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이미 그날을 위해서 지방 귀족들이 많이 올라온 상황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연회 전날 밤.
그간 오랜만에 황도에 온 북부의 귀족들이 끝도 없이 카밀루스에게 방문을 청하고, 카밀루스도 그들을 일일이 만나고 있었다.
그 때문이라지만 이온은 카밀루스와의 대화가 줄었다. 그가 외출도 많이 하는 탓에 거의 밤 인사밖에 하지 못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이온은…… 왠지 그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고 느꼈다. 정확히는 밤에 태후궁에 다녀온 뒤로부터였다.
물론 카밀루스가 안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낮에 못 만나면 밤마다 방에 들어와 굿나이트 키스라도 하고 갔지만 평소에 잘하던 스몰토크가 사라졌다.
잘 자, 이온. 응. 비몽사몽한 와중에 나누는 그 대화가 그들 사이의 거의 전부였다.
어쨌든 내일의 일도 있고 하니, 오늘은 그냥 넘길 수 없는 터라 이온은 카밀루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카밀루스?”
그러자마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이건 노크 소리를 듣고 열었다기에는 너무 빨라 이온도 놀라던 차였다.
안에서 나온 건 페드로였다.
페드로가 방문 앞에 있는 이온을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얼굴을 풀며 웃어 보였다. 그리고 뒤돌아보며 카밀루스에게 이온의 방문을 전했다.
“소공작께서 오셨습니다, 전하.”
그렇지만 평소와 다른 기색을 느낀 이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싸웠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페드로가 밖으로 나온 뒤 이온에게 안쪽을 손짓했다. 그렇게 이온을 안으로 들여다보낸 페드로가 제 방으로 돌아가는 걸 힐끗했다.
그때 카밀루스가 안쪽에서 그를 불러왔다.
“무슨 일이야, 이온?”
이온이 그에 뒤늦게야 문을 닫고 돌아보자 카밀루스가 소파 앞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이온은 그의 얼굴이 굳어 있는 걸 보며 역시 페드로와 싸웠을 거라는 생각을 확신으로 굳혔다.
이온은 일단 그의 맞은편으로 가 앉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카밀루스가 그제야 팔짱을 풀며 이온에게 살짝이나마 웃어 보였다.
“혹시 내일 일 떄문에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건 아니겠지?”
“뭐, 비슷한데.”
그래도 다행히 페드로와의 다툼이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는지, 카밀루스의 얼굴이 녹았다.
그가 눈을 선명하게 휘며 이온에게 두 팔을 벌려 보였다.
“그래도 아이가 있으니까 무리하지 말아야지……. 이리 와 볼래?”
카밀루스의 청에 이온은 약간의 부끄러움도 느끼면서 맞은편으로 넘어갔다. 그러고 제 허벅지 위에 앉으라는 그의 수신호를 보고는 기꺼이 그렇게 했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이온의 허리를 끌어안는데, 오랜만에 얼굴이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이온이 그런 소회를 느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카밀루스는 이온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며 베이비 키스를 해 왔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이온은 제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의 목을 껴안았다. 그러자 입술을 떨어뜨린 카밀루스가 이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더 예쁘네. 더 귀엽고.”
“…….”
한데 뭔가 위화감이 느껴져 이온이 올라갔던 입꼬리를 내리자 카밀루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표정이 왜 삐진 표정이야?”
이온은 은근히 그의 눈치를 살펴보다가 한마디 했다.
“기분 되게 안 좋아 보여서. 무슨 일 있어?”
“없어.”
“거짓말. 태후궁에 다녀온 뒤부터 내내 별로였잖아. 나랑 얘기도 피하고.”
“매일 밤 찾아갔었는데, 그게 왜 피하는 거지?”
계속 시치미를 떼는 카밀루스의 말에 이온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툴툴댔다.
“내가 잘 타이밍에만 왔으니까 이런 말 하는 거야. 내가 모를 줄 알고? 나 바보 아닌데.”
“…….”
역시나 카밀루스가 대꾸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이온이 범인 잡았다 하는 심정으로 그의 손을 꽉 쥐었다.
“그래서, 페드로는 왜 화가 난 거야?”
“진짜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네…….”
카밀루스가 어쩔 수 없겠다는 양 약간의 한숨을 섞어 작게 혼잣말을 하자, 이온이 생긋 웃었다.
“생존 본능이야. 눈치까지 없었으면 난 이미 시체 됐을걸?”
이온이 죽는다는 표현 비슷하게라도 하면 예민해지는 카밀루스가 대번에 표정을 굳혔다.
“이온,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
“알겠어, 안 할게. 안 해.”
솔직히 말하면 농담에도 왜 이렇게 민감한가 싶었지만 이온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논쟁해 봤자 이 싸움에서는 이길 자신이 없었기에 화제를 넘겼다.
“그래서 네 계획이 뭔데. 나한텐 말해 줘야 하잖아.”
