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에 네가 자리를 비웠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는 물건이 뭐가 있지?”
이온은 끙, 하고 머리를 굴렸다. 설마 나이트 가운 같은 건 아닐 터다. 카밀루스가 가끔 벗겨 주니까…….
이유를 생각하는 이온의 얼굴이 다시 발개졌다. 그리고 그 무렵, 에렌스트 경이 끼어들었다.
“설마, 이걸까요?”
에렌스트 경이 품 안에서 꺼낸 물건은 이온의 방 열쇠였다. 가끔 비상용으로 쓰는 용도였다. 카밀루스가 일리 있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받아 들어 확인했지만 이번에도 정답은 아니었다.
그걸 지켜보던 페드로가 문득 물었다.
“얼마 전에 대공의 방을 열었을 때 하인을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거기에 이 방 열쇠도 있습니까?”
“……거기엔 없지만 제 전담 버틀러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제가 긴 외출을 할 때는 그 버틀러가 종종 이 방을 잠가 두었다가, 제가 저택으로 돌아오면 다시 열어 둔다고 했었다.
제가 방을 쓰는 데 불편함 없도록 늘 이 방에 오기 전에 그가 다시 조치를 취하는 모양이라, 가끔 실수하는 게 아닌 한 실질적으로 제 방이 잠겨 있는 걸 거의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오늘도 황궁에 다녀온다고 미리 일러 두었으니, 그렇게 했을지도 몰랐다.
말을 듣자마자 에렌스트 경이 방을 튀어나가 이온의 버틀러를 데려왔다.
그냥 일상적인 시중을 들겠거니 하면서 왔을 버틀러는 이온의 방에 사람이 모여 있는 데다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은 데에 살짝 눈치를 보았다.
그런 그에게 이온이 넌지시 물었다.
“내 방 문, 오늘도 혹시 잠가 놨었어?”
“아, 예. 도련님께서 외출이 길어지실 거 같다고 하셔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옆에서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럼 그 열쇠를 좀 보여 줄 수 있나?”
그에 버틀러가 이온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는 눈빛을 보냈다. 이온이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는 품에서 작은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아마 창고 열쇠 등을 모두 모아서 가지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중에서 이온의 방 열쇠가 무엇인지 가려 준 버틀러가 열쇠를 건넨 순간이었다. 카밀루스의 표정이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답이 나왔다.
“이 열쇠가 맞는 거 같아.”
그러고 카밀루스가 날 선 눈으로 버틀러를 돌아보았다.
“이 열쇠에 손댈 수 있는 사람이 당신뿐인가?”
그러자 버틀러는 어리둥절해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가끔 다른 하인들이 빌려 갈 때가 있어서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
이온은 심각한 분위기 때문에 더욱더 쩔쩔매는 제 버틀러를 일단 손짓해 내보냈다. 그는 무슨 영문인지 궁금해하는 듯 보였지만 일단 방 밖으로 물러났다.
간단히 마법을 해제한 뒤 협탁 위에 열쇠를 내려놓은 카밀루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단순히 마법이 어디에 걸렸느냐의 문제가 아니야, 이온. 마법을 걸려면 일단 이 물건에 손을 댈 수 있어야 하니까.”
“그럼 내 전담 버틀러일 수도 있는 거야?”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아. 마나가 너무 미약해. 마법을 아예 못 쓰는 사람이 아닐까 싶은데.”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내심 몇 년 동안 자신을 모셔 온 버틀러를 의심해야 하는 건가 걱정하고 있던 이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하인들 중에 마리엘이 둔갑했던 사람이 있거나…… 아니면.”
“수족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 경우면 아버지가 그야말로 난리가 나겠네.”
“자꾸 남 일처럼 말할 건가?”
카밀루스는 은근히 무신경해 보이는 이온을 질책하는 듯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남일처럼 대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래야 이 저택에서 제정신을 생활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 테니까.
주변인들을 일일이 전부 의심하면서 망가진 버니언이라는 예시를 이미 보고 왔지 않나.
“벌써 저택을 떠났을 가능성도 충분하니까. 그렇지?”
“……없지는 않겠지.”
크레이거 공작가가 사용인들을 무척 조심히 들이고, 그만큼 높은 대우를 해 주지만 드나드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둔갑을 했든, 사람을 들였든 흔적도 남겨 두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마리엘이 바보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거 때문에 우리 계획이 변경되어서는 안 돼. 그러니까 알렉.”
“말씀하십시오, 도련님.”
“앞으로 넌 당분간 내내 내 집무실에 좀 있어야겠는데.”
“예……?”
다른 명령을 받을 줄 알았던 에렌스트 경은 썩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이온은 품의 욤뇽이를 들어 보였다.
