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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32)화 (232/317)

한데 재니스는 그런 태후의 희망을 단숨에 짓밟았다.

“역시 아이를 위해 본인의 몸을 해하시는 것은 어려우시겠지요. 게다가 마기를 이용하시는 것이니……. 그럼 태후께서 고통이 길지 않도록 아이를 제가 그만 낙태를 시켜 드리지요.”

그러고 배 쪽으로 손을 뻗는 것에 태후가 깜짝 놀라 그의 손을 저지했다.

“자, 잠시만요, 재니스.”

태후의 말에 재니스의 손이 멈추어 섰다.

“내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어요. 그러니 몆칠만 말미를 주면 안 될까요? 버니언이 꼭 오늘 하라고 하진…….”

중간에 말허리를 끊고 재니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장, 지금 당장 가서 그 근본 없는 새끼를 지워 버려.”

저를 빤히 바라보는 눈빛이 오싹했다. 태후는 등의 솜털이 오소소 곤두서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렇게, 버니언이 그렇게 말했나요?”

재니스는 방금의 기색을 지우듯이 얼굴에 다시 미소를 띠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태후는 크게 숨을 삼켰다.

버니언이 욕하고 그녀를 가둬 두기는 했지만 이런 조치까지 취할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재니스가 방금 한 그 말은 버니언이 충분히 할 만한 말인 것은 분명했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황인 터라 태후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태후는 겁을 먹어 재니스에게서 조금 물러나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 어떻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잠들었다 깨어나시면 그 배 속이 텅 비어 있으실 테니. 후유증으로 다시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시겠지만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건조하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짚는 재니스의 말을 듣고 태후는 손을 떨기 시작했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라앉아 버린 것처럼 머릿속까지 차가워졌다.

“재니스, 제발, 며칠만이라도.”

그러나 사실은 저 역시 갈 길이 바쁜 상태인 재니스는 깔끔하게 거절의 말을 내뱉었다.

“저도 폐하의 명을 어길 수 없는 처지라. 요즘 워낙 주변에 배신자들이 판을 쳤다 보니 안 그래도 예민하신 폐하께서 더 히스테릭해졌지 뭡니까?”

그 주변의 ‘배신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함을 아는 터라 태후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저도 지체할 수 없음을 혜량하여 주시길. 이 재니스도 폐하의 분노를 사는 것은 무섭다 보니요.”

그러고 재니스가 다시 태후의 볼록해진 배에 손을 뻗었다. 배 위에 내려앉는 그 가늘고 긴 손가락을 보고 태후는 결국 재니스가 원하는 답을 냈다.

“약, 이 약을 마시겠어요.”

그러면서 급하게 주변을 더듬어 약병을 들었다. 순간 케이프 후드 아래 마리엘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으나 태후에게는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약을 마시면…… 아이를 정말 살릴 수는 있나요?”

“살릴 수는 있지요.”

오로지 살리기만.

태후는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녀가 아이가 든 제 배를 쓰다듬었다. 기실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이겠지만 몇 개월간 조마조마해 가며 몰래 제 안에 키워 온 것이었다. 정이 안 들었을 리 없다. 그것 때문에 버니언에게 요양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까지 했으니 더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이 재니스가 그 아이를 잘 키우겠습니다.”

“…….”

“아이는 훌륭한 마탑의 마법사가 될 겁니다. 어쩌면 저보다 더 강한 아이가 될지도 모를 일이지요.”

“혹시 버니언이 알게 되면…….”

“그럴 리 있겠습니까? 이 약물이 특별해서 살릴 수 있는 것이지, 원래라면 이 시기의 아이는 배 밖으로 나오면 죽는 것을요.”

머뭇거리던 태후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제 몸이 망가지는 거라면 아이라도 살리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재니스가 거두어 간다면 백작도, 자신도, 버니언도 더는 곤란해지지 않을 테고.

태후는 약병의 뚜껑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냥 마시면 되나요?”

“예. 마시면 잠시 몸에 아주 폭발적인 열기가 도실 겁니다. 마나의 순환이 갑자기 활발해지고, 몸이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열기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요?”

“잠시 자고 일어나시면 됩니다. 제가 고통을 겪지 않으시도록 마법을 걸어 드릴 테니.”

나직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재니스의 말은 마치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뭐든 원하는 대로 되고, 아무런 걱정이 없을 거라고 유혹하는 이야기는 무척 달콤했다.

태후의 손이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피어오르는 꽃 모양의 검은 연기와 함께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다.

곧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열기가 그녀의 온몸을 덮쳤다.

* * *

네 도움이 필요해. 황궁으로 와 줘.

그리고 이온은 요즘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날아오는 버니언의 편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에렌스트 경이 그만 확인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제가 대신 읽겠다고 이야기했지만 혹시 모르니 직접 챙기는 거였다. 에렌스트 경이 눈치 못 채는 다른 게 있을까 봐.

그렇지만 이제는 진짜 그냥 맡겨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왔다.

게다가 어제까지는 연말 연회 때 첫 춤을 추자, 나랑 약혼식이라도 올리면 안 되냐 하는 아주 단세포가 쓴 게 아닐까 싶은 편지만 왔었다.

오늘은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거였다. 물론 카밀루스는 보자마자 이온의 손에서 빼앗아 찢어 버리려 했지만.