“계획은 그대로야.”
“그런데 문제가 있어? 그 그대로인 계획에 혹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야?”
묻는 말에 카밀루스가 작게 미소 짓더니 이내 이온을 품에 꽉 안았다. 그러고 이온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아니. 그냥 나도 모르게 긴장이 돼서, 이온.”
카밀루스의 불안감 어린 소리를 들으니 역시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이온이 조용히 제게 기댄 그를 마주 껴안아 주는데, 카밀루스에게서 솔직한 말들이 흘러나왔다. 불안감이 가득한.
“네 저주를 풀었는데 더 잘못되면 어떻게 되나 두려운 마음도 들어. 게다가 네가 탑에 같이 가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난 저주를 푸는 것만큼이나 간절히 기억을 찾고 싶어.”
이온은 주저함 없이 제 생각을 말했다.
저주는, 정말 아이 때문에 제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기도 한 데다 제 평생을 괴롭혀 왔으니 두려운 것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터였다.
하지만 기억은 달랐다. 기억은, 이온이 그저 한없이 염원하는 것이었다.
이온 크레이거의 과거 기억이 제게 있어야 비로소 카밀루스의 연인으로서 완벽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되찾는 기억의 종류가 뭐냐에 따라 이 몸에 들어온 제가 누군지 알게 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이온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일이다.
물론 위험한 일이라는 건 이온도 알았다. 이온은 이젠 자세히 봐야 알아볼 만큼은 볼록해진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아이 때문에 걱정된다고 하면 부정은 못 하겠지만.”
카밀루스는 이온의 중얼거림에 그래, 하고 작게 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탑에서 마리엘이랑 재니스가 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태후의 아이도 역시 아마 거기 있을 거고.”
“태후의 아이라니……. 태후는 죽었잖아?”
“아이는 살아 있을지도 몰라.”
이온은 카밀루스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몰라 입만 작게 벌렸다. 이게 다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러나 카밀루스는 보충 설명보다는 다른 부분을 이야기했다. 태후궁에 다녀온 이후로 이 부분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지, 말소리가 퍽 단호했다.
“그러니까 이온, 탑에 같이 가는 계획은 폐기야. 너는 크레이거 공작과 연회장을 지켜.”
“……일단은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페드로랑 에렌스트 경이 널 잘 지켜 줄 거야.”
페드로가 화를 냈던 건 이 부분인가?
이온은 그가 왜 페드로를 데리고 가지 않는지 궁금했으나 일단 더 중요한 부분을 언급했다.
“그럼 이후 계획은, 어떻게 되는데?”
“정 탑에 가고 싶다면 내가 결계를 부수고 나서 그 뒤에 와. 그게 안전할 것 같아.”
“……그걸 전부 끝났다는 신호로 보면 되는 거야?”
아마도 재니스와 마리엘이 죽었다는.
구체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았으나 카밀루스는 충분히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드디어 내일.
이온은 그와 눈을 마주한 채로 긴장감에 어깨를 잔뜩 굳혔다.
카밀루스가 그걸 또 알아챘는지 이온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제 쪽으로 당겼다. 자연스럽게 이온의 몸이 쏠려 그에게로 무게가 실리자 카밀루스는 소파에 기대었다.
이온도 덩달아 몸에서 힘을 풀고 카밀루스에게 편안히 안겼다. 체격 차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의 가슴 위쪽에 기대게 되자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것 같은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이온은 그에 살짝 놀리듯이 이야기했다.
“너도 긴장돼?”
“긴장 아니야. 기뻐서 그러는 거지. 네 저주를 드디어 풀 수 있게 될 테니까.”
이온이 카밀루스의 변명 같은 말에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긴장 때문이든 기쁨 때문이든 이온은 지금의 상태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카밀루스에게 충동적으로 물었다. 이 질문을 하는 건 어쩌면 가슴 한편에 심겨 있는 제 불안함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
“…….”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이온이 고개만 들어 카밀루스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오묘했다. 이온을 보기는 하는데 평소와 좀 달랐다.
어딘지 멍해 보이기도 하고, 시선을 마주쳐 온다기보다는 그냥 이온의 몸을 눈 안에 담는 데 최선을 다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지그시 보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히지 않은 탓에 이온이 의아함을 느낄 무렵, 카밀루스가 그의 허리를 당겨 안으며 속삭였다.
“상관은 없지만 내가 이상한 요구를 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
“이상한 요구?”
이온은 카밀루스의 말을 반복하다가 문득 제 몸이 누르고 있던 어떤 부위가 딱딱해지고 있음을 느끼고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굳어 버렸다.
놀라서 말을 못 하고 있자, 카밀루스가 이온의 약간 볼록해진 배 근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여기가 불안해서 안 되겠지? 그만 돌아가서 자.”
이온이 침을 한 번 삼킨 뒤 고개를 흔들었다.
“……안 불안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