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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42)화 (242/317)

“많이 아팠으면 그럴 만하지. 이해할 수 있어, 전부.”

왜 이렇게 관대하지?

이온은 이건 또 무슨 수작질인가 싶어 버니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걸 저한테 관심을 표하는 것으로 느꼈는지 버니언이 눈웃음으로 화답하는 바람에 이온은 재빨리 말을 붙였다.

“……곧 연회의 시작인데 이렇게 절 따로 부르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응, 너와 중대하게 상의할 부분이 있어서 말이야.”

“말씀하시지요.”

이온의 말에 버니언은 그들이 앉은 테이블을 눈짓했다.

지난번의 광기 어린 눈이 기억나 버니언을 발견한 순간부터 그가 무슨 짓을 할까 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한 터라 미처 다른 곳을 살피지 못했다.

눈짓을 따라가니 그 위에 화려한 레이스로 꾸민 흰 천에 덮인 무언가가 보였다. 아마도 상자 같은 것이 그 아래에 깔려 있는 모양이었다.

“이걸 연회에 앞서 너에게 먼저 보여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이온.”

“……무엇입니까?”

“직접 확인해 볼래?”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걸 준비해 놨을지.

상당히 미심쩍었지만 이온은 일단 그의 바람에 따라 천을 거두어 냈다. 그러자마자 먼저 뭔지 알아본 카밀루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자 버니언은 오히려 소파 등받이에 여유롭게 기대며 카밀루스에게 씩 웃어 보였다.

투명한 유리관 상자 안에는 한 쌍의 반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

보자마자 이 의도를 알아채지 않을 수가 없었던 이온도 눈썹을 살며시 꿈틀했다.

그러자 버니언이 원치 않은 설명을 이었다.

“연회에서 이온, 너와 첫 춤을 추고 널 내 황후로 정식으로 맞이할 거야.”

벌써 여러 번 겪은 상황이라 미치셨냐고 반문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온은 헛소리를 듣고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제 배 속에 대공의 아이가 있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 아이 내가 잘 키워 주겠다고 했잖아. 설마 내가 거짓말을 한 줄 알았어? 진짜로 진지하게 제안한 거였는데.”

카밀루스도 골치가 아픈지 옆에서 관자놀이를 누르며 깊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헛소리도 적당히 해야지 받아 주지.”

솔직히 말하면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물론 버니언은 이제는 그런 그의 비꼼을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 있었던 터였다.

버니언이 이온을 바라보며 망상을 이어 갔다.

“네가 제국의 황후가 되는 거야, 그 배 속의 아이는 황태자가 될 거고. 당연하지만 난 바람 따위 안 피워. 그리고 네가 세상을 떠나도 나의 황후 자리는 오로지 네 것일 거야.”

“…….”

얼마 전 황궁에서 시종 하나가 술에 취한 버니언에게 강제로 당했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했다.

침실 문도 열려 있었던 탓에 모두에게 숨길 수도 없게 된 탓에 그 황궁 시종은 직을 반납하고 황도를 떠났다.

그런 사건을 일으킨 주제에 말이 너무 번지르르해서 어이가 없었다.

이온은 그렇지만 이제 슬슬 그에게 현실을 일깨워 줄 차례임을 느꼈다.

난 절대 네 것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을.

이온이 입가에 띤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다음 연회에서의 제 첫 춤 상대가 되시려면 대공과의 내기에서 우선 이기셔야 하는데 잊으신 건 아니시겠죠.”

산통 깨는 소리에 버니언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그 길드장 새끼를 말하는 거야?”

“예, 황실의 골칫거리 아닙니까? ……돌아가신 태후 폐하의 아픈 기억을 끌어내 송구합니다만, 여기 계신 대공 전하와 태후 폐하의 불륜 소식도 그쪽에서 시작됐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그리고 황궁의 시종장을 내치게 된 그 일도 그자가 조작한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이온의 말에 버니언이 오른손 주먹을 힘줄이 돋도록 꽉 쥐는 모습이 보였다.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입술 끝이 씰룩거리는 게 보였다.

“그건 네가 신경 쓸 거 없어. 그건 그냥 분탕질을 즐기는 새끼라서 그래. 생각해 봐, 지금껏 한 짓도 전부 쓸모없는 거잖아. 이제 난 그 새끼 신경 안 써.”

분탕질을 즐기는 새끼. 지금껏 한 짓도 쓸모가 없다.

이온은 제 욕을 면전에서 들으면서 묘한 기분에 휩싸였지만, 애써 외면하려는 버니언의 모습을 보는 재미가 더 컸기 때문에 마음의 불편함 정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이온은 이번에도 해사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못 찾으셔서 그런 건 아니시고요?”

“…….”

“그를 못 찾아서 칼 단장과 아스타틴 부단장도 심하게 꾸짖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이온의 물음에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던 버니언이 뒤에 덧붙여진 말엔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이온은 조금만 더 자극하면 그가 임계점에 도달하리라는 걸 깨달았지만 굳이 멈추지 않았다.

“제가 전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도 제 나름대로 보고 듣는 것이 있다고요.”

