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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37)화 (237/317)

카밀루스는 슬슬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파악했다. 설마, 하면서도 카밀루스는 제가 파악한 문맥을 짚어 말했다.

“선황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정확히는 마리엘이 ‘처리’했겠지요.”

재니스와 마리엘 중 본체는 마리엘이니까.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대화 방향이었다. 카밀루스에게 있어서 선황이란 늘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으로만 각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궁금한 건 언제나 그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만이었다.

왜 아들인 날 그토록 싫어했는지.

어머니는 그렇게 사랑했다면서, 왜 그녀의 태를 빌려 태어난 자신은 미움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는지.

하지만 지금 제 눈앞에 누워 있는 태후 역시도 말하지 않았나.

〈그대가 북부로 향했을 때의 화려한 행렬을 기억하나요? 그이는 그날 대공을 지켜보기 위해 황성의 정문이 가장 잘 보이는 창문 앞에 내내 서 있었어요. 대공이 이끌고 가는 기사들의 행렬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요.〉

그게 선황의 ‘사랑’이었다고.

아들, 카밀루스 클로델을 향한.

생전엔 그토록 차가웠으면서 죽기 직전엔 아이오딘까지 찾아와 대공의 지위를 내리고 간 것에 대해선 ‘양보’였고 ‘희생’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카밀루스는 그 말이 자신을 구원하지는 못할 거라고 대답했지만, 부정하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었다.

자신을 향한 선황의 감정이야말로 애증 그 자체라는 것.

하지만 선황이 왜 그렇게 모순된 감정을 자신에게 품었는지 알아내고 싶어도, 그에 대해서만큼은 다각도로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카밀루스도 마음의 여유가 그리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사람이 말해 주고 있었다. 사실은 선황에겐 자신보다 더한 증오의 대상이 있었음을.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주는 거지? 굳이 이런 번거로운 방식을 빌리면서까지.”

“어차피 대공께선 저나 아스타틴은 절대 안 믿으실 것 아닙니까? 이렇게 눈앞에 증거가 있지 않은 한.”

“그건 그간 그대들이 나한테 보인 태도 때문일 텐데?”

“예, 그래서 반성하고 있습니다.”

“…….”

너무 깔끔하고 가볍게 인정하는 상대방의 모습에 카밀루스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에서는 약간의 건들거림마저 느껴졌다.

원래 이런 성격인가?

우직하다는 선황의 평가 때문인지 상당히 고지식할 거라고 여겼었는데, 이런 모습은 좀 당황스러웠다.

어찌 되었든 상대가 자신에게 보이는 호의가 거짓이든 진실이든 적어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불편하게 여길 이유는 없었으므로 카밀루스는 긴장했던 어깨를 풀고, 본인의 어투도 가볍게 했다.

“반성은 왜 갑자기?”

“제가 주로 몸만 쓰다 보니 머리 굴리는 법을 좀 잊었더군요. 그래서 선황 폐하의 마지막 말씀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카밀루스는 올바른 해석이라는 게 뭔지 듣기 위해 더는 가타부타하지 않고 가만히 상대를 응시했다.

“선황께선 대공을 황위에 올리고 싶어 하셨던 거 같습니다.”

순간 카밀루스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그런 헛소리는 역시 안 하는 게 낫지 않겠나?”

“하지만 선황의 말년을 생각해 보시지요. 본인이 쓰러지고 나서도 폐하께선 황태자에게 섭정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정신은 영명하셨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제가 아는 선황께선 그러실 분이 아니십니다.”

“아니, 내가 아는 선황은 그럴 만한 사람이야.”

이젠 말을 하지 못하는 선황의 입장을 대신 항변하려 드는 칼의 말을 카밀루스는 단호하게 잘랐다.

사실 칼이 선황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건 그의 마음이지만, 역시나 그 사람에 대한 이런 식의 미화는 참을 수 없었다.

애초부터 정말 그런 의도였다면 선황은 굳이 이렇게 먼 길을 돌 필요 없이 깔끔하게 카밀루스가 적통이라는 것만 알리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한 사람의 행동에 모든 의도가 있으리라고 믿는 건 너무 과한 해석이었다.

“선황은 본인보다 약한 자는 철저하게 짓밟으려는 사람이었지. 모든 걸 제 손아귀에 쥐고 흔들려 하고, 절대 놓지 않았어.”

“대공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만.”

평생 선황에게 괴롭힘당해 온 그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뜻이었다. 제가 객관적이지 않다고 매도하는 느낌도 드는 탓에 카밀루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단지 내가 아는 선황만 그럴까. 크레이거 공작의 취급을 보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바일 텐데?”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매우 모순되는군.”

냉정한 평가에 칼은 의뭉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카밀루스가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인물을 끌고 와 들먹였다.

“하지만 소공작께서는 제 해석에 동의하고 계실 텐데요.”

“……이온 크레이거를 말하는 건가?”

“제 앞에선 두 분이 굳이 안 친한 척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이미 둘의 관계를 다 알고 있는 듯이 말하는 태도에 심사가 꼬인 탓에 카밀루스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이번 건 더 건드리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지 그가 적당히 화제를 넘겨 버렸다.

