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이온, 지금의 너와 선황후의 병세가 비슷하니 말이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선황후가 음독을 한 건 그보다 훨씬 이전일 텐데요. 근데 그게 왜 저주와…….”
말하다가 이온은 무언가 깨닫고 스스로 말끝을 흐렸다.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가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종이에 그렸던 육각형 모양의 약병. 결국 그 약의 정체를 카밀루스와 정확히 추론해 내지는 못했었지만, 당시 공작이 전한 말에 따르면 그것에는.
〈이 재니스의 마나를 녹여서 만든 약물입니다, 황태자 전하〉>
재니스의 마나가 녹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로제니아는 음독을 했다고 했는데 해독제가 듣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선황은 어쩔 수 없이 재니스를 불렀고 그때 먹인 것이 바로 그 약물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지 않나. 왜 ‘해독제’가 듣지 않지? 잘못 먹인 게 아닌 이상에야 그럴 리가 없는 건데.
이온의 속눈썹이 떨렸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확실히 이해해 버렸다.
손이 저절로 목 쪽으로 향했다. 이온은 카밀루스가 준 마나석 목걸이를 살며시 꺼내 공작의 앞에 내밀었다.
“아버지는 이 목걸이가, 그 약의 역할인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거죠.”
“……그래.”
이온의 초록빛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시야가 떨리는 것에 이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더 나오지 않았지만, 충분히 공작이 내린 결론이 뭔지 알 만했다.
왜 서두에 아이를 낳을 거냐고 물은 건지도 뒤늦게야 깨달았다.
저주를 받아 태어난 아이, 카밀루스. 마녀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인간의 평균치를 훨씬 상회하는 마나를 몸에 지니고 태어났다.
하지만 선황도, 선황후도 그런 돌연변이 수준의 아들을 얻을 만큼 엄청난 힘을 가진 이들은 아니었다. 그러면 결론은 하나다.
마녀의 아들…….
선황이 퍼뜨렸을 그 말엔, 어떤 간접적인 메시지가 들어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카밀루스가 ‘재니스의 마나로 빚어진’ 아들이라는, 그런 메시지가.
‘아니야, 너무 나갔어…….’
억측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부정해 보던 이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그 어떤 추측보다도 아귀가 잘 들어맞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이렇게 부정하고 싶은 이유는 하나였다.
이온은 제 마나석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정온 동물처럼 이 마나석 또한 언제나 따뜻한 기운이 흘렀다.
카밀루스가 벌써 세 번이나 저를 위해서, 스스로의 몸을 망가뜨려 가며 만든 물건이었다. 저에게는 목숨 같은 것이고, 또한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하게 카밀루스의 마음을 알게 해 주는 징표였다.
자신을 향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순수한지 알려 주는 표상 그 자체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이것조차, 카밀루스의 그 마음조차 누군가의 큰 그림을 위해 이용당했다는 결론밖엔 내릴 수가 없어졌다.
이온의 입술이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하려다 말고 계속 달싹거리기만 했다.
크레이거 공작은 그런 아들의 혼란을 이해한다는 듯이 온화한 어투로 이온을 불렀다.
“이온.”
“……네.”
이온은 제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아 두려움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대화는 거의 예상대로의 흐름으로 흘러갔다.
“그 아이를 낳으면 네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모를 일이야.”
이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대공의 어머니는 바로 죽지 않았어요. 게다가 사인은 자살이었고요.”
“하지만 태후 폐하는.”
“제 저주에 대해서 들으셨죠? 배 안쪽에…… 제 몸의 모든 마나가 뭉쳐 있다고요. 그게 사라지면 당연히.”
그런 상태가 되겠죠.
말끝에 마땅히 딸려 와야 하는 결론을 밖으로 내지 않은 채 이온은 입을 닫아 버렸다. 그 말을 밖으로 뱉는 순간 빠져 버리는 논리의 모순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나눈 아버지와의 대화 속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치면, 또한 한 가지를 무조건 인정해야만 한다.
이 저주를 건 궁극적인 목적으로 보이는 아이란 곧 카밀루스와 같은 돌연변이일 거라는 사실.
그것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돌연변이 말이다.
이온은 평소처럼 제 마음을 읽은 것처럼 떠오르는 시스템창을 가만히 확인했다.
[상태 이상(Hidden): 마나 소실. □□의 저주로 인해 플레이어의 공격력 및 마나가 무조건 0이 됩니다.]
생각해 보면 제 신체의 마나를 순환시키는 기능은 꺼진 게 아니다.
카밀루스가 언젠가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 몸속에 정말로 마나가 돌지 않는 거라면, 애초에 마나를 쏟아부어도 소용이 없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온의 경우는 달랐다. 그에 따라 저주 상태가 호전되기도 하는 등 신체의 반응이 일었다.
결론은 그냥 마나 자체가 들어와도 순환이 안 되게 몸 어딘가로 줄줄 샌다는 거였다. 그러니 생명 유지를 위한 마나를 외부에서 끊임없이 공급해도 늘 제자리인 것이고.
중간에 샛길로 샌 마나의 종착지는 당연히 제 배 안쪽일 것이다.
