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주의’라는 말에 이온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건 그랬다. 공작가의 유일한 아들이기도 하고, 아프기도 자주 아프고 하는 탓에 저택의 모든 이들이 이온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면이 있었다.
“오늘 첫 춤은 누구랑 추는 거야? 당연히 대공 전하인 거지?”
“……그렇, 지 않을까?”
이온의 어설픈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에밀리가 눈썹을 쭉 끌어 올리더니 이내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카밀루스를 보러 가자며 이끄는 것에, 이온은 못 이기는 척 따라갔다.
복도를 지나가는 동안 크레이거 공작이 있는 1층이건, 이온과 카밀루스가 있는 2층이건 상관없이 분주한 모습이 들어왔다.
특히나 활짝 열린 1층의 저택 입구 밖에서는 공작 부부와 아들딸 들을 연회에 모시고 가기 위해 마차를 점검하고, 어떻게 이동해야 하는지 예행 연습을 하는 데 한창이었다.
이온은 그런 그들을 보다가 이내 카밀루스의 방 앞에 도착한 에밀리가 노크하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카밀루스의 들어오라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먼저 문을 활짝 열었다.
방 안에서는 카밀루스가 방금 전 이온이 그랬던 것처럼 시종들에게 둘러싸여서 정복으로 갈아입는 중이었다.
이온은 카밀루스가 전신 거울 앞에 얌전히 서서 시종들에게 시중을 받는 낯선 장면을 발견하고는 눈을 깜빡였다.
아침의 부드러운 햇살이 방에 난 커다란 창문들을 통해 들어오는 가운데, 카밀루스는 처음 그가 황도로 왔을 때와 달리 백색의 정복을 챙겨 입고 있었다.
이미 그의 외출 준비는 거의 마무리 단계로, 등 뒤로 새파란 천을 늘어뜨리고 옷의 장식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앞에서 보는 큰 키와 건장한 몸에 착장한 옷이 제법 맵시 있는 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어제도 내내 저 몸에 꼭 안겨서 자기는 했지만, 밝은 곳에서 봐도 역시나 멋있는 모습에 이온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소공작, 오셨습니까?”
그러는 사이 방 가운데의 소파에 앉아 신문 같은 걸 들여다보던 페드로가 일어나 이온에게 다가왔다.
역시나 외출하는 게 아니면 늘 셔츠 한 장만 걸쳐 입던 그도 역시 특별한 날답게 오늘만큼은 복장을 제대로 갖추어 입었다.
이온은 그에 페드로에게 적당한 덕담을 건넸다.
“페드로도 오늘은 멋있네요…….”
카밀루스만큼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러면서 이온은 재촉하는 에밀리를 따라서 좀 더 카밀루스에게 가까운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거울에 가려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카밀루스의 앞 모습이 보였다. 평소와 달리 머리를 뒤로 넘겨 이마를 드러낸 모습. 왜 여태껏 이러지 않은 걸까 싶을 정도로 눈에 확 들어오는 모습에 이온이 순간적으로 넋을 빼놓았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이 마주친 카밀루스가 이온을 보자마자 만면에 웃음을 그리며 그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간밤엔 잘 주무셨습니까?”
“……아, 네.”
‘어제 같이 잤으면서.’
심지어 아침에 카밀루스가 이미 본인은 잠이 깼으면서 이온을 깨우지 않은 탓에, 시종들이 이온의 방에 들어와 온 저택을 휘젓고 다니게 했다.
에밀리의 말마따나 결국 카밀루스의 방에서 함께 자는 모습을 온 집안사람들에게 다 들키고 말았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이온에게 건네는 그 나름의 신호 같은 거였다.
이온이 그를 살짝 노려보자 카밀루스가 주변의 시종들을 잠시 뒤로 물린 뒤 그의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고 마치 연회에서 만난 파트너를 대하듯이 흰 장갑을 낀 이온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도발하듯이 이온에게 한마디 했다.
“어떤 레이디와 첫 춤을 추려고 이렇게까지 준비를 하셨습니까?”
“아무리 봐도 제 첫 춤보다는 대공의 첫 춤에 레이디들이 더 많은 관심을 보일 것 같습니다만…….”
이온의 대꾸에 카밀루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말은 안 했지만 내 첫 상대는 당연히 너지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의미가 담긴 제스처였다.
그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에밀리가 이온의 어깨를 붙잡으며 카밀루스 앞에서 자랑을 시작했다.
“우리 오라버니가 원래는 단벌 신사처럼 매번 연회에 비슷해 보이는 옷만 입고 다녔는데, 오늘은 보세요, 크라바트부터 나비 모양으로 예쁘게 묶었답니다.”
“……에밀리.”
물론 물먹이는 건지, 진짜 칭찬을 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되는 터라 이온이 한숨 섞은 목소리로 에밀리를 불렀다.
그러나 카밀루스가 뭐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이었다.
방 밖에서 갑자기 누군가 급하게 달려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익숙한 목소리는 그의 전담 버틀러의 것이었다.
