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
태후는 혹시나 근처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침실이 어두우니 빛이 나는 마법진이라면 금세 눈에 띌 텐데도.
태후가 말을 하고 싶어 입을 뻐끔거리는 모습을 보고 재니스가 작게 웃는 소리를 내더니 작게 물어 왔다.
“조용히 말씀하실 것이지요?”
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니스가 작은 손짓으로 그녀의 입에 걸린 금언 마법을 풀어 주었다.
말을 할 수 있게 되자마자 태후는 우선 궁금한 것을 물었다.
“재니스, 내황성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건가요?”
“그러니 제가 여기 있지 않겠습니까, 태후 폐하.”
“아…….”
그렇다면 오히려 위험한 것 아닌가?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재니스가 돌연 그녀의 손을 잡아 오며 눈을 휘어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재니스는 클로델 황가에 종속된 종이니까요.”
태후는 평소에도 재니스가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왜인지 웃는 얼굴인데도 경계심을 일으키는 그의 모습에, 태후가 손을 살며시 빼냈다.
“무슨 용건으로 날 찾아왔나요? 버니언이…… 나와 아무도 만나지 말라고 명한 것 같았는데.”
“안심하십시오. 바로 그 폐하의 명으로 저희가 찾아온 것이니까요.”
“버니언의 명으로?”
태후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버니언의 명을 받았다면 왜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침실로 침입하듯이 온단 말인가.
하지만 곧 이유를 알게 됐다.
“태후 폐하께서 아이를 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황실의 씨가 아닌.”
“버니언이 말해 줬나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렇군요. 한데 그걸 버니언이 왜 재니스에게…….”
불안감에 말을 채 맺지 못하고 끝을 흐리는데 재니스가 대답을 내놨다. 눈은 태후의 배를 향한 채였다.
“폐하께서 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셔서 말이지요.”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담백한 재니스의 말에 태후는 움찔했다.
“아이를…… 없애라고 했나요?”
“안 하셨을 것 같습니까?”
재니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해 오는 것에 태후는 침묵했다.
마지막에 보았던 버니언의 모습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런 선택을 했을 가능성도 존재함을 태후도 알았다.
아이를 이용하라고 했을 때, 대번에 카밀루스가 빠져나가면 어떡할 거냐고 소리치던 그였기에.
태후는 얼굴에서 피가 싹 가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볼록하게 올라온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이 아이는 선황의 시종이었던 하일로 백작과의 불륜으로 만들어졌다. 선황이 침대를 벗어나지 못할 때쯤부터 시작된 그와의 관계는 금세 육체적인 단계로 넘어갔다. 심지어는 선황이 누워 있는 방의 옆방에서 질펀하게 몸을 섞은 적도 있었다.
그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 외로움을 위로받는 달콤함과 저를 사랑해 주지 않는 선황을 배신한다는 쾌감으로 백작과의 관계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불순하게 시작되었다고 해서 태후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차마 아이를 없앨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는 이미 아이도 너무 커진 상태였고 말이다.
하여 일단 낳아 놓고, 어미 없는 백작의 사생아로 키우든 어딘가에 맡겨 두든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황실 소속은 될 수 없는 아이니까.
그래서 버니언에게 요양을 가고 싶다고 했던 것인데…… 이렇게 되면 거절의 말이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싫다고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알기 때문에 태후는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폐하. 아프진 않을 테니까요.”
“재, 재니스.”
“하실 말씀이라도?”
“아이를 살릴 방법은 없나요?”
태후는 이 질문이 아주 어리석은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언제나 이성적인 판단만 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재니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살며시 입꼬리를 올려 웃더니 태후의 속을 들여다본 듯 가장 허술한 부분을 찔러 왔다.
“설마 이 분란 덩어리를 낳으시게요?”
“…….”
“태후께서는 마음이 약하시고, 배 속에서 몇 주 통안 키우셨으니 정이 드셨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재니스의 말에 태후는 고개를 숙였다. 거절의 말이 나올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기에, 뒤에 무슨 말이 나올지에 대한 기대감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살리고 싶으십니까?”
“…….”
묻는 말에 태후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이거 곤란하긴 하네요. 황가의 종으로서 폐하의 명을 어길 수는 없는 것인데, 태후 폐하의 부탁을 실현시키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니.”
“방법이 있나요?”
묻는 말에 재니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케이프 후드를 푹 눌러쓴 채 내내 창가에 묵묵히 서 있는 마리엘에게로 시선을 돌린 것이었다.
별말을 듣지는 않았으나 사뿐사뿐 걸어온 마리엘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재니스에게 건네었다.
병 안에서 끓고 있는 보라색의 약물이 눈에 들어온 순간, 태후는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선황이 남기고 간 두 개의 약물 중 하나와 같은 것이었다. 카밀루스에게 보였을 때 검은 꽃 모양의 연기가 피어올랐던.