“욤뇽이가 저택의 구석구석을 밝혀 줄 테니까.”
“꾸?”
게으르게 꼬리와 날개를 늘어뜨리고 있던 욤뇽이가 졸려서 게슴츠레하니 뜨고 있던 눈을 동그랗게 만들며 이온을 돌아보았다.
이온은 그런 욤뇽이의 얼굴에 제 얼굴을 비비며 웃었다.
“구슬을 만들 때마다 마나가 소모되지만 날 위해서는 많이 많이 만들어 줄 수 있지?”
“……꾸우?”
욤뇽이는 여전히 이해 안 되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먼저 알아들은 카밀루스가 그런 어린 화이트 드래곤을 보면서 웃었다.
“투영의 구슬 좀 내놔 봐.”
“……!”
그제야 욤뇽이는 이온의 말이 뭔지 알아듣고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그러고 자기 작아지면 어떡하냐는 의미로 물빛 눈을 글썽였지만 이온은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 * *
마지막으로 버니언과 만난 다음 날 황태후궁의 시녀와 하인 들이 모두 갈아치워졌다. 십수 년 동안 태후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던 시녀장조차도 떠나면서 태후는 그대로 궁에 유폐되다시피 했다.
아무도 만나지 못했고, 무엇 하나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침실로 들어가도, 집무실에 있어도, 정원으로 잠시 나가도 언제나 버니언이 보낸 시녀들과 우락부락한 그레나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이 따라다녔다.
태후는 오늘도 제 옆을 지켜 서고 있는 시녀에게 물었다.
“……내가 연말 연회 때는 밖으로 나갈 수 있기는 한 것이겠지?”
“…….”
하지만 금언령이라도 받은 듯이 태후의 시선을 받은 시녀는 물론이고, 어느 누구에게서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태후는 제 앞에 놓인 음식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도 내게 답을 내 주지 않으려는 모양이구나. 황제 폐하께서 태후궁에 금언령이라도 내렸나 보지.”
도저히 무언가 먹을 기운이 나지 않아 수프만 끼적거리고 있으니 뒤에서 짧게 반응이 돌아왔다.
“송구합니다.”
목소리를 따라 뒤를 돌아보니 기사 하나가 허리를 가볍게 숙이고 있었다.
“……되었다.”
그날부터 며칠째 모두가 이러고 있었다.
태후도 분명 처음 하루 이틀 정도는 버니언의 마음을 이해해야지 했다. 그만큼 스스로가 아들을 많이 실망시켰음을 알긴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러기를 벌써 며칠째, 태후는 답답해서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냥 꺼져 버려, 이 개년아!〉
마지막으로 들은 그 말을 떠올려 보면 버니언이 얼마나 분노했는지는 충분히 이해하는 바이기는 했다.
게다가 버니언은 조치를 취한 뒤에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역시 어미의 꼴도 보기 싫다는 것이겠지.
또각, 또각…….
식당에서 적당한 식사를 하고 나온 태후는 하인들이 깨끗하게 닦아 둔 복도를 걸어가면서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연말 연회 때가 되면 드레스의 풍성한 레이스로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몸이 많이 무거워질 거 같았다.
저번에 만났을 때 카밀루스가 스스로 퍼뜨린 불륜 소식을 이용해서 그를 축출해 낼 것을 이야기했지만, 버니언이 과연 그걸 정말로 따를까.
처음에는 버니언이 카밀루스라면 물불 가리지 않으니 그러리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제가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고 나니 그러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해졌다.
‘도대체가 바깥의 소식을 알 수 있어야…… 안심을 하지.’
태후는 최근 언제나 그러듯 침실로 돌아가 이불 위에 누웠다.
이 시간만큼은 그나마 가장 마음이 편한 시간이었다.
이 또한 버니언의 명령인지, 아니면 자신을 불쌍하게 여겨 조금 느슨하게 해 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30분 정도 눈을 감고 있다 보면 다들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물론 누워서 눈감고 있다 보면 정말로 잠드는 때도 있기는 했지만, 최근에는 어떤 활동도 없이 먹고 자고를 반복하다 보니 이제 그쯤은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찰칵.
문이 닫히고 밖에서 잠기는 소리가 들려오자 태후는 실눈으로 주변에 사람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는 이내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하.”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대단하십니다, 태후께서도.”
“……!”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들려온 목소리에 태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분명히 방 안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깜짝 놀라 비명마저 지를 뻔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마치 무언가가 막은 것 같았다.
“소리를 지르시면 곤란합니다, 태후 폐하.”
“……?”
태후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떻게 들어온 건지 몰라도 그녀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마탑주 재니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검은 커튼이 그리워진 창문가에는 마리엘이 서 있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친 순간 태후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대체 이들은 어떻게 들어온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