그곳에 이미 이온의 신체가 수용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을 훨씬 뛰어넘은, 엄청난 양의 마나가 들어 있을 터였다.
그야 당연했다. 카밀루스의 마나석이 늘 제 목에 걸려 있고, 이온이 아플 때마다 카밀루스가 달려와서 아낌 없이 마나를 쏟아부어 주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마나를 새로 태어나는 아이가 먹고 자라는 중이겠지.
어쩌면 카밀루스보다 더한 가능성을 지닌 아이가 태어날지도 모른다.
동시에 이온은 그 아이를 낳는 순간 배 속에 축적되어 있는 마나를 전부 잃게 될 것이고.
생각을 이어 나가는 이온의 안색이 점점 파리해졌다. 크레이거 공작이 자신을 불안하게 살피는 눈빛이 느껴졌다.
지금은 그것마저 이온을 압박하는 요인이었다. 숨통이 꽉 죄어 오는 것을 느끼며 그가 떨리는 입술 사이로 말소리를 냈다.
“……아버지, 이거, 아직 대공에겐 말하지 않으셨죠?”
이온은 말을 마치고 나서야 공작과 눈을 마주쳤다. 꽤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눈길을 배반하지 않고, 다행히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 안 했다.”
이온은 숨을 급박하게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하아, 하아……. 심리적인 압박감이 금세 겉으로 드러나 숨이 벅차 올랐다.
“절대, 절대 비밀로 해 주세요.”
“이온…….”
그 어떤 진실 중에서도 카밀루스가 제일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가 알고 나서 이 타격을 견뎌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말로 선황후에게 저주가 걸렸던 거라면, 그리고 그 결괏값이 카밀루스였다면 결국 그는 제 어머니를 집어먹고 태어난 아이가 되는 것이다.
선황이 그를 증오한 이유, 탑에 가두어서 학대한 이유는 결국 그 때문이었던 거다. 사랑해 마지않았던 선황후의 몸을 살라 세상 밖으로 나온 아이라서.
그러니 카밀루스 클로델은, 그의 입장에선 끔찍한 괴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아마 다른 부분일 터다.
정말로 제 목숨을 걸고 사랑해 왔던 이온 크레이거를 위해 해 온 모든 일들이,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
그 마음이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있었으며, 그게 오히려 이온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었다는 사실.
그 점이 오히려 카밀루스를 더 심하게 괴롭힐 거였다.
제가 조금만 아파도 손을 벌벌 떠는 카밀루스였다. 이온이 이 저주에 걸린 건 저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마음 아파 하는 그였다.
그런데 저주의 시작점이 제 어머니이고, 그 스스로가 저주의 결과물이며, 아직도 고리 안에 갇혀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무너져 내릴지도 몰랐다.
카밀루스가 자신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만큼, 이온 역시 그가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 일은 비밀로 부치는 것이 맞았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카밀루스를 믿어요, 아버지.”
“그 망할 저주를 풀어 줄 거라고?”
“아뇨.”
이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카밀루스를 향한 이온의 신뢰는 이제 그런 단순한 게 아니었다. 저주를 풀든 말든 솔직히 이온에겐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카밀루스가 어떤 과정 속에서 저주를 결국 풀어 주기는 하겠지만, 그건 단지 결과에 불과한 일이다.
이온에게 있어 그보다 중요한 건 카밀루스가 그렇게 움직이는 이유였다.
“매 순간, 저를 위하고 있다는 걸 믿어요.”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그는 그렇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카밀루스에게 아직은 제게 말 못 하는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지금은 불안하지 았았다. 그가 말했듯이 말 못 하는 그 일마저도 저를 위한 것이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카밀루스는…… 절 위해서 뭐든 할 거예요. 그리고 이 순간에도 저를 가장 우선 순위에 놓고 행동하고 있겠죠.”
“…….”
“카밀루스에겐 저보다 더 중요한 건 없으리라고 확신해요. 아마 어떤 사람도 카밀루스보다 절 더 사랑해 줄 수는 없을 거예요. 심지어 아버지조차.”
들으면서 크레이거 공작이 불쾌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아마 크레이거 공작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지만 카밀루스가 지금껏 이온을 위해 포기해 온 것들, 희생해 온 것들의 가치는 생각보다 훨씬 높았다.
아이오딘으로 떠나지 않았고 황도에 머물렀다면 누릴 수 있는 것들.
그리고 황도 귀환 후 대공으로서 카밀루스가 선택할 수 있었던 수많은 가능성들…….
그 모든 걸 제쳐 두고 그는 오로지 이온을 위한 선택만 해 왔다.
그러니 그 희생을 받아 온 이온에게는 그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알려 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적어도 네 그 순수한 마음이 누군가의 노리개였다는 잔혹한 결말을 알려 주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까 비밀로 하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 정도는 대가 없이 해 주실 수 있잖아요.”
“……할 수 있지.”
느리지만 되돌아온 대답에 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숨을 잘못 들이켜 먼지를 잔뜩 마시는 바람에 쿨럭, 쿨럭 기침을 토했다.
왠지 머리도 아파 저절로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이온은 제 몸 상태가 안 좋아지리란 징후임을 알아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돌아갈게요. 나오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