하지만 이온은 일단 만류하고 카밀루스를 욤뇽이와 함께 방으로 보내 버렸다.

그러는 가운데 이온은 저택에 갑작스러운 손님을 맞았다. 제 전담 버틀러의 부름으로 응접실 문을 여니 이온의 아버지, 크레이거 공작이 먼저 자리해 있는 것이 보였다.

이온은 멀뚱히 공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공작은 태연한 태도였다.

“왔느냐, 소공작.”

“아, 예…….”

이온이 대답하고는 저를 찾아온 손님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달갑지는 않은 상대, 칼 나르바에스였다.

게다가 오늘은 몰래 찾아오기라도 한 것인지 단신으로, 그것도 기사단 제복조차 입지 않고서 왔다.

이 정도면 크레이거 공작의 경계를 사기에는 충분한 인물이기는 한 터라 이온은 공작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

버틀러의 말에 따르면 칼은 저와 대화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했지만, 사실은 대화 상대가 누구였든 별 상관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미 공작과 대화가 꽤 진전된 상태였다.

칼은 이온이 등장하자 가볍게 고개만 숙인 뒤 말을 이어 갔다.

“현재 이 사실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긴 합니다만…….”

이온은 말을 들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약병을 확인했다. 뭔가 싶어 관심을 보이자 설명을 요구하기 전에 공작이 먼저 설명을 해 왔다.

“이온, 태후께서 현재 아주 위중하시다고 하는구나.”

“……갑자기요?”

무슨 얘기를 하는가 싶었더니 태후궁과 관련된 것이었나 보다.

이온은 칼과 눈을 마주쳤다. 드레스셔츠 한 장 걸치고 온 그는 아무리 봐도 공적인 업무로 찾아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갑자기 공작가에 온 것인지 몰라도 가지고 온 소식 자체도 꽤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태후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데 그곳의 소식을 아무것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황실 기사단인 그레나 기사단이 직접 태후궁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외부에서 아무도 들이지 않고, 안쪽의 사람들도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 중이라는 소문이다.

해당 조치는 버니언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태후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고성이 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그때 이후에 들어간 조치였다.

태후궁에 가둬 두는 이유도 사실 짐작은 갔다. 카밀루스가 황태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려 줬으니 말이다.

그런데 건강하던 태후가 돌연 위중해졌다니.

무슨 일이냐는 의미로 이온이 칼을 바라보자 그가 답했다.

“제가 태후 폐하를 직접 살폈는데, 아무래도 거기 있는 약병의 약을 마시고 저주에 빠지신 것 같았습니다.”

“저주라니…… 무슨.”

“몸에 마나가 돌지 않더군요. 그리고 운신을 거의 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이온이 움찔했다. 몸에 마나가 돌지 않는 저주. 그 말을 듣는 순간 칼이 왜 공작 저로 찾아왔는지 명확하게 이해해 버렸다.

이온이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공작을 돌아보았다.

“대공 전하를 불러야겠어요.”

하지만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고 난 직후, 응접실의 문을 누군가 먼저 노크했다. 공작이 들어오라고 대답하자, 시종장이 들어와 바깥의 상황을 전했다.

“각하, 대공 전하께서 혹시 동석을 해도 되는지 여쭤봐 달라고 하셨습니다.”

역시나 부르기도 전에 알아서 찾아오는 게, 연애적인 쪽만 제외하고 나머지에서는 눈치가 백 단인 카밀루스다웠다.

“서둘러 들어오시라고 해라.”

어차피 저주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이온이나 공작보다야 카밀루스의 전문 분야였다.

말로는 묻는다고 해 놓고 벌써 대기하고 있었는지 공작이 모셔 오라는 이야기를 하자마자 카밀루스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칼이 바로 일어서서 허리를 굽히자 카밀루스는 적당히 눈짓만 한 뒤 이온의 옆에 앉았다. 그러고 다분히 경계하는 어투로 칼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왔지?”

칼은 공작과 미리 나눈 이야기들을 다시 꺼내기 전에 먼저 긴, 변명 같은 말을 입에 올렸다.

“우선, 보시다시피 어딘가의 명을 받고 온 것은 아니고 개인적인 판단으로 온 거란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말해 봐.”

서로 개인 감정이 좋지는 않은 상대라 그런지 오히려 대화는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칼은 그의 요구대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태후께서 이틀 전부터 환후가 생기신 탓에 침대 위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시는 상황입니다.”

“원인은?”

그때 이온이 눈치 빠르게 카밀루스에게 약병을 넘겼다. 손바닥의 3분의 1정도 밖엔 안 되는 크기의 유리 약병이었다. 주둥이만 튀어나온 동그란 모양이 아주 평범한 약병.

카밀루스가 그 안에 미세하게 남은 보라색 약물을 보고 미간을 구기는 사이, 칼이 대답을 전해 왔다.

“근처에 그 약병이 떨어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마시시고 저주에 걸리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의원도 원인을 모른다고 해서 급하게 제가 가 태후 폐하의 몸을 살폈는데, 몸에 마나가 돌지 않고 있으시더군요.”

“……조금도?”

“제가 느끼기엔 그랬습니다.”

카밀루스가 이온을 돌아보았다. 그 역시 이온과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금 겉으로 보는 상태는 어떻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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