“……황궁에 크레이거 공작가의 첩자라도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이온?”

여러 일을 겪으면서 요즘 제 안위에 특히 민감해진 버니언이 본능적으로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이온은 긴장하지 않았다.

허리를 살짝 굽혀 버니언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한 이온이 작게 중얼거렸다.

“크레이거 공작가와 제가 언제나 한 묶음으로 묶이는 것은 아니죠.”

“무슨 뜻이지……?”

질문을 받은 이온이 대답 없이 눈매만 접어 웃자 버니언은 그 와중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렇지만 다음 순간, 이온이 굽혔던 허리를 다시 펴며 카밀루스를 돌아보자 버니언의 눈에서 다시 날이 섰다.

짐승 같은 본능으로 지금 이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대략 짐작을 한 모양이었다.

그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뭐야…… 설마.”

“오늘 연회, 저와의 첫 춤을 추는 사람은 대공이 되실 겁니다.”

이온의 말에 버니언이 조금 넋이 빠진 얼굴로 카밀루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둘의 대화를 여유 있는 태도로 듣고 있던 카밀루스가 이야기를 완성시켰다.

“그가 이미 내황성에 들어와 있어.”

“……뭐?”

버니언은 벌써부터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지난 몇 달간 그를 찾느라 투입된 인력이 꽤 많았으니 이해할 만도 했다. 그러나 아스타틴은 어느 순간부터 아예 손을 놨으니 그의 쪽으로 전혀 소식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어느 순간이란 오히려 그가 아스타틴과 칼을 불러다가 언제 찾느냐고 재우쳤을 때부터였다.

그러나 동시에 아스타틴과 칼이 그를 속이려고 은근히 무언가 찾는 척, 조금씩 정보를 주기는 했을 터였다.

잘못된 정보로.

아스타틴은 모르겠지만, 칼은 꽤 거짓말을 잘하는 인물인 모양이었다.

“그 자식, 귀족이었어……?”

내황성에 있다는 말에 버니언은 콧김이 나오지 않을까 싶을 만큼 크게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귀족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하긴 했을 텐데, 아무래도 카밀루스가 본인보다 먼저 찾았다는 생각에 뭐든 짜증이 나는가 보았다.

카밀루스는 혼잣말처럼 내뱉어진 버니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가의 사람이지, 그것도 꽤 유력한.”

“그래, 그렇지…….”

그럴 수밖에 없겠지.

눈알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버니언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지금 순간 무수히 많은 고위 귀족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그 안에 바로 앞에 있는 이온 크레이거는 없을 거였다.

버니언은 방금 전까지 이온에게 청혼하고 있던 자신의 모습은 잊어버렸는지, 제 뒤통수를 여러 번 친 라치크의 길드장을 찾는 데 완전히 시선이 쏠렸다.

“어떤 새끼야? 데리고 들어왔으면 황궁 안에도 끌고 와야지. 그 정도는 해야 내가 믿지.”

“물론 그렇게 해야지.”

“그리고 그 길드장이라는 증거도 물론 있겠지?”

“그거야 지난 몇 달간 추적한 아스타틴이 증명해 주지 않을까 싶은데. 바로 부르도록 해. 우릴 배웅하러 직접 왔던데, 어차피 근처에 있을 것이지 않나.”

꼬박꼬박 대답을 하는 카밀루스가 몹시 마음에 안 든다는 눈치였으나 버니언은 그의 말대로 순순히 따랐다.

버니언이 응접실 문 쪽을 향해 외쳤다.

“아스타틴 부단장을 불러 와. 당장!”

“예, 폐하.”

사실 아스타틴이 그들을 배웅 나오기는 했지만, 이는 미리 협의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아스타틴도 갑자기 불려 오는 데에는 대비가 안 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기실 이온의 입장에서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그의 입은 진실만을 담으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얼마 안 가 아스타틴이 응접실에 나타났다.

그는 이온과 카밀루스, 그리고 버니언 셋이 앉아 있는 풍경을 보고서 어쩌면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직감했을지도 몰랐다.

특히나 버니언이 무서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버니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스타틴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그때, 버니언이 카밀루스를 바라보았다.

“그 새끼도 내황성에 있다면서. 같이 불러야지. 거기까지 해야 내기가 완성되는 거야, 알아?”

그에 카밀루스가 여유 있는 미소를 입가에 띠며 한마디로 버니언의 입을 닥치게 했다.

“오늘 연회에서 이온과의 첫 춤은 어차피 내가 출 테니까 그런 건 걱정해 주지 않아도 돼.”

“…….”

“아스타틴, 고개를 들어라.”

명을 들은 아스타틴이 순순히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을 마주친 카밀루스가 추궁의 말을 흘리기 시작했다.

“넌 진실대로만 말하면 된다. 일전에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라치크의 길드장을 딱 한 번 눈앞에서 봤다.’라고.”

예상대로의 주제가 카밀루스의 입에서 나오자 아스타틴이 긴장하는 기색을 보였다. 잠시 버니언과 눈을 마주친 그는 천천히 입을 열어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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