“이건…… 저주를 일으키는 약물 아닌가요?”
카밀루스에게 가져가라고 건네주었던 바로 그것. 담긴 약병의 모양이 달라지긴 했지만 혼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모습이 똑같았다.
태후가 바로 알아보고 물어보자 재니스가 가는 눈썹을 꿈틀하더니 의외라는 듯 대꾸했다.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그이의 유품이었거든요.”
“그이라면.”
재니스는 알면서도 괜히 확인하기 위해 태후의 말을 곱씹었다.
“선황 말이에요.”
태후는 선황에 대해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별로 유쾌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생전에는 그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매달리기도 했었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그런 제 과거가 그저 싫을 뿐이었다.
어차피 되지 않는 일에 왜 그렇게 매달렸던 것인지.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한데 태후의 말을 들은 재니스의 표정과 말이 무척 기묘했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
태후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의미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재니스는 별것 아니라는 양 생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가 곧 말을 이었다. 즉, 태후가 많은 생각을 하기 전에.
“이건 저주를 일으키는 약물이 맞기는 합니다만 본질은 그게 아닙니다. 그러니 마탑주인 제가 마탑에서 금기시하는 마기를 다루어 이런 걸 만든 게 아니겠습니까.”
“그게 내 배 속의 아이와 무슨 상관이죠?”
“그야, 배에서 꺼내도 계속 살아남아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
재니스가 약병의 뚜껑을 톡톡 치며 이야기했다.
“이게 바로 그 답입니다, 태후 폐하.”
태후는 재니스가 침대 위에 내려놓은 약물을 힐끗했다. 아무리 봐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태후가 그에게 아이를 살려 주면 안 되냐고 물은 건 당장 꺼내도 아이가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가 아니었다. 그저 재니스에게 배 속의 아이가 다 클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는 의미였다.
물론 아이를 없애 버리란 버니언의 명령을 받고 온 것이라면 무리한 요청임을 알았다. 그래도 생각해 낸 것이 제 배 속이 아니라도 살 수 있는 아이라니…… 기괴해 보이기는 했다.
그래도 모두를 속일 수 있는 해결 방법인 것은 분명하니 일단 물었다.
“이건 어떤 작용을 하는 약이길래 그런 일이 가능한가요?”
“쉽게 말씀드리면, 마기로 감싸서 인간의 것보다 더 단단한 자궁을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 마나를 응축해서 아이를 보호하는 것이지요.”
태후는 마법을 다룰 줄은 몰랐지만 그에 대한 지식이라면 다소간 있는 편이었다. 사실 없어도 마기와 마나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만 안다면 재니스가 대략 무슨 말을 하는지는 눈치챌 만했다.
한마디로 인간의 몸에 마기를 집어넣어 몬스터의 자궁을 생성한다는 의미였다.
태후는 마른침을 넘겼다.
“……마기는 다룰 수 없는 영역이라고 들었는데.”
“그건 인간이 마기에 대해 무지해서 그리 말하는 것뿐입니다. 몬스터들 중에는 마기로 흑마법을 부리는 종들도 있지 않습니까. 오우거 메이지와 같은.”
“그런가요?”
태후는 반문하면서도 일견 맞는 말인 것 같아 이해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부작용이 있기는 할 겁니다, 태후 폐하.”
“무엇이지요?”
재니스는 태후가 약에서 관심을 끊지 않고 계속 대화를 이어 가는 것이 몹시 흡족한 듯했다. 즐거워하는 듯 웃음기가 밴 얼굴로 그가 말을 이었다.
“이 안에는 마기보다 더 많은 양의 마나가 녹아 있지요. 마시는 순간에는 잠시 몸의 어떤 질병이든 몰아낼 수 있을 만큼 마나가 충만해지겠지만…….”
“내게 부작용이라도 생기는 건가요?”
“온몸의 마나가 새로 구성된 자궁 안에 전부 쏠릴 겁니다. 이 약물은 오로지 아이만 지키려는 용도의 약이니까요.”
이야기를 들은 태후는 재니스의 말을 금세 알아챘다. 말인즉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임부는 보호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설마 이 약물의 저주가 크레이거 가문의 아들이 걸린 그 저주와 같다고 상상도 하지 못하는 태후는 다만 말없이 재니스가 내민 약물을 내려다보았다.
재니스는 태후의 선택슬 기다리는 듯, 더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덕분에 태후는 여유롭게
제 몸에 몬스터의 자궁을 심는 것은 아주 꺼림칙했지만 현재 재니스가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이 방법이라면…… 고려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태후는 홀린 듯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아이를 살리고 싶은 열망이 있다고는 해도 역시 이런 물건을 활용할 정도로 스스로가 몰렸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버니언은 마음이 약하니까, 그러니까 일단 재니스를 물리고 어떻게든 간에 버니언을 만나 빌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