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씀드리면, 말 그대로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눈을 전혀 못 뜨고 있나?”
“예, 그리고 몸이 아주 차갑습니다. 사람의 체온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카밀루스는 미간을 구기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온도 왠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혹시 살아 있는 건 절대 행운 때문인가.’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마나도 돌지 않고, 사람의 체온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만큼 몸이 차가운데 살아는 있는 거라면.
좀 오싹한 기분이 들어 긴장감에 손을 움켜쥐고 있는데, 카밀루스가 이어 물었다.
“태후의 배 속에 아이가 있었던 건 알고 있나?”
“안 그래도 제가 찾아온 이유가 그거 때문입니다.”
“답답하게 굴지 말고 빨리 말해라.”
카밀루스가 재우치자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째선지 대꾸가 바로 나오지는 않았다.
아직 그 역시 속에서는 정리가 되지 않은 것인가.
칼의 혼란감이 어린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응접실에 있는 이들 모두 그에게서 말소리가 나올 때까지 인내심 있게기다려 주었다.
다행히 길게 가지 않아 원하는 이야기가 들려왔으나 매우 모호한 것이었다.
“태후께서 유산을 하신 듯합니다.”
카밀루스는 이상함을 바로 눈치채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듯합니다’……?”
유산을 한 거면 한 거고, 안 한 거면 안 한 거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렇지만 이온은 왠지 본능적인 불안감을 느끼고는 입을 꾹 다물고 순간적으로 숨까지 참았다.
“유산의 징후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배속에 아이가 없습니다.”
“…….”
이온은 저도 모르게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몸의 마나가 사라지는 저주. 애초에 그런 저주가 흔하지도 않은데, 임신이라는 말과 연관이 되니 역시 제가 걸린 저주와 같은 게 아닌가 강력하게 의심이 됐다.
다만, 아이가 갑자기 사라졌다니.
그것도 유산의 징후도 없이.
당연하게도 카밀루스 역시 그것에 의문을 느낀 모양이었다.
“내가 봤을 때 태후는 이미 만삭보다 조금 못한 수준이었다. 아이가 그렇게 큰데 말이 되나?”
“그래서 저희도 혼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일이 알려지면 괴담처럼 퍼질 테니, 다들 쉬쉬하고 있어 이 일을 알고 있는 것도 극소수입니다. 오죽하면 그레나 기사단장이 저에게 태후 폐하의 몸을 살펴 달라 했겠습니까?”
그레나기사단과 노아기사단은 똑같은 황실 소속의 기사단이라 영역이 겹쳐서 그런지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는 관계였다.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데 그것을 따지지 않고 협업을 요청해 왔으니 사안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의미였다.
카밀루스도 그가 여기까지 와서 허언을 쏟아 낼 위인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진지하게 말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결론이 뭐지. 아이가 대체 어디로 증발했다는 건가?”
곧 주저하던 칼의 입에서 결론이 흘러나왔다.
“……아이는 마리엘이 빼 갔을 겁니다. 아마 장기를 통째로 들어내서.”
딱 한 문장만 들었을 뿐인데 상상되는 그림이 너무 기괴해서 이온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확 찌푸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건 옆에 있는 크레이거 공작도, 카밀루스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하면 더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을 만큼 역겨운 소리라 순간 응접실 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칼 역시 섣불리 또 말을 꺼내기보다는 셋 중 누군가가 제게 질문을 던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밀루스는 옆을 돌아보며 크레이거 공작과 이온에게 요구했다.
“실례지만 조용히 담소를 나눌 수 있게 두 분 다 물러나 주시면 좋을 거 같군요. ……이온, 특히.”
굳이 짚어서 얘기하는 이유는 이온이 남으려고 고집을 부릴 거라고 짐작하기 때문일 터였다.
사실 이온도 더 듣고 싶은 마음 반, 아닌 마음 반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따라서 공작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문을 닫고 복도로 나오자 뒤늦게야 안쪽에서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온은 제가 오기 전에 칼과 이미 대화를 나누고 있던 크레이거 공작을 슬쩍 올려다보며 물었다.
“처음엔 무슨 내용을 나누셨어요?”
“별건 아니었다. 폐하께서 태후를 거의 방에 가둬 놓다시피 하고 있는데, 잠깐 감시를 물린 동안 일이 생겼다고…….”
이온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이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오늘 버니언에게 온 편지를 떠올렸다. 도움이 필요하니 황궁으로 와 달라는.
하지만 카밀루스가 아닌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뭘까 생각해 보면 이 일과 관련한 일일 것 같기는 했다.
아무리 봐도 태후의 저주는…… 자신이 걸린 저주와 동일해 보였기 때문이다.
제 저주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비슷한 추론을 할 것이다. 옆에 있는 크레이거 공작을 포함해서.
그래서인지 멍하니 방으로 향하려는 이온을 어느 순간 크레이거 공작이 붙잡았다.
“이온?”
부르는 소리에 이온이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려다 말고 뒤돌았다. 그러자 공작이 이온의 팔을 붙잡고 제 집무실 방향으로 이끌었다.
“아비랑 같이 얘기를 좀 하자꾸나.”
“……응, 네.”
조금 갑작스러운 요청이라 이온은 어설픈 대답을 내놓으며 아버지 방으로 졸래졸래 쫓아갔다.
