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온의 중얼거림에 욤뇽이가 엣헴, 하고 자랑하듯이 가슴을 내밀었다.
자는 와중에 초점이 갸우뚱한 이후로 복구가 안 되는 걸 보면 미리 구슬을 밖에다 내놓거나 할 경우 이렇게도 활용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잔뜩 긴장했지만 막상 욤뇽이가 배를 깔고 누워서 자는 장면이 비치니 조금 허무해진 이온이었다.
대체 뭘 보여 주고 싶은 거냐는 의미로 욤뇽이를 슬쩍 보았을 때였다. 욤뇽이가 급하게 영상의 한구석을 가리켰다.
“꾸우!”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에렌스트 경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림자? 조금 부자연스러운 위치에 있는 거 같긴 하군요.”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온은 목뒤가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욤뇽이를 보니 에렌스트 경의 말이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대체 누가?
물론 제가 없을 때 사용인들 중에 누군가가 청소를 하러 들어왔을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만약 그랬다면 창문을 열어 두고서 여러 사람이 훨씬 더 분주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기척에 민감한 욤뇽이는 사람들이 있을 때는 바깥에 있지 않는다. 그리고 영상 속 방은 창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이온은 저도 모르게 긴장해 버렸다. 손끝이 굳는 느낌이 든 순간이었다. 그림자가 움직이는가 싶더니 영상의 시야가 휙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비치는 것에 경악한 이온이 바깥을 향해 외쳤다.
“마차 멈춰!”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그러자마자 소공작의 명령에 따라 마차가 급하게 멈춰 섰다.
말이 급하게 세워지면서 히이잉,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를 갑자기 세운 탓에 순간적으로 몸이 확 쏠릴 뻔하자 에렌스트 경이 이온의 몸을 붙들어 주었다.
이온이 어깨를 떠는 모습을 본 에렌스트 경이 당황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도련님이 이토록 동요하는 모습을 본 것이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온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22%입니다.]
너무 놀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방금의 영상 때문에 조정이 된 건지 모르겠지만 사망 확률까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이온이 숨을 갈급하게 들이켜며 과호흡 증세까지 보이려 하자 에렌스트 경이 침착하게 속삭였다.
“도련님, 숨을 천천히…….”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이온이 입을 다물고 코로만 숨을 쉬었다. 다행히 얼마 안 가 숨을 진정시킨 이온을 보고 에렌스트 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여기, 어디야?”
이온의 물음에 에렌스트 경이 마차의 창문을 열어 바깥을 슬쩍 확인했다. 약간 시끌시끌한 분위기에 이온은 대략 짐작했지만 대답을 기다렸다. 곧 예상대로의 답변이 돌아왔다.
“아직 성 앞의 큰길입니다. 갑자기 멈춰서 그런지 사람들이 쳐다보는데요.”
“마차는 샛길로 빼라고 해. 여기서, 여기서…… 카밀루스를 기다릴래.”
“대공께서 언제 오실 줄 알고요.”
“그래도 그게 안전해.”
이온의 말에 에렌스트 경도 어느 정도 공감은 하는지 마차 문을 살짝 열고 누군가에게 마차를 샛길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이온은 그동안 욤뇽이를 품에 꼭 안았다. 욤뇽이가 물빛 보석안으로 이온을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꾸우.”
제가 이온을 많이 놀라게 한 것 같아 미안해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이온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속삭였다.
“고마워, 욤뇽아. 잘했어. ……이런 일은 오늘 처음인 거지?”
“꾸.”
욤뇽이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이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 번이라도 더 있었다면 정말로 저택으로, 특히나 제 방으로는 못 돌아갔을 것이다.
욤뇽이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는 이온의 손이 살며시 떨렸다. 에렌스트 경은 그런 그를 염려스럽게 보면서 한마디 했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일단 방을 옮기시는 게 좋겠습니다.”
에렌스트 경이 제시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대안이긴 했지만 이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저쪽에서 마음만 먹으면 내가 어디 있든 상관없이 찾아올 수 있을 거야.”
“…….”
단호한 대답에 에렌스트 경도 더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납득한다는 의미였다.
불안감에 입술을 짓씹던 이온이 문득 버니언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마리엘이 그러더군. 이온이 아이를 가졌을 거라고 말이야.〉
자신에게 저주를 건 사람은, 역시 마리엘일까.
질문을 던지다가도 왜 그녀의 목표가 ‘아이’인 것인지 몰라 혼란에 빠졌다. 중간의 퍼즐이 없으면 그 사실에서는 더 이상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할 듯했다.
다만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려고 했다. 어쨌든 남의 아이에 관심을 가진다는 점 자체가 정상이 아니다. 한마디로, 매우 음습했다.
그리고 아마 버니언은 왜 마리엘이 자신의 아이를 필요로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렇게 싫어하는 카밀루스의 아이인데도 지키겠다느니 마느니 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의 지켜 준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정도로 이온은 아둔하지 않았다.
버니언의 성미상 아이를 낳기도 전에 꺼내서 마리엘에게 갖다 바친다고 안 하면 다행이었다.
