”
“…….”
이온은 그 말이 염려보다는 경고처럼 들렸다. 버니언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주의하라는, 그런 의미의 경고.
불안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확실히 방금 전의 버니언은 전혀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온은 손으로 배를 감싸며 다짐했다.
앞으로는 절대로 혼자 있으면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함과 동시에 이온이 발걸음을 더 재촉했다. 서둘러 마차로 돌아가고 싶었다. 거기에 자신의 기사인 에렌스트 경이 있을 테니.
다행히 칼도 이온의 마음을 알아채고 재빠르게 황궁 밖으로까지 안내했다. 몇몇 시종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오자마자 예상대로 에렌스트 경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온은 그를 본 즉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감이 밴 그 숨소리에 에렌스트 경이 이온을 팔을 잡아 부축하며 입을 열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어째서 혼자 나오신 건지…….”
카밀루스가 같이 있지 않은 것에 조금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온은 얼른 마차에 올라타면서 대꾸했다.
“대공은 폐하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어. 빨리 가자, 알렉. 할 말이 있으니 너도 타.”
재촉하는 말에 에렌스트 경이 마부에게 저택으로 가라고 이른 뒤 따라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이온은 마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 뒤에야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에렌스트 경에게 말을 붙였다.
“아직 재니스와 마리엘의 행방은 못 찾은 거지? 마탑에도 안 나타난 거고.”
질문이 다소 갑작스러웠을 테지만 에렌스트 경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예, 그거 때문에 마탑에서도 말이 좀 많은 모양입니다.”
“마탑 인간들은 재니스를 꽤 신봉한다고 들었는데?”
“물론 부정적인 쪽으로는 아닙니다. 사실 마탑주가 폐하께 위해를 가한 것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폐하께서 마탑주를 해하려 한 상황이고…….”
“상황이 상황이라 도망친 게 당연하다는 쪽으로 흘러가려나.”
이온은 중얼거리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나 버니언이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방에서 뛰쳐나오자마자 카밀루스와 자신을 찾을 게 아니었다. 그들이 사라진 즉시 누명이라도 씌우고 수배령을 내렸어야 했다.
하지만 매일 술독에 빠져서 이지가 흐려진 건지 원래 그만큼은 멍청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론이 이상한 방향으로 형성될 거 같았다.
에렌스트 경도 그 때문에 좀 한숨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요. 폐하께서 그들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도 쉬쉬하고 있지 않습니까?”
“……선선황대의 맹세에 대한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어.”
그리고 진짜 문제는 이거였다.
버니언이 그걸 빌미로 오히려 재니스와 마리엘을 제가 컨트롤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한다는 것.
그 때문에 버니언이 말한 대로 자신이 지켜지기는커녕, 오히려 재니스와 마리엘이 저희들로부터 비호가 되는 형국이었다.
이온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진짜 골 아프게 꼬였네…….”
버니언은 역시나 복병이었다.
계속 이렇게 나오면 오히려 버니언을 먼저 쳐 내야 할 수도 있었다.
생각을 이어 가다가 이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정신이 아닌 버니언이랑 카밀루스를 둘만 둬도 될지 모르겠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자꾸만 가슴이 두근릴 무렵이었다.
마차 바닥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먼저 그것을 알아챈 에렌스트 경이 고개를 내려 바라보자, 미약하게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꾸우, 꾸.”
소리가 들린 뒤에야 이온이 눈을 반짝했다.
내내 숨어 있던 욤뇽이가 이온의 발밑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욤뇽이? ……언제 따라온 거야?”
분명 집에 두고 온 줄 알았는데.
이온이 반응하자 에렌스트 경이 기꺼이 녀석을 들어 제 무릎 위에 올렸다.
어쩐지 울망울망한 눈동자의 욤뇽이가 구슬을 안고 있었다. 이온이 그곳에 손을 뻗자 시스템창이 출력됐다.
[화이트 드래곤으로부터 ‘기억의 구슬’을 습득했습니다.]
기억의 구슬? 욤뇽이가 제게 무언가를 보여 주고 싶은 걸까.
당황한 사이 에렌스트 경이 방금 전 이온이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 전했다.
“도련님께서 태양궁에 계시는 동안에 갑자기 와서 근처에서 아장거리고 계시길래 제가 마차 아래에 숨겨 놨습니다.”
“아, 응…….”
에렌스트 경도 페드로와 마찬가지로 욤뇽이에게 은근히 존대를 쓰고 있었다.
어쨌든 드래곤이라는 흔치 않은 생명체에게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아서 다행인 건가.
이온은 내심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욤뇽이의 구슬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욤뇽이가 에렌스트 경의 말대로 아장거리며 이온의 품으로 옮겨 왔다.
“꾹, 꾸.”
무릎에 살며시 앉은 녀석이 이온에게 자세히 보라는 의미로 구슬을 들고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이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을 재촉했다.
“뭘 보여 주고 싶은데? 빨리 작동시켜 봐.”
이온의 채근을 듣고 나서야 욤뇽이가 구슬에 손을 딱 붙였고, 아기 드래곤의 마나에 반응한 구슬에서 빛이 확 퍼졌다.
처음 보는 광경에 에렌스트 경이 신기해하는 사이 이온은 구슬에서 나오는 영상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렇지만 낮 시간에, 아무도 없다고 안심하고서 이온의 침대 위에서 평화롭게 자는 욤뇽이밖에는 비치는 게 없었다.
지난번 탑의 모습을 비쳐 줄 때는 1인칭 시점으로 기억이 저장된 걸 보고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거 3인칭으로도 기록이 되는 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