여전히 집무실엔 책 먼지가 가득해 들어서자마자 이온이 기침을 하자 공작이 서둘러 물을 마시게 했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한참을 기침했던 이온은 겨우 잔을 내려놓은 뒤 아버지를 마주 봤다.
“무슨 일이세요?”
“다른 사람에게라면 몰라도 내 아들에게는 해 둬야 할 말인 것 같아서 말이다.”
뉘앙스가 묘한 말이라 이온은 두 눈에 의문을 띄웠다. 공작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우선 네 그 배 속의 아이, 정말로 낳을 생각인 게냐?”
그에 이온은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놓았다.
“……그런 말씀은 싫어요, 아버지. 낳을지 말지 선택하라는 거잖아요.”
“…….”
공작은 이온을 무슨 생각인지 모를 눈초리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슴이 싸해지게 하는 한마디를 뱉었다.
“저주로 얻은 아이인데도? 제대로 된 아이가 아니면 어쩌려고.”
아버지의 지적에 이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 전의 이야기를 들으니 확실히 그 생각이 들기는 했다.
이 저주의 목적은 아무리 봐도 ‘아이’를 얻기 위한 것인데, 문제는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이기에 낳게 하려는 것이냐 하는 점이었다.
재니스나 마리엘에게 꼭 필요한 아이인 건 분명한데…….
그래서 그들이 아이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이를 낳은 이후의 일이라고만 여겼었다. 칼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배 속에서 빼냈다는 얘기를 떠올리니 아직도 등골이 오싹해져 와 이온은 저도 모르게 긴장해 버렸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아이에 대한 생각을 수정하지는 않을 셈이었다.
이온은 크레이거 공작의 눈치를 살짝 보며 답했다.
“그런 염려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은 그 부분을 고려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였다. 크레이거 공작이 카밀루스를 돕겠다면서 내세운 조건은 이온이 공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엔 혼사를 치르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는 것인데 아이의 존재 때문에 이제는 그가 만족할 만큼 성립하기 어려운 조건이 되어 버렸다.
다만 크레이거 공작도 지금 시점에는 그 부분을 굳이 깊게 따지지는 않았다. 그 역시 일단의 관심사는 아이에 맞춰져 있는 듯했다.
“이 아비는 네가 그 아이를 낳다가 잘못되는 게 가장 걱정이다, 이온.”
“……저는 카밀루스를 믿어요.”
“무슨 뜻이냐?”
“아이를 낳기 전에 저주를 풀어 주려고 최선을 다할 거고, 그게 아니라도 제가 너무 아프지 않게 돌봐 줄 테니까.”
“…….”
이온의 담담한 말에 공작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서, 오히려 제 아들이 얼마나 카밀루스를 신뢰하고 있는지 더 명확하게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공작도 사실 느끼고 있었다. 제아무리 반대해도 두 사람을 말릴 수 없다는 걸 말이다.
애초부터 이온이 그 탑에 가지 않았으면 모를까. 혹은 이온이 카밀루스를 그곳에서 꺼내 오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모를까.
하지만 아주 오래된 과거로 회귀하지 않는 이상에야, 그 일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공작은 답답한 기분에 마른세수를 하다가 이내 이야기를 꺼냈다.
“이온, 잘 듣거라. ……물론 이건 나의 추측일 뿐이라 네가 어떻게 판단할지는 모르겠다만.”
“말씀하세요.”
공작은 얼마 전의 깨달음으로 인해 얻은 한 가지 유력한 추론을 마침내 입 밖으로 꺼냈다.
“대공이 탑에 갇힌 이유는 그 저주 때문일 거다. 이온, 너에게 걸린 그 저주 말이야.”
그런 뒤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무슨 뜻인지, 알겠니?”
아니, 이온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공작의 물음에 이온은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카밀루스가 탑에 갇힌 이유가 제가 걸린 저주 떄문일 거라니.
공작이 중간에 너무 많은 이야기 건너뛴 탓에 이온은 제 머리가 아직은 완전히 그의 말을 따라가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이온은 또한 느꼈다.
아버지의 말에 누군가의 마음, 정확히는 카밀루스의 마음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중대한 진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건…….”
첫마디를 꺼내 놓고도 어떻게 대화를 이어야 할지 몰라 잠시 헤매던 이온은 이내 적절한 말을 찾았다.
“자세히 말씀해 주셔야 하겠는데요.”
“선황의 이야기는 얼마 전에 해 주었으니 벌써 잊지는 않았겠지, 이온.”
당연히 잊지 않았다. 이온은 그중에서 어디가 문제인지, 눈을 굴리며 머릿속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다 가장 연관성이 깊어 보이는 것 하나를 찾았을 때였다. 공작의 입에서 조심스러운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땐 나도 그 일에 대해선 자세히 알지 못했고, 그 때문에 잘못 생각했던 부분도 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내게는 딱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으니 문제점을 몰랐었지.”
“서두가 너무 길어요, 아버지.”
이온이 아버지를 채근하는 의미로 그리 이야기하자 공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시 선황후께서 독을 먹었다고 하지 않았었니? 그게, 사실은 재니스가 저주를 건 것일 확률이 높아 보인다. 아니, 아마 확실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