이온은 멈춘 마차 안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시간을 죽였다. 에렌스트 경도 곁을 비우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것인지 묵묵히 기다렸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자, 카밀루스가 조금 늦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마음이 불안해졌다.
“황궁에서 별일 없겠지……?”
“별일 있어도 설마 대공께서 다치거나 하는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꾸우.”
맞아, 맞아.
에렌스트 경의 말에 욤뇽이가 동의한다는 양 추임새를 넣었다. 이온은 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아 괜히 품 안의 욤뇽이만 연신 쓰다듬었다.
말랑한 몸체를 쓸어내리니 조금 안심이 되는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역시 카밀루스가 오지 않으면 완전히 진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온은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 문득 의문을 가졌다.
‘카밀루스한테 언제부터 이렇게 의존하게 됐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곁이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었나 보다.
이온은 카밀루스의 존재감이 제 안에서 이렇게 커졌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했다.
매번 나에겐 네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는데, 막상 무서운 상황을 맞닥뜨리니 카밀루스부터 찾게 됐다.
그렇지만 가족보다도 자신을 더 챙기고, 늘 옆에 있어 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눈뜨면 제일 먼저 보이는 사람이기도 했고, 제가 아프다고 하면 제일 먼저 달려오는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아무리 봐도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해 줄 만큼 강해 보이는 이도 카밀루스밖에는 없었다.
욤뇽이가 기억의 구슬 속에 담아 온 영상이 돌아간 순간 나타난 얼굴…….
작고 어여뻐 보이지만 마기에 잠식되어 얼굴이 반 이상 검게 물든 그 여자.
마리엘을 상대할 만한 자는, 이온이 알고 있는 한 오로지 그뿐이었다.
* * *
버니언의 몸이 축 처졌다. 카밀루스는 틈을 놓치지 않고 서둘러 한 팔로 그를 받아 내었다.
“…….”
덩치는 저와 비견될 만큼 큰 녀석이라 그런지 꽤 무거웠다. 그렇지만 카밀루스는 그렇게 힘들이지 않은 채 안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녀석을 상대하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다. 똑같은 사람이 돼서 거울처럼 같이 막말할 수도 있고, 때려서 정신 차리게 할 수도 있고…….
하지만 카밀루스가 선택한 건 수면 마법을 뿌리는 거였다. 대화할수록 버니언이 제정신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화가 나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카밀루스는 그를 집무실 책상 앞 의자에 던져 놓으며 방금 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자 저절로 미간이 좁혀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온이 떠나고 나서 버니언은 카밀루스를 노려보며 자기가 네 애를 키워 줄 건데 뭐가 문제냐고 큰소리를 쳤었다. 그러나 카밀루스가 한 마디 대꾸도 없이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자, 이내 자기 가슴을 쳐 대며 말했다.
〈나 진짜 이온을 사랑한다니까? 너만 사랑하는 게 아니야. 나도 너 못지않게 지난 8년간 최선을 다했다고!〉
〈그래서?〉
〈왜 나는 이온을 차지 못 해? 왜 잠도 못 자고, 왜 애도 못 만들고! 백번 양보해서 애를 키워 주기라도 하겠다잖아.〉
말을 하다 보니까 이 녀석이 진짜로 애를 키우고 싶어 하는 건지, 아니면 목적이 있어서 이러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당연히 후자겠지만 나중에는 울먹이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서 카밀루스는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차라리 강대강으로 치고받으면 편하게 제압이라도 하겠는데, 갑자기 울어 버리니 그냥 미친놈으로밖에는 생각이 안 됐다.
쓰레기를 상대할 때와 미친놈을 상대할 때의 태도는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화내고, 울고 하는 모습을 보니 어린 시절의 자신이 생각나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고 있긴 해? 난 탑에 갇혀 있을 이유 같은 거 없었어!〉
〈재니스도, 당신도 전부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거야!〉
막 탑에서 나왔을 시절,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제 아버지와 재니스에게 원망을 쏟아 냈었다.
분노했고, 그 때문에 울기도 했다.
그러다 분노를 쏟아 낼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지독한 우울증에 빠져 무기력하게 있었다.
그런 와중에 돌이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게 해 주는 이온과의 추억은 유일한 탈출구로 작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맹목적으로 거기에 매달리게 되었다.
모든 게 망가져 버렸다는 걸, 제 인생을 분노하는 데 전부 허비해 버렸다는 걸 깨닫고 정신을 차린 때는 이미 나아갈 길을 상실한 뒤였다.
아마 이 녀석도 그 상태랑 비슷하지 않을까 하면 좀 불쾌한 구석은 있어도, 맞는 말일 것이다. 혼자 있으면 매일 술독에 빠져 있다고 들었으니.
카밀루스가 잠들어서 색색 숨을 내뱉는 버니언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너무 망가지지 마. 괜히 죄책감 생기니까.”
앞으로 이온과 세워 놓은 계획을 수행하다 보면 버니언을 필연적으로 쳐 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이딴 녀석을 어떻게 망가뜨리고 쫓아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자격도 없고, 자리에 맞는 인성은 더더욱 갖춰져 있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