아무리 편한 사이라고는 하지만 대공과 대화 중인데 끼어들다니. 많이 급한 일인가 싶었던 이온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문 쪽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말하면서 기껏해야 아버지가 부르는 정도겠거니 생각했다.
연말 연회 참석으로 한창인 저택 분위기를 고려할 때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버틀러가 손에 종이를 들고 있는 것을 발견한 이온은 단순 집안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리고 누가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충분히 짐작이 되었다.
역시나 예상대로의 전개로 흘러갔다.
“황제 폐하께서 소공작께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
순간 꽤 화기애애했던 방 안의 분위기가 얼음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조금 서늘해졌다.
안쪽으로는 차마 들어오지 못하는 버틀러에게 다가간 이온이 그에게서 편지를 건네받았다. 이온이 봉투를 뜯어 보는 동안 버틀러는 심란한 이야기를 또 전했다.
“그리고 황궁에서 마차 한 대를 보내왔습니다.”
이온은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열어 보았다.
연회에 앞서서 만나 할 말이 있으니, 마차를 타고 방문해 주길 청하는 바야.
경애하는 이온 크레이거에게.
그간 간간이 오는 버니언의 편지는 전부 다 무시했었다. 황궁으로 오라는 내용도 종종 있었으나 혼자서 그와 만나는 건 좋은 판단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황궁에서 들려오는 버니언의 소식을 들으면 그가 썩 정상적인 상태라고 판단하기엔 무리가 따르기도 했다.
그런데 어차피 내황성에 들어가야 하는 오늘, 마차까지 보냈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
이온이 굳은 표정으로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카밀루스가 뒤로 다가와 어깨를 붙잡았다.
“불안하면 같이 갈까, 이온?”
카밀루스는 초대하고 싶지 않은 손님이었겠지만, 이온이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게 낫겠어. 오늘 네가 나와 첫 춤을 추려면 말이지.”
이온이 뒤에 덧붙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카밀루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이온이 먼저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저택 밖으로 나가니 정원 한가운데에 과연 버틀러의 말대로 오브라이언 황실을 상징하는 문장이 그려진 붉은 천으로 뒤덮인 마차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마차 앞에 선 황궁의 시종이 이온을 데려가기 위해 대기 중이었고, 공교롭게도 그 호위를 맡은 사람은…….
노아기사단의 아스타틴이었다.
이온은 저택의 높은 현관에 서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오늘의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평소와 달리 붐비는 내황성의 입구.
그래도 황실의 휘장을 단 마차가 나타나자 모두가 길을 비켜 준 데다가, 문지기들도 우선 통과를 시켜 주어서 그 앞에서 긴 시간을 소요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뒤따라 오던 대공의 마차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시간 차 없이 문을 통과해 두 사람은 황성 앞에 도착했다.
이온은 아스타틴이 마차의 문을 직접 열어 주는 마차에서 카밀루스의 조심스러운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렸다.
아직도 공석인 황궁의 시종장 대신 나이가 많은 시종 하나가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비렌시움 대공 전하, 크레이거 소공작. 폐하께서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혹시 버니언이 카밀루스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카밀루스의 동행은 짐작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시종은 별말 없이 두 사람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황궁의 복도를 걷는 이온의 발걸음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 마침내 문이 활짝 열린 응접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응접실의 입구에서 바닥에 길게 늘어진 털 망토를 발견하자마자, 이온과 카밀루스는 자세를 낮추며 황제를 향한 예를 올렸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평소보다 더 엄숙한 목소리로 읊은 인사말에 창문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버니언은 돌아섰다. 이온은 순간 흠칫했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버니언은 훨씬 살이 내린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온에게 환히 웃는 모습을 보인 그는 카밀루스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듯 무시하고 이온에게 뚜벅뚜벅 다가와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소공작, 드디어 왔구나. 이렇게 애타게 기다렸었는데 오지 않아서 얼마나 초조했는지 아는 건가?”
그에 이온은 몸을 일으키며 따라서 눈웃음을 그렸다.
“몸이 안 좋아 그동안 편지의 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버니언은 이전의 무시는 잊기라도 했는지 이온을 눈앞에 두자 웃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몹시 기꺼워했다.
그는 이온의 손을 잡고 일단 소파에 앉혔다. 이온이 아직 버니언에게 인사도 받지 못하고, 앉는 걸 허락받지도 못한 카밀루스를 살피고 있는데, 버니언이 바깥을 향해 명했다.
“문을 닫아라.”
양개형 문이 닫히고 난 뒤에야 버니언이 카밀루스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형님도 앉으시지?”
빈정거림이 묻어나는 소리였으나 카밀루스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이온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러자 버니언이 이온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부담스럽게 눈을 맞추며 그가 곧 엄살을 떨기 시작했다.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 이온.”
카밀루스가 굳은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으나 버니언은 이제 그딴 건 신경 안 쓰는 눈치였다.
“격조했던 점 송구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