“어찌 되었든 결론은 그렇고, 제 나름의 방식으로 전하를 도울 생각입니다.”

“내 말은 안 듣겠다는 말이군.”

“상당히 꼬이셨습니다, 대공께서도.”

카밀루스가 계속 꼬투리를 잡자 칼이 슥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렇지만 그의 지적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사실 칼 나르바에스가 카밀루스의 말을 잘 따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또한 둘 모두 알았다, 서로가 섞이지 못하리라는 것을.

선황을 증오하는 자와 그가 죽고 난 뒤에도 따르려는 자.

딱 봐도 합이 안 맞았다.

그래서 카밀루스도 그에게는 일말의 미련도 가지지 않았다.

“난 네가 날 돕든 말든 상관없다. 그런데 재니스와 마리엘에 대해서 잘 안다는 듯이 떠들어 댔으니 한 가지 물을 것이 있는데.”

“말씀하시지요.”

“그럼 마리엘의 목적은 나보다도 더 큰 힘인가?”

물어보면서 카밀루스는 자는 건지 정신을 잃은 건지 모를 태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에게 아무 감정도 없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불렀던 배가 텅 비어 있는 것은 그로 하여금 많은 감정이 들게 했다.

누군가가 짠 판 위에서 태후 역시 놀아난 것이므로.

“그래서 비정상적으로 강한 아이가 필요한 건가. 마치, 나처럼……?”

“인과율에 따라 생각해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결론이 나지 않을까요.”

“……그렇군.”

카밀루스는 그 ‘인과’라는 것에 따라서 더 많은 사실들이 줄줄이 따라 나오리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으나 깊게 파고드는 일은 잠시 미뤄 두었다.

지금은, 아니다.

그걸 지금 따지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 뻔하기에 당장 외면해야만 했다.

아마 이온도 이것만큼은 이해해 줄 것이다. 매번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그이니까.

“하지만 나로는 부족했던 거겠지. 저주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

“태후의 아이는 살아 있다면 황성 탑에 있겠어.”

“그곳에서 마리엘이 대공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들려오는 말에 카밀루스의 눈이 사나운 기색으로 물들었다.

“그 말을 들으니 마리엘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알 만하군.”

그는 아마 황태후의 불륜 사실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을 터이다. 어차피 황실로서는 원치 않는 추문일 것이기에 선황대에는 비밀로 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선황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그러나 선황을 배신하고 아이까지 낳으려는 그녀가 못마땅했던 건가.

그렇다고 해서 칼에게 태후나 태후가 배 속에서 키우는 아이를 이런 식으로 이용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네가 거기에 판을 깔아 놓은 거겠지. 태후의 아이를 이용해서.”

걸음을 옮겨 칼의 앞으로 다가간 카밀루스가 그의 멱살을 확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분노를 가득 담은 말을 씹어뱉었다.

“방금 말 정정하지. 네 방식대로 돕지 마라. 불쾌하니까.”

마리엘을 처리하는 데 이 녀석의 도움 따위 필요하지 않았다. 재니스든 마리엘이든, 그리고 둘이 어디에 있든 찾아가 죽일 생각이었으니까.

손에 닿는 것조차 불결해진 탓에 그를 밀치듯이 놓은 카밀루스가 그만 이 방에서 떠나고자 했을 때였다.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선황의 의지를 따르고 싶을 뿐입니다. 이유를 좀 더 더하면…… 아스타틴이 공작가의 도련님께 죄책감을 가지고 있어서요.”

“…….”

“모든 일이 끝나면 알아서 물러날 테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제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 곳에 굳이 있고 싶지 않으니까요.”

아마 그의 가치라는 걸, 자신만큼은 평생 인정해 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 * *

황실, 특히 태후궁에서 기획한 3일간의 연말 연회가 시작되기 직전에 결국 태후가 서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안 그래도 황제가 제 어미를 태후궁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도록 유폐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아애하던 모두는 그제야 납득했다는 눈치였다.

사실은 황후의 병환 때문에 황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고.

근래 버니언이 술독에 빠진 것도 사실 어머니의 병세가 심각해서 그런 게 아니었겠냐는 미화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면의 진실이야 다른 것이지만 소문이 그렇게 났으니 황실로서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이온이 살살 뿌려 놨던 카밀루스와 황태후의 관계도 묘한 쪽으로 소문이 와전됐다. 아마도 그 역시 태후의 몸을 생각해서 드나든 것 아니겠냐는.

장례식에서 돌아와 완전히 지쳐 버린 이온은 침대에 누워서 잠들기 직전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다 저희들 좋을 대로 해석하네.”

“뭐, 귀족들의 소문이 다들 그렇지요.”

치마를 들친 건 어쩔 거냐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인에게 대고서 그런 부분을 지적하는 이는 물론 없을 것이긴 했다.

문제는 연말 연회였는데, 설마 계획을 폐기해야 하나 싶었지만…… 어쨌든 급하게 태후의 장례를 치렀고 다행히 연회와는 간격이 다소간 있었기 때문에 예정대로 진행한다는 소식이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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